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 die Musik, 슈베르트는 무엇을 노래하나

죽음을 앞둔 한 인간이 음악에서 발견한 구원

byFrancis Lee

프란츠 슈베르트가 죽은 것은 1828년 11월 19일이었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서른한 살.

오늘날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이제 막 자신의 인생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나이다. 그러나 슈베르트에게 서른한 해는 너무나 긴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는 생전에 작곡가로서 충분한 명성을 얻지 못했고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지 못했다. 사랑과 인간관계에서도 깊은 외로움을 경험했다. 무엇보다 젊은 시절부터 그를 괴롭힌 병은 결국 그의 생명을 앗아갔다.

그가 죽기 얼마 전 남긴 삶의 흔적들을 생각하면 더욱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러나 슈베르트의 마지막을 단순히 불행한 천재의 죽음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 죽음이 그의 삶을 끝냈지만, 죽음이 그의 음악을 끝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의 음악은 그가 죽은 뒤에 더 오래 살아남았다.

그리고 그 수많은 작품 가운데 하나가 아주 짧은 노래 An die Musik이다.

“음악에게.”

이 제목은 이상할 정도로 소박하다.

거대한 교향곡도 아니고, 장엄한 오페라도 아니다. 그저 음악에게 말을 건네는 작은 노래다.

그러나 이 작은 노래를 슈베르트의 삶의 마지막까지 끌고 가서 읽으면, 우리는 이 작품이 단순한 음악 찬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한 인간이 절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 음악을 붙잡는 행위다.

어쩌면 살아 있기 위해 음악을 부르는 행위다.

슈베르트는 1817년 프란츠 폰 쇼버의 시에 곡을 붙여 An die Musik을 작곡했다. 당시 슈베르트는 아직 20세였다. 훗날 자신의 삶을 집어삼킬 병의 그림자가 이미 드리워져 있었지만, 그의 인생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음악을 향해 이렇게 노래한다.

Du holde Kunst, in wieviel grauen Stunden
Hast du mein Herz zu warmer Lieb entzückt!

“오 아름다운 예술이여, 얼마나 많은 잿빛 시간 속에서
그대는 나의 마음을 따뜻한 사랑으로 황홀하게 했던가!”

여기서 우리의 시선은 “아름다운 예술”보다 “잿빛 시간”에 머물러야 한다.

슈베르트는 행복한 시간에 음악을 찬양하지 않는다.

잿빛 시간에 음악을 만났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정말 필요한 음악은 언제인가.

모든 것이 잘될 때인가.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음악을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순간은 오히려 삶이 무너질 때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병원에서 자신의 병명을 들었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삶이 나아지지 않을 때, 아무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설명할 수 없을 때, 밤이 너무 길게 느껴질 때 인간은 음악을 찾는다.

왜일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음악은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슈베르트는 그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Hast mich in eine bessre Welt entrückt!

“그대는 나를 더 나은 세계로 데려갔도다.”

이 한 문장이 An die Musik의 중심이다.

음악은 슈베르트를 어디로 데려갔는가.

“더 나은 세계.”

그 세계는 현실의 지리적 공간이 아니다. 어디엔가 존재하는 낙원도 아니다.

음악을 듣는 순간 인간의 내면에서 열리는 또 하나의 세계다.

현실은 그대로인데 현실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진다.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는데 고통을 견디는 힘이 생긴다.

외로움은 그대로인데 더 이상 완전히 혼자인 것 같지는 않다.

이것이 음악이 가진 이상한 힘이다.

음악은 현실을 바꾸지 않으면서 인간을 바꾼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음악과 구원의 문제가 시작된다.

종교에서 구원이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죽음과 절망의 권세에서 건져내는 것이다. 인간이 자신의 힘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다.

그렇다면 음악에도 구원이 있는가.

물론 음악이 종교적 의미에서 인간을 구원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음악은 죽음을 없애지 않는다. 병을 치료하지도 않는다. 가난을 해결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음악은 인간에게 일종의 작은 구원을 경험하게 한다.

왜냐하면 구원이 반드시 현실의 제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 구원은 현실을 견딜 수 있는 새로운 의미를 얻는 것이다.

죽음은 여전히 죽음이지만 죽음을 바라보는 인간의 마음이 달라지는 것.

고통은 여전히 고통이지만 그 고통 때문에 자신의 삶 전체를 부정하지 않게 되는 것.

상실은 되돌릴 수 없지만 상실한 사람을 사랑했던 기억까지 버리지 않는 것.

그런 의미에서 음악은 인간에게 아주 독특한 형태의 구원을 제공한다.

슈베르트는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두 번째 연에서 그는 음악을 더욱 놀라운 방식으로 묘사한다.

Oft hat ein Seufzer, deinem Harfenspiel entflossen,

“때로는 그대의 하프 연주에서 한숨 하나가 흘러나와”

한숨이다.

음악은 웃음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한숨에서도 나온다.

그리고 슈베르트는 이어서 말한다.

Ein süßer, heiliger Akkord von dir
Den Himmel bessrer Zeiten mir erschlossen!

“그대의 달콤하고 성스러운 화음 하나가
내게 더 나은 시절의 하늘을 열어주었다.”

여기서 “성스러운”이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음악은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성스럽다.

그리고 그 음악은 “더 나은 시절의 하늘”을 열어준다.

이것은 거의 종교적 언어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종교적 교리를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음악이라는 경험을 통해 인간이 초월을 경험하는 순간을 말한다.

한숨 하나가 화음이 되고, 화음 하나가 하늘을 연다.

이것은 예술이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일 가운데 하나다.

고통을 없애지 않고도 고통을 다른 것으로 변화시키는 것.

슈베르트의 음악에는 바로 이 능력이 있다.

그는 자신의 고통을 숨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고통에 굴복하지도 않았다.

그는 고통을 음악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우리는 슈베르트의 삶을 다시 바라보게 된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을 해석하는 방식은 바꿀 수 있었다.

병은 그의 몸을 공격할 수 있었지만 그의 음악까지 빼앗아갈 수는 없었다.

가난은 그를 괴롭힐 수 있었지만 그의 내면에서 만들어지는 선율까지 빼앗을 수는 없었다.

죽음은 결국 그를 데려갔지만 그가 남긴 음악까지 데려갈 수는 없었다.

어쩌면 이것이 슈베르트가 음악을 통해 했던 가장 위대한 저항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 현실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이 현실이 나의 세계의 전부라고 인정하지 않겠다.”

이것이 An die Musik이 우리에게 들려주는 숨은 목소리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슈베르트가 죽은 뒤 이 노래가 우리에게 계속 남아 있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역설을 만든다.

슈베르트는 죽었다.

그러나 그가 음악을 통해 만들어낸 “더 나은 세계”는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도 누군가가 이 노래를 듣는 순간 다시 열린다.

1817년에 슈베르트가 경험했던 그 세계가 200년이 지난 지금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이것이 예술의 시간이다.

인간은 죽지만 작품은 남는다.

그러나 단순히 작품이 남는 것이 아니다.

작품을 듣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에게 음악은 무엇인가.

우리는 슈베르트보다 훨씬 풍요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수천만 곡을 들을 수 있다. 음악은 언제 어디서나 흘러나온다. 출근할 때도 음악을 듣고, 운동할 때도 음악을 듣고, 자동차를 운전할 때도 음악을 듣는다.

음악이 너무 흔해졌다.

그래서 오히려 음악이 무엇인지 잊어버렸다.

음악은 이제 소비되는 콘텐츠가 되었다.

좋아요와 조회수를 얻어야 하고, 짧은 시간 안에 사람의 귀를 붙잡아야 하며, 알고리즘에 의해 추천되어야 한다.

음악조차 소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슈베르트의 An die Musik은 우리에게 묻는다.

음악은 정말 그런 것인가.

음악은 단순히 귀를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인가.

음악은 시간을 보내기 위한 배경음인가.

아니면 인간이 자신의 영혼을 잃지 않기 위해 만들어낸 것인가.

나는 후자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음악은 생존에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요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먹지 않고 살 수 없지만 음악 없이도 생물학적으로는 살아갈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왜 수천 년 동안 음악을 만들어왔을까.

왜 원시시대의 인간은 동굴에서 소리를 냈고, 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노래를 불렀으며, 왜 전쟁터에서도 군가는 사라지지 않았고, 왜 장례식에는 음악이 함께했을까.

음악은 인간이 현실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인간은 의미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의미는 언제나 말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한 소절의 음악이 수백 권의 바카라보다 더 정확하게 인간의 마음을 말해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이 슈베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 음악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나만 이런 것이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수백 년 전 한 인간도 이런 슬픔을 경험했고, 그것을 음악으로 남겼다.

그 음악이 지금 나에게 도착했다.

그러므로 음악은 인간과 인간을 연결한다.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하고,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말할 수 없는 마음과 그것을 듣는 마음을 연결한다.

이것이야말로 음악의 가장 깊은 구원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슈베르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먼저 알고 있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삶을 구하지 못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음악으로 바꾸었다.

그는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그러나 죽음보다 오래 남는 것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잿빛 시간을 없애지 못했다.

그러나 그 잿빛 시간 속에서 음악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An die Musik은 단순한 음악 찬가가 아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절망에게 보내는 조용한 답변이다.

“나는 너를 없앨 수 없다.

그러나 너에게 나의 전부를 내어주지는 않겠다.”

그리고 그 답변의 이름이 음악이었다.

슈베르트는 죽었다.

하지만 그가 음악에게 건넨 감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늘 누군가가 An die Musik을 듣는다.

그리고 잠시 자신의 잿빛 시간에서 벗어난다.

자신도 설명할 수 없었던 슬픔을 음악이 대신 말해주는 것을 듣는다.

그리고 아주 잠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보다 조금 더 나은 세계를 경험한다.

바로 그 순간 슈베르트는 다시 살아난다.

그의 나이는 더 이상 서른한 살이 아니다.

그의 시간은 1828년에 멈추지 않는다.

그가 만들어놓은 음악 속에서 그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

그래서 An die Musik의 마지막 말을 우리는 슈베르트의 말로만 들을 필요가 없다.

Du holde Kunst, ich danke dir!

“오 아름다운 예술이여, 나는 그대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다시,

Du hast mich in eine bessre Welt entrückt!

“그대는 나를 더 나은 세계로 데려갔도다.”

아마 이것이 슈베르트가 음악에게 남긴 가장 깊은 고백일 것이다.

음악은 나를 죽음에서 구해주지는 못했다.

그러나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내가 인간으로 남아 있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우리에게도 음악이 필요한 이유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는다.

우리의 삶에도 피할 수 없는 잿빛 시간이 찾아온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병에 걸리고, 외로움에 빠지고, 실패를 경험하며, 어느 순간 우리가 믿었던 세계가 더 이상 우리를 지켜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바로 그때 음악이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갈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음악은 충분히 위대하다.

음악은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지 않는다.

대신 지금 이 순간을 다시 살아갈 힘을 준다.

그래서 슈베르트의 An die Musik은 200년 전의 노래가 아니다.

오늘 우리의 노래다.

그리고 어쩌면 음악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모든 인간의 노래다.

“내 삶은 여전히 잿빛 시절에 머물러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잿빛 시절만이 나의 세계의 전부라고 믿지 않겠다.

나에게는 음악이 있다.

그리고 음악은 나를 조금 더 나은 세계로 데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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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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