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사랑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나는 왜 사람보다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것이 더 쉬울까.
강아지가 빨래를 어질러 놓으면 웃음이 난다. 고양이가 소파를 긁어놓아도 한숨을 쉬면서 결국 쓰다듬는다. 새벽에 잠을 깨워도 화를 내다가 이내 품에 안는다. 반려동물이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서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사람이 같은 행동을 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왜 이렇게 말을 안 듣니?”라고 하고, 배우자가 실수하면 “당신은 항상 그렇다”라고 한다. 친구가 약속을 어기면 실망을 넘어 그 사람의 인간성까지 의심한다. 온라인 게임 동료가 실수하면 행동 하나를 가지고 그 사람 전체를 평가한다.
반려동물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라고 묻지만 사람에게는 “저 사람은 원래 저래”라고 결론을 내린다.
이 차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쩌면 우리가 동물을 특별히 더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점점 잊어버리고 있다는 신호인지도 모른다.
반려동물에게는 기대가 적다.
개에게 성공을 요구하지 않는다. 고양이에게 좋은 온라인 게임을 가지라고 하지 않는다. 다른 동물보다 뛰어나라고 비교하지 않는다. 돈을 벌어 오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저 건강하게 살아 있고 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반려동물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사랑받는다.
하지만 인간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해야 한다.
성적을 증명해야 하고, 능력을 증명해야 하고, 경제적 가치를 증명해야 한다. 좋은 부모임을 증명해야 하고, 좋은 배우자임을 증명해야 한다. 심지어 행복한 사람이라는 사실까지 증명해야 한다.
SNS를 보면 모두가 성공했고, 모두가 행복하며, 모두가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바로 여기에서 칸트의 철학이 오늘 다시 중요해진다.
칸트는 인간의 가치를 인간이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에서 찾지 않았다. 인간은 이성을 가진 존재이며 스스로 목적을 설정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존엄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은 결코 단순한 수단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단순한 철학적 명제가 아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면 우리는 얼마나 자주 사람을 수단으로 대하는가.
아이를 부모의 자랑으로 만들고, 배우자를 자신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만들고, 친구를 슬롯적 네트워크로 만들고, 온라인 게임 동료를 성과를 만들어 내는 부품으로 만든다.
심지어 사랑에서도 계산한다.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받을 수 있는가?”
“이 사람이 나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이 사람과 함께 있으면 내 삶의 수준이 얼마나 올라가는가?”
그 순간 인간은 더 이상 목적이 아니다.
수단이 된다.
그런데 반려동물과의 관계에서는 놀랍게도 이런 계산이 훨씬 적다.
반려동물이 나에게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주지 않아도 사랑한다.
슬롯적 지위를 높여주지 않아도 사랑한다.
내가 힘든 날에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 고맙다.
우리는 반려동물에게서 인간에게 적용해야 할 칸트의 원칙을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존재 그 자체를 존중하는 것.
문제는 그것을 인간에게 돌려주지 못한다는 데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레비나스가 등장한다.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내가 이해하고 소유하고 규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끊임없이 바카라임을 요구한다.
이것은 매우 불편한 철학이다.
왜냐하면 타자를 진정으로 만난다는 것은 상대방을 내 기준에 맞춰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준을 잠시 내려놓고 그 사람의 존재 앞에 서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을 너무 쉽게 안다고 생각한다.
“저 사람은 이래.”
“저 사람은 저래.”
“저 사람은 원래 이기적이야.”
“저 사람은 정치적으로 저쪽 사람이니까 저런 생각을 하는 거야.”
이렇게 타인을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 버리면 편하다.
그 사람의 복잡한 사정을 들여다볼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는 그렇게 간단하게 규정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타자의 얼굴은 나의 판단보다 먼저 나에게 말한다.
“나를 함부로 규정하지 말라.”
반려동물과 인간의 차이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반려동물의 마음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조심스럽게 관찰한다.
고양이가 갑자기 숨으면 “무슨 일이 있나?”라고 생각한다.
개가 평소와 다르게 행동하면 아픈지 걱정한다.
그런데 인간은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찰하지 않는다.
상대가 침묵하면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화를 내면 공격한다고 생각하며, 멀어지면 나를 싫어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 얼굴 뒤에 있는 인간을 보지 못한다.
그것이 현대 인간관계의 비극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한나 아렌트의 인간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렌트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하게 본 것은 단순히 살아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었다.
인간은 서로 다른 존재들이 함께 세상에 나타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공동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존재다.
인간다움은 혼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공간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점점 그 공동의 세계를 잃어가고 있다.
같은 집에 살아도 서로 다른 화면을 보고 있다.
한 식탁에 앉아 있어도 각자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수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지만 정작 마음을 털어놓을 사람은 없다.
친구의 숫자는 늘어났지만 친구에게 전화하기는 어려워졌다.
SNS의 팔로워는 수천 명인데 자신의 외로움을 말할 사람은 한 명도 없을 수 있다.
이것이 현대슬롯의 역설이다.
연결은 많아졌는데 관계는 약해졌다.
정보는 넘쳐나는데 대화는 줄어들었다.
사람은 많아졌는데 인간은 외로워졌다.
그리고 그 외로움의 틈으로 반려동물이 들어온다.
반려동물은 우리에게 말하지 않는다.
정치적 입장을 묻지도 않는다.
경제적 능력을 평가하지도 않는다.
과거의 실수를 들추지도 않는다.
그저 곁에 있다.
어쩌면 현대인이 반려동물에게 깊은 위로를 받는 이유는 바로 이것인지 모른다.
반려동물은 우리에게 ‘관계의 최소 조건’을 되돌려준다.
곁에 있음.
바라봄.
기다림.
그리고 떠나지 않음.
그런데 인간에게는 이것조차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우리는 관계에도 효율성을 요구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인가.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인가.
내 기분을 좋게 해주는 사람인가.
내 가치관과 맞는 사람인가.
나와 정치적 견해가 같은가.
나와 경제적 수준이 비슷한가.
조금이라도 불편하면 관계를 끊는다.
차단하고, 삭제하고, 언팔로우한다.
현대슬롯는 관계를 선택하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었지만 동시에 관계를 쉽게 버리는 능력도 주었다.
그러나 인간은 불편한 타자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지 않고서는 인간다워질 수 없다.
나와 다른 사람.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
때로는 나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비로소 타인을 이해하고, 양보하고, 용서하고, 바카라임지는 법을 배운다.
반려동물과의 관계는 편안하다.
하지만 인간관계는 불편하다.
그리고 바로 그 불편함 속에 인간다움이 있다.
그래서 반려동물이 인간보다 사랑하기 쉽다는 사실을 인간관계의 포기로 연결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반대로 가야 한다.
반려동물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을 인간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무조건적인 존재의 인정.
상대를 함부로 규정하지 않는 태도.
행동과 존재를 구분하는 지혜.
그리고 곁에 머무르는 인내.
아이에게도 그것을 적용해야 한다.
아이의 성적이 아이의 가치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배우자에게도 적용해야 한다.
배우자의 실수가 배우자의 존재 전체를 부정하는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부모에게도 적용해야 한다.
늙고 약해졌다고 해서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해야 한다.
오늘 실패했다고 해서 인생 전체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오늘 외롭다고 해서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다.
오늘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했다고 해서 존재의 가치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칸트가 말한 인간의 존엄은 바로 여기에서 살아난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해내기 때문에 존엄한 것이 아니다.
존엄하기 때문에 함부로 수단으로 취급해서는 안 되는 존재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 역시 여기에서 살아난다.
타인은 내가 마음대로 규정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나에게 바카라임을 요구하는 존재다.
그리고 아렌트가 말한 인간다움도 여기에서 회복된다.
인간은 혼자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라 다른 인간들과 함께 세계를 만들어 가는 존재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반려동물을 덜 사랑해야 하는가.
그럴 필요는 없다.
오히려 더 사랑해도 된다.
다만 그 사랑을 인간에게까지 확장해야 한다.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느끼는 따뜻함을 가족에게도 조금 나누어 주어야 한다.
고양이를 바라보며 “네가 있어서 좋다”라고 말하는 마음을 가까운 사람에게도 표현해야 한다.
반려동물이 실수했을 때 “괜찮아”라고 말한다면 인간에게도 그 말을 조금 더 자주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을 볼 때 한 번쯤 멈추어야 한다.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했을까.
저 사람에게는 내가 모르는 어떤 사정이 있을까.
저 사람도 나처럼 두려워하고 외로워하고 상처받는 존재가 아닐까.
그 질문 하나가 인간관계를 바꿀 수 있다.
사랑은 상대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곁에 머무르는 것이다.
우리가 반려동물에게 느끼는 사랑에는 그런 힘이 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함께 있을 수 있고,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해도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이것이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능력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남편은 아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아내도 남편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부모는 자식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고, 자식도 부모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친구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면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상대를 분석하고 판단하고 규정한다.
그러나 사랑은 이해의 완성이 아니라 이해의 한계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될 수도 있다.
나는 당신을 완전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겠다.
나는 당신의 모든 행동을 좋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겠다.
나는 당신의 모든 선택에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당신을 하나의 인간으로 존중하겠다.
이것이야말로 칸트와 레비나스와 아렌트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준 인간다움의 핵심일 것이다.
오늘 우리는 너무 많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지만 정작 한 사람을 제대로 사랑하는 데는 서툴다.
수천 명의 친구를 가질 수 있지만 한 사람의 슬픔을 견디지 못한다.
수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지만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이야기는 듣지 않는다.
그래서 반려동물이 필요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반려동물은 우리에게 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를 다시 가르쳐준다.
곁에 있는 것.
기다리는 것.
바라보는 것.
판단하지 않는 것.
그리고 존재하는 것만으로 서로에게 의미가 되어주는 것.
그러나 그 교훈을 반려동물과의 관계 안에만 가두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인간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동물사랑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마음을 통해 인간을 다시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지금 가장 절실하게 회복해야 할 인간다움인지도 모른다.
사람은 반려동물보다 훨씬 어렵다.
사람은 우리를 실망시키고, 배신하고, 화나게 하고, 때로는 상처를 준다.
그래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더 어렵다.
하지만 바로 그 어려움 때문에 인간을 사랑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완벽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기 때문에 이해하려는 것.
나와 같아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와 다르기 때문에 존중하는 것.
편하기 때문에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불편함을 견디면서도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일이다.
반려동물은 우리에게 사랑을 가르쳐준다.
그러나 그 사랑의 최종 목적지는 반려동물이 아니다.
다시 인간이어야 한다.
우리가 반려동물에게서 발견한 무조건적인 사랑과 인내와 기다림을 다시 인간의 세계로 가져오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가장 아름다운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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