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창조 사업에 동반자가 필요했다
신은 왜 인간을 창조했을까.
기독교 신학에서 이 질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많지 않다. 신이 천지를 창조했다는 것은 믿음의 출발점이지만, 정작 그다음 질문은 쉽게 묻지 않는다.
왜 신은 인간을 만들었을까.
전능한 신이라면 인간이 없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신은 부족한 것이 없는 존재이고,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는 존재가 아니라고 배워왔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창조된 것일까.
그런데 이 질문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밀어붙이면 전혀 다른 신학의 문이 열린다.
신에게 인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신은 인간과 함께 자신의 창조를 계속하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더 급진적으로 묻는다면 이렇다.
신의 창조는 정말 끝났는가.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인간은 창조의 마지막 장식품처럼 등장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땅을 경작하고 지키는 일이 맡겨지고, 다른 피조물의 이름을 부르는 일도 주어진다. 인간은 세계 안에 놓인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세계를 이해하고 변화시키며 돌볼 바카라임을 부여받은 존재로 등장한다.
그렇다면 창조는 인간의 창조와 함께 끝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계속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신이 창조하고 인간이 그 창조에 참여한다.
신이 세계를 열어놓고 인간에게 그 세계를 맡긴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신의 창조물인 동시에 신의 창조 사업에 참여하는 존재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이 왜 신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는가라는 질문도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
신의 형상은 인간의 얼굴이 신과 비슷하게 생겼다는 뜻이 아니다. 인간이 신과 관계할 수 있고,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며, 사랑할 수 있고, 창조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
인간은 신의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세계를 단순히 소비하지 않고 세계에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다.
언어를 만들고,
음악을 만들고,
도시를 만들고,
과학을 만들고,
법과 제도를 만들고,
다른 사람을 돌보고,
새로운 생명을 키운다.
이것은 신의 창조를 모방하는 인간의 창조다.
물론 인간이 신과 동등한 창조자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신이 인간에게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어느 정도 위임했다는 뜻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존재 이유는 단순히 신을 예배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창조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 신학의 아주 오래된 긴장에 도달한다.
신은 인간을 필요로 하는가.
고전적 유신론의 대답은 명확하다.
아니다.
신은 완전하고 자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대답이 창조의 이유를 모두 설명해 주는 것은 아니다.
필요하지 않다면 왜 창조했는가.
여기에서 ‘필요’라는 단어의 의미를 바꾸어볼 필요가 있다.
필요하다는 것을 결핍을 채운다는 의미가 아니라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로 이해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신은 인간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신은 인간과 관계하기를 선택했다.
신은 인간에게 자신의 형상을 주었다.
신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다.
신은 인간에게 세계를 맡겼다.
그리고 인간에게 자신의 창조를 계속할 바카라임을 맡겼다.
이것은 단순한 명령이 아니다.
신뢰다.
신이 인간에게 자유를 주었다는 것은 인간의 선택을 실제로 중요하게 만들었다는 뜻이다.
인간의 선택에 따라 세계의 미래가 달라진다.
사랑을 선택하면 세계가 달라진다.
폭력을 선택하면 세계가 달라진다.
자연을 돌보면 세계가 달라진다.
자연을 파괴하면 세계가 달라진다.
정의를 선택하면 세계가 달라진다.
탐욕을 선택하면 세계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창조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진행형의 창조 안에 들어가 있다.
이 지점에서 위르겐 몰트만의 창조론은 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몰트만에게 창조는 단순히 과거의 ‘최초 창조’에 머무르지 않는다. 창조는 종말의 ‘새 창조’를 향해 열려 있는 사건이다. 태초의 창조는 완성된 종착점이 아니라 미래의 새 창조를 향해 나아가는 출발점이다. 예수의 부활은 바로 그 새 창조의 시작과 약속을 보여주는 사건으로 해석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관점의 전환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창조는 이렇다.
신이 세상을 만들었다.
완성했다.
그리고 인간은 그 완성된 세계에서 살아간다.
그러나 몰트만의 종말론적 창조 이해에서는 다르다.
신은 창조를 시작했고, 창조는 미래의 완성을 향해 나아간다.
창조의 목적은 과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있다.
신의 창조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리고 인간은 바로 그 미래를 향해 가는 창조의 과정에 참여한다.
이것이 인간을 신의 동반자로 이해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가 된다.
몰트만의 삼위일체론은 이 생각을 더욱 깊게 만든다. 몰트만은 신을 고립된 단일한 절대자로 보기보다 성부·성자·성령의 관계와 상호침투를 중심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신 자체를 관계적 존재로 사유한다.
그렇다면 신이 세계와 관계한다는 것은 신의 본질과 완전히 무관한 일이 아니다.
관계는 신의 존재 방식 자체와 연결된다.
신은 사랑이다.
그런데 사랑은 본질적으로 관계를 필요로 한다.
삼위일체 안에서 이미 사랑과 관계가 있다면, 창조는 그 사랑의 결핍을 채우는 사건이 아니라 그 사랑이 피조세계로 확장되는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창조는 신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행동이 아니다.
오히려 충만한 사랑이 자신을 넘어 피조세계로 흘러나가는 사건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흐름 속에 인간이 들어온다.
인간은 신과 관계하고, 다른 인간과 관계하고, 자연과 관계하면서 창조의 관계망 안에서 살아간다.
그렇다면 신의 형상은 ‘고립된 인간의 위대함’이 아니라 ‘관계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은 혼자 완성되는 존재가 아니다.
신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되고,
다른 인간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되고,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이 된다.
그리고 이 관계망 전체가 창조의 일부다.
여기에서 과정신학은 더욱 급진적인 질문을 던진다.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에서 출발한 과정철학과 그것을 신학적으로 발전시킨 과정신학은 세계를 고정된 실체들의 집합으로 보기보다 사건과 관계와 과정의 연속으로 본다. 과정신학에서는 신과 세계의 관계 역시 일방적인 명령과 복종의 관계가 아니라 상호작용의 관계로 이해된다.
여기서 우리가 던졌던 질문이 다시 나타난다.
신은 인간을 필요로 하는가.
과정신학의 관점에서는 이 질문에 훨씬 더 급진적인 답을 생각할 수 있다.
신은 세계와 무관하게 혼자 완성된 절대자가 아니라 세계와 관계하면서 자신의 현실성을 풍부하게 하는 신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인간의 경험이 신에게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사랑도 신에게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고통도 신에게 의미를 갖는다.
인간의 선택도 신에게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의 창조 과정에서 단순한 관객이 아니다.
인간의 삶 자체가 신의 세계 안에서 실제적인 사건이 된다.
물론 여기서 전통적 기독교 신학과 과정신학 사이의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한다.
과정신학은 고전적 유신론의 전능성·불변성·초월성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전통적 신학이 신을 세계의 변화에 의해 변화되지 않는 존재로 이해해 왔다면, 과정신학은 신과 세계 사이의 상호성을 훨씬 강하게 주장한다.
따라서 ‘신에게 인간이 필요하다’는 명제를 전통적 신학의 언어로 말하는 것과 과정신학의 언어로 말하는 것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전통적 신학에서는 신에게 인간은 존재론적 결핍을 채워주는 존재가 아니다.
과정신학에서는 세계와 신의 관계 자체가 신의 현실성을 이해하는 데 훨씬 더 중요해진다.
그러나 이 두 입장이 만나는 지점이 있다.
바로 관계다.
신과 인간 사이에는 관계가 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일방적이지 않다.
인간은 신을 변화시키는 존재인가.
적어도 인간의 역사와 인간의 응답이 신과 세계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갖는다고 말할 수는 있다.
이것이 창조를 살아 있는 사건으로 만든다.
그래서 창조는 완성품이 아니다.
창조는 관계의 과정이다.
창조는 미래를 향해 열려 있다.
창조는 아직 오지 않은 세계를 향해 움직인다.
그리고 인간은 그 미래를 만들어가는 존재다.
이렇게 보면 성육신은 창조론의 정점으로도 읽을 수 있다.
신은 인간에게 자신의 일을 맡겼을 뿐 아니라 인간의 세계 안으로 직접 들어왔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신은 인간의 시간 속으로 들어왔다.
인간의 고통 속으로 들어왔다.
인간의 역사 속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과했다.
그렇다면 성육신은 단순히 인간의 죄를 해결하기 위한 법적 조치만이 아니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가장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신은 인간을 멀리서 구원하지 않았다.
인간의 세계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인간에게 자신의 일을 맡겼다.
이것이 막달라 마리아의 이야기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다.
부활한 예수를 처음 만난 사람 가운데 막달라 마리아가 있다.
그리고 마리아는 단순히 부활을 목격한 사람이 아니라 그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 된다.
예수의 사건은 예수 혼자 끝내는 사건이 아니다.
인간의 증언을 통해 계속된다.
마리아의 입을 통해 부활의 소식이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신이 시작한 일이 인간을 통해 계속된다.
바로 이 점에서 앤 머리의 「You Needed Me」가 묘하게 겹쳐진다.
이 노래의 실제 작곡 의도는 종교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노래의 언어를 신학적으로 전유해서 읽어보면 하나의 놀라운 질문이 생긴다.
‘당신은 나를 필요로 했는가.’
인간이 신에게 묻는 것이다.
‘당신은 왜 나를 만들었습니까.’
‘나를 통해 무엇을 하려고 했습니까.’
그리고 창조의 관점에서 하나의 답이 가능하다.
‘나는 너에게 내가 만든 세계를 맡겼다.’
‘나는 네가 사랑하도록 했다.’
‘나는 네가 돌보도록 했다.’
‘나는 네가 만들도록 했다.’
‘나는 네가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전하도록 했다.’
‘나는 네가 내가 시작한 창조의 길을 이어가도록 했다.’
그렇다면 인간은 신의 종이라는 말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가 된다.
인간은 신의 동반자다.
신의 창조를 함께 완성해 가는 존재다.
물론 이 표현은 인간을 신과 동등한 존재로 만든다는 뜻이 아니다.
동반자는 창조주가 아니다.
그러나 동반자는 창조주의 목적에 참여한다.
그리고 참여한다는 것은 바카라임진다는 뜻이다.
이것이 오늘날 인간에게 특별히 중요한 이유가 있다.
인간은 이제 지구를 바꿀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원자폭탄을 만들 수 있고,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고,
유전자를 편집할 수 있고,
기후를 변화시킬 정도로 자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인간은 과거 어느 시대보다 강력한 창조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창조적 능력은 파괴적 능력과 정확히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
무엇인가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인가를 파괴할 수 있는 능력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간이 신의 창조에 참여한다는 말은 인간에게 무제한의 지배권이 주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더 큰 능력을 가질수록 더 큰 바카라임을 져야 한다.
신의 창조에 참여하는 인간이라면 창조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생명을 살려야 한다.
자연을 돌봐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
미래 세대가 살아갈 세계를 보존해야 한다.
이것이 창조의 동반자가 가져야 할 윤리다.
그래서 인간의 존엄성은 단순히 인간이 특별한 동물이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신의 창조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데서 그 존엄성의 근거를 찾을 수도 있다.
인간을 죽이는 것은 단순히 하나의 생물학적 개체를 제거하는 것이 아니다.
신의 창조에 참여하도록 부름 받은 존재의 가능성을 파괴하는 것이다.
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것은 신의 창조적 가능성을 짓밟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인간에 대한 사랑과 창조에 대한 바카라임과 신에 대한 신앙은 서로 다른 문제가 아니다.
하나로 연결된다.
그리고 결국 다시 처음 질문으로 돌아온다.
신은 왜 인간을 창조했는가.
하나님에게 무엇인가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필요는 없다.
신이 외로웠기 때문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다.
신이 자신을 숭배할 존재가 필요했기 때문이라고만 말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신은 인간과 관계하기를 원했다.
신은 인간에게 자신의 창조를 맡기기를 원했다.
신은 인간을 자신의 창조가 계속되는 역사에 참여시키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창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창조는 미래의 새 창조를 향해 열려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삶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세계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창조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신의 이야기도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오늘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내일의 세계를 만든다.
그렇다면 인간에게 던져진 가장 중요한 질문은 ‘나는 왜 존재하는가’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이것이다.
‘신이 아직 완성하지 않은 이 세계에서 나는 무엇을 완성해야 하는가.’
이 질문 앞에서 인간은 더 이상 무기력한 피조물이 아니다.
인간은 신의 창조에 참여하는 존재다.
그리고 그 순간 「You Needed Me」의 제목은 단순한 사랑 노래의 제목을 넘어선다.
‘당신은 나를 필요로 했다.’
그것은 인간이 신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대담한 질문이다.
그리고 신은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나는 네게 이 세계를 맡겼다.’
‘내가 시작한 창조를 네가 이어가도록 했다.’
‘네가 사랑하고, 돌보고, 만들고, 용서하고, 살리는 일을 통해 나의 창조가 계속되도록 했다.’
어쩌면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말의 가장 깊은 의미는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은 신을 대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다.
신과 함께 창조의 길을 걷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다.
신은 창조를 시작했다.
그리고 인간에게 그 창조의 다음 장을 맡겼다.
그러므로 창조는 끝난 사건이 아니라 아직 쓰여지고 있는 이야기다.
그리고 인간은 그 이야기의 독자만이 아니다.
인간은 그 이야기를 함께 써 내려가는 존재다.
어쩌면 그것이 신이 인간을 창조한 가장 놀라운 이유일 것이다.
신에게 인간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신은 인간과 함께 창조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차이가 인간의 존재를 피조물에서 동반자로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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