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도 있어야 하고, 온라인 게임도 좋아야 하고, 아이도 최고로 키워야 한다고?
한국 슬롯는 이상한 질문을 하고 있다.
“왜 젊은이들은 결혼하지 않는가?”
그러나 이 질문은 처음부터 잘못되었다.
정확한 질문은 이것이어야 한다.
“왜 우리는 결혼하려는 사람에게 이렇게 많은 것을 요구하는가?”
결혼하지 않는 청년들을 개인주의자라고 비난하기 전에, 우리가 그들에게 어떤 결혼을 요구하고 있는지부터 돌아봐야 한다.
한국에서 결혼은 더 이상 두 사람이 만나 함께 살아가는 일이 아니다. 결혼하려면 집이 있어야 하고, 안정된 온라인 게임이 있어야 하고, 일정한 소득이 있어야 한다. 결혼식을 제대로 치러야 하고, 예물과 예단도 준비해야 한다. 아이를 낳으면 좋은 어린이집을 찾아야 하고, 좋은 학교에 보내야 한다. 아이가 경쟁에서 뒤처지면 부모가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결국 사교육이다.
영어, 수학, 논술, 예체능, 각종 입시 준비가 시작된다.
그러니 오늘날 한국에서 결혼은 사랑의 결실이 아니라 거대한 중산층 프로젝트가 되어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불편한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결혼을 망친 것은 청년만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슬롯가 만들어낸 중산층의 욕망이 결혼을 지나치게 비싸게 만들었다.
과거에는 가난해도 결혼할 수 있었다.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두 사람이 만나 방 한 칸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결혼은 완성된 삶의 결과가 아니라 함께 삶을 만들어가는 시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결혼하기 전에 이미 일정 수준의 삶을 완성해야 한다.
아파트가 있어야 한다.
적어도 전세는 마련해야 한다.
좋은 온라인 게임이 있어야 한다.
자동차도 있어야 한다.
결혼식도 남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수준이어야 한다.
아이를 낳으면 사교육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한국 슬롯가 말하는 ‘정상적인 결혼’이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 조건을 모두 충족할 수 있는 청년이 얼마나 되는가.
더 심각한 것은 이 기준을 청년들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부모 세대가 만들었고, 부동산 시장이 강화했고, 교육시장이 확대했고, 결혼정보회사가 상품화했다.
그리고 슬롯 전체가 그것을 정상이라고 인정했다.
결혼정보회사를 보라.
사람을 만나 사랑하는 일조차 시장의 평가표로 만들어버렸다.
직업은 몇 점인가.
연봉은 얼마인가.
부모의 재산은 얼마인가.
아파트가 있는가.
학벌은 무엇인가.
키는 얼마인가.
외모는 어떤가.
이런 조건들을 조합해서 인간의 ‘배우자 가치’를 계산한다.
사람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기 전에 가격표부터 붙인다.
이것이 과연 우리가 원하는 결혼의 모습인가.
결혼정보회사가 잘못되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시장은 수요가 있는 곳에 만들어진다. 문제는 왜 한국 슬롯에서 배우자를 선택하는 일까지 이렇게 철저하게 시장의 논리를 따르게 되었느냐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사람에게서 인간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더 근본적인 문제가 등장한다.
부모 세대의 기대다.
부모들은 자녀에게 좋은 배우자를 만나라고 한다.
그러나 그 ‘좋은 배우자’란 무엇인가.
대부분의 경우 좋은 사람보다는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이다.
대기업에 다니는가.
공무원인가.
전문직인가.
집이 있는가.
부모가 경제적으로 안정되어 있는가.
이런 조건이 사랑보다 먼저 등장한다.
자녀의 결혼을 걱정한다면서 사실은 자녀가 결혼을 통해 어느 정도의 슬롯적 지위를 확보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청년들에게 묻는다.
“왜 결혼을 안 하니?”
하지만 부모 세대가 요구하는 결혼의 수준을 충족시키려면 청년들은 결혼하기도 전에 이미 상당한 자산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결국 부모가 원하는 결혼과 청년이 감당할 수 있는 결혼 사이에 거대한 간극이 생긴다.
주택은 그 간극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한국에서 집은 단순한 주거공간이 아니다.
결혼의 자격증처럼 취급된다.
서울의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는가.
어느 지역에 사는가.
몇 평인가.
신축인가.
역세권인가.
이런 조건들이 배우자의 가치와 연결된다.
그 결과 청년들에게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사는 일이 아니라 집을 마련할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을 증명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집값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집을 마련하지 못한 청년에게 “노력 부족”이라는 말을 한다.
이것은 매우 잔인한 논리다.
월급으로 수억 원짜리 주택을 마련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시대에, 주택을 마련하지 못한 사람에게 결혼할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교육은 더욱 심각하다.
한국에서 아이를 낳는 순간 부모는 또 하나의 거대한 경쟁에 들어간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보다 뒤처지면 어떡하지.
영어를 못하면 어떡하지.
수학을 못하면 어떡하지.
좋은 대학에 못 가면 어떡하지.
결국 부모는 아이에게 투자하기 시작한다.
사교육비가 늘어나고, 부모의 노동시간도 늘어난다.
그러다 보면 출산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경제적 공포가 된다.
그래서 청년들에게 “아이를 낳으라”라고 말하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이야기다.
정작 그 아이가 살아갈 20년의 비용을 생각하는 사람은 부모 자신이다.
청년들은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아이를 낳지 않는다.
아이를 싫어해서가 아니다.
아이에게 좋은 삶을 제공하지 못할까 봐 두려운 것이다.
이것은 이기주의가 아니라 바카라임감일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개인주의라고 부른다.
나는 이 지점에서 한국의 저출생 논쟁이 완전히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청년의 욕망을 비판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중산층의 욕망을 비판해야 한다.
더 큰 집.
더 좋은 아파트.
더 좋은 학군.
더 좋은 대학.
더 좋은 온라인 게임.
더 좋은 자동차.
더 많은 사교육.
더 높은 슬롯적 지위.
이 끝없는 욕망이 바로 결혼과 출산의 가격을 올리고 있다.
문제는 욕망 그 자체가 아니다.
누구나 더 나은 삶을 원한다.
문제는 그것이 슬롯적 의무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내 아이가 남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
내 집이 남보다 작으면 안 된다.
내 배우자의 조건이 남보다 떨어지면 안 된다.
내 아이가 명문대에 가지 못하면 실패한 부모처럼 느껴진다.
이런 슬롯에서는 결혼이 행복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경쟁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한 선택이 된다.
그러니 젊은 세대가 질문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왜 내가 이 경쟁에 들어가야 하는가?”
그리고 일본은 이미 이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을 보여주고 있다.
“들어가지 않겠다.”
처음에는 결혼할 돈이 없어서 결혼하지 않는다.
그다음에는 결혼하지 않아도 사는 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결국 결혼 자체가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한국이 두려워해야 할 미래다.
한국은 아직 청년들의 결혼 의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처럼 결혼의 조건을 계속 높인다면 언젠가 그 의향 자체가 사라질 수 있다.
그때는 정말로 늦는다.
정부가 출산장려금을 아무리 올려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결혼하지 않는 것이 더 편하고, 혼자 사는 것이 더 안전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경제적으로 더 합리적인 슬롯에서 누가 정바카라 홍보 몇 마디를 듣고 인생의 방향을 바꾸겠는가.
그래서 지금 필요한 것은 청년들에게 결혼을 권하는 캠페인이 아니다.
한국 슬롯의 중산층 욕망을 해체하는 일이다.
집이 없어도 결혼할 수 있어야 한다.
작은 집에서 시작해도 부끄럽지 않아야 한다.
결혼식에 수천만 원을 쓰지 않아도 괜찮아야 한다.
아이에게 모든 사교육을 시키지 않아도 부모가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아야 한다.
아이의 대학 서열이 부모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부모가 자녀의 결혼을 자신의 슬롯적 체면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결혼은 중산층의 자격증이 아니다.
결혼은 부의 과시도 아니고, 부모의 체면을 세워주는 행사도 아니다.
두 사람이 서로의 삶을 함께 바카라임지기로 하는 인간적인 약속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가장 인간적인 약속을 가장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만들고 있다.
돈으로 평가하고, 집으로 평가하고, 직업으로 평가하고, 학벌로 평가하고, 부모의 재산으로 평가한다.
그리고 나서 청년들에게 왜 사랑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이 얼마나 모순적인가.
사랑을 시장의 언어로 평가하면서 사랑이 사라졌다고 탄식한다.
결혼의 가격을 계속 올려놓고 결혼하는 사람이 줄었다고 놀란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 필요한 슬롯적 비용을 계속 높여놓고 출산율이 낮아졌다고 청년을 탓한다.
이제는 솔직해져야 한다.
한국의 저출생은 청년들이 결혼을 몰라서 생긴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청년들이 한국 슬롯를 너무 잘 알아서 생긴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알고 있다.
결혼하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집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이를 낳으면 사교육 경쟁이 시작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모든 비용을 결국 자신들이 감당해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러니 그들은 계산한다.
그리고 계산 끝에 결혼을 미루거나 포기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계산하지 말라고 할 것이 아니라, 계산하지 않아도 되는 슬롯를 만들어야 한다.
결혼의 조건이 돈이 되어버린 슬롯에서 결혼을 독려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돈이 많아야 결혼할 수 있다는 믿음부터 깨야 한다.
집이 있어야 결혼할 수 있다는 믿음도 깨야 한다.
아이에게 최고 수준의 교육을 제공해야 좋은 부모라는 믿음도 깨야 한다.
부모의 재산이 자녀의 결혼 가능성을 결정하는 슬롯도 바꾸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싸워야 할 것은 청년의 개인주의가 아니다.
우리 슬롯에 너무 깊이 뿌리내린 중산층의 욕망이다.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더 좋은 것을 가져야 하고, 남보다 앞서야 하고, 자녀만큼은 반드시 성공시켜야 한다는 욕망.
그 욕망이 집값을 올리고, 교육비를 올리고, 결혼 비용을 올리고, 출산의 비용까지 올려놓았다.
그리고 이제 그 욕망이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 있다.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는다.
아이를 낳지 않는다.
가족을 만들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유를 청년들에게서 찾는다.
그러나 어쩌면 진짜 문제는 청년들이 욕망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많은 욕망을 청년들에게 물려주었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결혼을 살려내고 싶다면 먼저 결혼을 비싸게 만든 슬롯부터 돌아봐야 한다.
청년에게 결혼하라고 말하기 전에 부모가 요구하는 결혼의 조건을 낮춰야 한다.
아이를 낳으라고 말하기 전에 슬롯가 부모에게 요구하는 완벽한 부모의 기준을 낮춰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
작은 집에서 시작하는 결혼도 결혼이고, 부족한 두 사람이 함께 만들어가는 가정도 충분히 좋은 가정이라는 사실을.
결혼은 돈이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다.
결혼을 위해 모든 것을 갖추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결혼은 모든 것을 갖추지 못한 두 사람이 서로의 부족함을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보기로 결심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우리는 그 시작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집을 요구하고, 돈을 요구하고, 학벌을 요구하고, 직업을 요구하고, 부모의 재산까지 요구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청년들에게 묻는다.
“왜 결혼하지 않느냐?”
이제 질문을 바꾸자.
“우리는 왜 결혼을 이렇게 어렵고 비싸고 위험한 선택으로 만들어버렸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한국의 결혼 포기는 일본을 따라가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일본보다 더 빠르게, 더 철저하게 진행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뒤늦게 깨닫게 될 것이다.
결혼을 포기한 것은 청년들이 아니라는 것을.
사실은 우리 슬롯가 먼저 결혼을 포기하도록 만들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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