남녀의 사랑은 왜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가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가 들려주는 사랑과 고독의 철학

byFrancis Lee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물방앗간의 아가씨」를 처음 들으면 아름다운 그러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한 젊은 방앗간 직공이 길을 떠나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를 만나고, 그녀를 사랑하고, 그러나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죽음에 이르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작품을 오래 들으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들려온다.

이것은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이 자신의 고독을 어떻게 견디는가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그 고독의 곁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시냇물이 흐르고 있다.

첫 곡 「Das Wandern」에서 청년은 세상을 향해 걷는다. 그는 방랑을 사랑한다. 물처럼 흐르는 것이 삶이라고 생각한다. 아직 목적지는 없다. 그는 그저 움직인다.

그런데 두 번째 곡에서 시냇물을 만나면서 질문이 생긴다.

「Wohin?」

어디로?

이 질문은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인간은 언제부터 자신의 삶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묻기 시작하는가. 아마도 무언가를 사랑하기 시작할 때일 것이다. 사랑은 우리에게 처음으로 목적지를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는 물방앗간 아가씨를 만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이 이제 의미를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비극이 시작된다.

그는 사랑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사랑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하기 때문이다.

「Am Feierabend」에서 그는 열심히 일한다. 그러나 일을 잘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그녀에게 자신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를 보여주고 싶어 한다.

「Der Neugierige」에서는 시냇물에게 묻는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는가.

그는 그녀에게 직접 묻지 못한다.

이 장면에서 이미 사랑의 본질적인 문제가 드러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직접 물어보는 대신 그는 자신의 상상 속에서 답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Ungeduld」에서는 마침내 외친다.

"내 마음은 당신의 것이다."

그러나 사랑은 곧 소유욕으로 변한다.

그 결정적인 순간이 제11곡 「Mein!」이다.

"그녀는 나의 것이다."

이 한마디에서 사랑은 이미 흔들리고 있다.

사랑한다는 것과 소유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기 때문이다.

칸트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하나의 목적으로 대하는 일이어야 한다. 타인을 자신의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러나 이 청년에게 그녀는 점점 자신의 행복을 보증해주는 존재가 된다.

그녀가 자신을 사랑해야 자신도 가치 있는 사람이 된다.

그래서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돌리는 순간 그는 자신의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것처럼 느낀다.

사냥꾼의 등장은 그래서 단순한 삼각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내면에 숨어 있던 소유욕을 폭로하는 사건이다.

그는 사랑하는 여인을 잃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녀를 통해 얻었다고 믿었던 자기 자신의 의미를 잃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사랑은 질투로 변한다.

그리고 초록색도 변한다.

처음에는 사랑의 색이었다.

「Die liebe Farbe」에서 그는 초록을 사랑한다.

그러나 곧 「Die böse Farbe」에서는 초록을 미워한다.

색깔이 변한 것이 아니다.

그 색에 대한 인간의 마음이 변한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사랑이 얼마나 쉽게 대상보다 자신의 해석을 사랑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종종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사람이 내게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사랑한다.

그래서 사랑이 깨지면 상대만 잃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도 잃어버린다.

「Trockne Blumen」에 이르면 그는 자신의 사랑이 죽었다고 말한다.

꽃들도 죽는다.

그러나 자연은 다시 봄을 맞는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자연은 반복되지만 인간의 삶은 반복되지 않는다.

한 번 잃어버린 사랑은 같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Die schöne Müllerin」은 단순한 연애 이야기를 넘어선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사랑한다.

우리가 영원히 살 수 있다면 사랑의 절박함도 지금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사랑은 시간을 초월하고 싶어 하지만 인간은 시간을 초월할 수 없다.

그래서 사랑에는 언제나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사랑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상실을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슈베르트는 그 사실을 아름답게 숨기지 않는다.

그는 인간의 사랑을 완성된 사랑으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사랑이 인간을 얼마나 취약하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서 인간을 끝까지 버리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

여인도 아니다.

사랑도 아니다.

자신의 의지도 아니다.

시냇물이다.

시냇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곁에 있다.

기쁠 때도 흐르고, 질투할 때도 흐르고, 절망할 때도 흐른다.

그리고 마지막 「Des Baches Wiegenlied」에서 시냇물은 그에게 자장가를 불러준다.

「Gute Ruh'.」

편히 쉬어라.

여기서 작품의 철학적 의미가 갑자기 깊어진다.

처음에 그는 시냇물에게 물었다.

「Wohin?」

어디로 가는가.

마지막에는 시냇물이 대답한다.

이제 쉴 곳에 도착했다고.

"지친 방랑자여, 이제 집에 왔다."

그런데 그 집은 물방앗간이 아니다.

그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사랑의 집도 아니다.

그 집은 죽음이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죽음을 공포의 언어로 표현하지 않는다.

자장가로 표현한다.

여기에서 부처의 가르침이 떠오른다. 인간의 고통은 욕망에서 비롯된다. 무엇인가를 원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것을 갖지 못했다는 결핍을 의미한다. 갖게 되면 잃을까 두려워한다. 결국 욕망은 인간을 끊임없이 불안하게 만든다.

「Die schöne Müllerin」의 청년이 바로 그러하다.

그는 처음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저 걸었다.

그러나 사랑을 원하면서부터 불안해졌다.

사랑을 얻으면서부터 잃을까 두려워졌다.

그리고 결국 사랑을 잃으면서 자신도 잃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죽음은 단순한 실연의 결과가 아니다.

욕망의 끝이다.

그런데 슈베르트는 여기에서 한 가지 놀라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욕망이 끝난 자리에서 음악이 시작된다.

청년은 더 이상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때 시냇물이 노래한다.

그것이 이 작품에서 음악이 갖는 의미다.

음악은 인간에게 사랑을 돌려주지 않는다.

잃어버린 시간을 돌려주지도 않는다.

죽음을 없애지도 않는다.

다만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

그래서 「Die schöne Müllerin」의 마지막은 절망이면서 동시에 평화다.

인간은 실패했다.

그러나 음악은 실패하지 않았다.

사랑은 끝났다.

그러나 시냇물은 계속 흐른다.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노래는 남는다.

어쩌면 이것이 슈베르트가 말하고 싶었던 가장 깊은 진실인지도 모른다.

인간은 사랑을 소유할 수 없다.

행복도 소유할 수 없다.

젊음도 소유할 수 없다.

삶조차 소유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흐르는 것들 속에서 잠시 살아가는 것이다.

시냇물처럼.

그리고 음악처럼.

그래서 「Die schöne Müllerin」의 진정한 질문은 "그녀가 나를 사랑했는가"가 아니다.

진짜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무엇을 사랑하면서 나 자신을 잃어버렸는가."

그리고 마지막에 시냇물이 들려주는 대답은 어쩌면 이렇다.

너는 너무 오래 무언가를 붙잡으려 했다.

이제 놓아도 된다.

흐르게 두어라.

그리고 쉬어라.

그것이 슈베르트가 죽음을 자장가로 바꿀 수 있었던 이유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이 더 이상 붙잡을 수 없는 마지막 순간이다.

그리고 음악은 그 순간까지 인간과 함께 흐른다.

그래서 「Die schöne Müllerin」은 사랑의 실패에 관한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소유하려 했던 모든 것이 결국 자신의 손에서 흘러나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그 흐름의 끝에서 비로소 인간은 깨닫는다.

삶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시냇물은 계속 흐른다.

방앗간은 계속 돌아간다.

계절은 다시 돌아온다.

사랑은 끝난다.

인간은 죽는다.

그러나 음악은 그 모든 것을 하나의 노래로 만든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죽음은 더 이상 침묵이 아니다.

노래의 마지막 음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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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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