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왜 살아서나 죽어서나 이용만 당했을까?

예수가 지지리도 인복이 없는 인물이라는 것은 사실인 것만 같다.

byFrancis Lee

예수만큼 인복이 없는 사람이 인류 역사에 또 있었을까.

살아 있을 때도 그랬고 죽은 뒤에도 그랬다. 살아 있을 때 예수 주변에는 병을 고쳐달라는 사람, 먹을 것을 달라는 사람, 기적을 보여달라는 사람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정작 예수가 가장 외롭고 절망적인 순간에 이르렀을 때 그 곁에 끝까지 남아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자신이 그렇게 애써 가르쳤던 제자들은 예수가 체포되자 뿔뿔이 흩어졌다. 가장 가까웠던 베드로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이나 부인했다. 예수가 처형될 때 제자들은 예수의 고통을 함께 감당하지 못했다.

참으로 기막힌 인간관계다.

그런데 더 기막힌 일은 예수가 죽은 다음부터 시작된다.

예수가 죽고 난 뒤 예수와 직접 만나지도 않았던 바울이 등장한다. 바울이 예수 운동의 세계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기독교는 예수가 갈릴리에서 가르쳤던 말씀만으로 이루어진 종교가 아니다. 예수의 말씀 위에 사도들의 해석이 얹히고, 교부들의 신학이 더해지고, 중세 교회의 권력이 들어가고, 근대의 교파가 만들어지고, 현대에는 거대한 종교 산업과 정치적 이해관계까지 뒤섞였다.

그 과정에서 정작 예수 자신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이것이 기독교의 가장 거대한 역설이다.

예수의 이름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이름이 되었지만, 정작 예수가 말했던 것은 점점 잊혀졌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을 보라고 했다.

교회는 때때로 거대한 건물을 세웠다.

예수는 낮아지라고 했다.

교회 지도자들은 때때로 권력의 중심에 서려고 했다.

예수는 섬기는 사람이 큰 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떤 목회자는 자신이 섬김을 받는 위치에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예수는 부와 재물에 대해 끊임없이 경고했다.

그런데 일부 교회는 헌금과 부동산과 재산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조직이 되었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악마라고 부르고, 다른 교파와 다른 종교를 저주하고, 정치적 반대자를 적으로 규정하는 일이 벌어진다.

예수는 가장 작은 자를 보라고 했다.

그런데 교회는 때때로 가장 작은 자보다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인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예수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는가.

물론 이것을 기독교 전체의 모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예수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려 했던 수많은 사람도 있었다. 이름도 남기지 않은 채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병든 사람을 돕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며 살아간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기독교의 중심에 있었느냐는 것이다.

오히려 역사에서 가장 크게 목소리를 낸 사람들은 예수를 닮은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의 이름을 이용해 권력과 영향력을 얻은 사람들이었던 경우가 많았다.

이것이 내가 오늘날 기독교를 바라보면서 가장 불편하게 생각하는 지점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말은 너무 쉽게 하지만 예수처럼 살겠다는 말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

예수를 구원자로 고백하는 일은 강조하면서 예수가 요구했던 삶의 방식은 외면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목에 걸고 다니면서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걸었던 삶은 거부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예배하면서 예수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외면한다.

예수의 이름으로 교리를 논하면서 예수가 강조했던 자비와 용서는 잊어버린다.

더 심각한 것은 정치와 결탁한 기독교다.

예수는 로마의 권력자가 아니었다. 세상의 권력을 차지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은 정치권력과 지나치게 가까워지면서 자신들이 마치 기독교를 대표하는 정치적 세력인 것처럼 행동한다.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시민으로서 누구나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의 정치적 판단을 예수의 뜻과 동일시하는 순간 발생한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인은 정의이고, 내가 반대하는 정치인은 악이라는 식으로 사고하기 시작하면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정치적 팬덤이 된다.

예수는 사라지고 진영만 남는다.

십자가는 사라지고 깃발이 남는다.

복음은 사라지고 구호가 남는다.

사랑은 사라지고 증오가 남는다.

그리고 가장 우스꽝스러운 일이 벌어진다.

예수의 이름을 가장 크게 외치는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를 이용하는 가장 교묘한 방식이다.

예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를 끊임없이 이용한다.

예수를 팔아 돈을 벌고, 예수를 팔아 권력을 얻고, 예수를 팔아 명성을 얻고, 예수를 팔아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한다.

예수의 이름을 없애는 것보다 예수의 이름을 내세우면서 예수와 정반대의 삶을 사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너무나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죽은 뒤에도 끊임없이 이용당한다.

예수는 자신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종교 조직을 승인한 적도 없고, 거대한 성전을 지으라고 명령한 적도 없으며, 특정 정치세력을 지지하라고 말한 적도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의 이름을 가져다가 자신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

교파를 만들고, 교리를 만들고, 제도를 만들고, 권력을 만들고, 재산을 만들고, 정치적 세력을 만들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모든 것을 예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이보다 더 교묘한 자기정당화가 어디에 있겠는가.

예수에게 가장 억울한 일이 있다면 아마 이것일 것이다.

자신이 가장 경계했던 인간의 욕망이 자신의 이름을 통해 가장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이다.

예수는 부자가 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있다.

예수는 권력을 잡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있다.

예수는 사람을 지배하라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의 양심을 지배하려는 사람이 있다.

예수는 사람을 사랑하라고 했다.

그런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람을 심판하는 사람이 있다.

도대체 누가 진짜 예수의 제자인가.

나는 오히려 교회 밖에서 이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이름을 얼마나 자주 부르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처럼 행동하고 있는가가 중요하다.

교회에 얼마나 오래 다녔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중요하다.

얼마나 많은 헌금을 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 무엇을 나누었는지가 중요하다.

얼마나 정통적인 교리를 고백하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중요하다.

그것이 예수가 남긴 가장 불편한 질문일 것이다.

어쩌면 예수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다시 쫓겨나야 할지도 모른다.

교회가 예수를 버려서가 아니다.

오히려 예수를 너무 많이 이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의 이름을 가지고 자신들의 욕망을 정당화하는 순간, 예수는 더 이상 예수가 아니다. 그는 하나의 상표가 된다. 설교의 상품이 되고, 정치의 구호가 되고, 종교산업의 브랜드가 된다.

살아 있을 때는 사람들이 예수에게 먹을 것과 병 고침을 요구했다.

죽은 뒤에는 사람들이 예수에게 돈과 권력과 명예를 요구했다.

그리고 2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예수는 계속 이용당하고 있다.

그러니 정말 예수가 지지리도 인복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이 농담만은 아닌 것 같다.

살아서는 자신을 이해해 주는 사람이 부족했고, 죽어서는 자신을 이용하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어쩌면 예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닐지도 모른다.

예수의 이름을 더 크게 외치는 사람도 아닐 것이다.

오히려 조용히 예수의 말을 읽고, 그것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는 단 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예수에게는 가장 귀한 제자일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기독교가 정말 예수의 후계자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먼저 증명해야 할 것이 있다.

예수를 얼마나 많이 말할 수 있느냐가 아니다.

예수를 얼마나 닮았느냐이다.

그것을 증명하지 못하면서 예수의 후계자라고 자처하는 것은 신앙이 아니라 위선이다.

예수의 이름을 이용해 예수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것.

어쩌면 이것이 지난 2천 년 동안 인류가 예수에게 저지른 가장 거대한 배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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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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