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과 노인이 동시에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린 슬롯

관계 단절을 극복하는 방법은 과연 없는가

byFrancis Lee

한국 슬롯의 자살과 고독사를 바라보면 이상한 역설 하나가 드러난다. 가장 젊은 세대와 가장 나이 든 세대가 전혀 다른 이유로 죽음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밑바닥에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문제가 놓여 있다. 바로 관계의 단절이다.

청년은 슬롯에 진입하지 못해서 고립되고, 노인은 슬롯에서 밀려나면서 고립된다. 청년은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미래를 잃어버리고, 노인은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의 관계와 역할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결국 두 세대 모두 어느 순간 같은 질문 앞에 서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더 무서운 질문이 뒤따른다.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에 더 이상 답할 수 없게 될 때 인간은 절망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19세기의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이 오늘날 한국 슬롯를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비추는 거울이 된다.

키르케고르에게 절망은 단순한 슬픔이나 우울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가 무너진 상태였다. 인간은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지만,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할 때 절망한다.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자아는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자신을 형성하는 존재다.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인간이 절망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하는 데 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슬롯에서 이 절망은 더 이상 개인의 내면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슬롯가 사람을 관계에서 밀어내는 과정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통계는 이 사실을 매우 냉정하게 보여준다.

2024년 한국의 고독사 사망자는 3,924명이었다. 2020년 3,279명에서 약 20% 증가했다. 고독사는 더 이상 일부 노인의 특수한 비극이 아니다. 한국 슬롯 전체가 관계의 단절이라는 새로운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욱 충격적인 것은 연령별 차이다.

고독사의 가장 많은 연령대는 80대가 아니다. 50대와 60대다. 과거 5년간 전체 고독사에서 50~60대가 차지하는 비중은 대체로 53~60%였다. 특히 2021년에는 50대 남성과 60대 남성이 전체 고독사의 52.1%를 차지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한국 슬롯는 인간에게 직업을 주고, 소득을 주고, 가족이라는 역할을 부여한다. 그런데 직업을 잃고, 가족관계가 무너지고, 슬롯적 역할까지 사라지는 순간 그 사람을 붙잡아줄 관계가 급격하게 줄어든다.

특히 중년 남성에게 이 문제는 심각하다. 온라인 게임에서의 역할이 인간관계의 상당 부분을 차지했던 사람이 퇴직이나 실직을 경험하면 슬롯적 관계 자체가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혼이나 배우자의 사망까지 겹치면 그동안 자신을 지탱해주던 관계망이 거의 사라질 수 있다.

그렇다면 청년은 어떤가.

청년은 반대 방향에서 슬롯적 관계를 잃는다.

아직 슬롯적 역할을 획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취업에 실패하고, 경제적 독립이 늦어지고, 주거가 불안정해지고, 친구와의 관계가 줄어들면서 자신이 슬롯에 들어갈 통로 자체를 잃어버린다.

보건복지부가 실시한 고립·은둔 청년 조사에서도 이러한 현실은 확인된다. 우울하거나 낙심했을 때 대화할 사람이 없다고 답한 비율은 2019년 21.8%에서 2023년 31.6%로 높아졌다. 2023년에는 일도 하지 않고 구직활동도 하지 않는 '쉬었음' 청년이 40만 명을 넘어섰고, 정부는 고립·은둔을 생각할 가능성이 있는 위기 청년 규모를 최대 약 54만 명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여기서 우리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발견한다.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일자리 숫자만이 아니다.

일자리는 소득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슬롯적 역할과 인간관계를 제공한다. 온라인 게임은 단순히 돈을 버는 장소가 아니라 "나는 슬롯의 구성원이다"라는 감각을 만들어주는 장소이기도 하다.

따라서 청년의 장기적인 슬롯적 배제는 단순한 실업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으로 발전할 수 있다.

처음에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취업에 실패했다."

그러나 관계가 끊어지고 실패가 반복되면 어느 순간 이것이 바뀐다.

"나는 실패한 사람이다."

그리고 마침내

"나는 아무에게도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

이것이 절망이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절망은 바로 이러한 자기 관계의 붕괴와 관련되어 있다. 인간은 단순히 살아 있는 생물학적 개체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자신과 세계와의 관계가 무너질 때 자기 자신을 유지하는 힘도 약해진다.

그래서 자살 통계를 보면 더욱 섬뜩한 사실이 드러난다.

한국에서 자살률 자체는 연령이 높을수록 높다. 80세 이상은 특히 높은 자살률을 보인다. 따라서 "청년의 자살률이 노인보다 높다"라고 말하는 것은 통계적으로 정확하지 않다.

그런데 다른 통계를 보면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자살은 10대부터 30대까지의 주요 사망원인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22년 우리나라 자살률은 인구 10만 명당 25.2명이었고, 자살은 10대·20대·30대에서 주요 사망원인이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다.

노년층에서는 자살률 자체가 높지만 여러 질병과 노쇠가 주요 사망원인을 함께 구성한다.

반면 청년층에서는 자살이 너무 중요한 사망원인이 되어버렸다.

즉 청년에게 죽음은 통계적으로 더 자주 발생하는 죽음은 아닐 수 있지만, 젊은 사람이 죽는 가장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자살이라는 점에서 훨씬 비극적인 슬롯적 의미를 갖는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청년 고독사에서 자살이 차지하는 비중이다.

2024년 고독사 사망자 가운데 자살자의 비율은 전체적으로 13.4%였다. 그런데 연령별로 보면 20대 이하에서는 57.4%, 30대에서는 43.3%였다. 연령이 낮을수록 자살로 인한 고독사의 비중이 급격하게 높아졌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청년 고독사는 노년 고독사의 단순한 젊은 버전이 아니다.

노년 고독사에는 질병과 노쇠, 돌봄의 부재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청년 고독사에서는 슬롯적 실패와 관계 단절, 정신적 절망과 자살이 훨씬 강하게 연결되어 있다.

노인의 경우에는 관계의 단절이 생존을 위협한다.

청년의 경우에는 관계의 단절이 존재의 의미를 위협한다.

이것이 두 세대의 차이이면서 동시에 공통점이다.

노인은 "나를 돌봐줄 사람이 없다"라고 느낄 수 있다.

청년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없다"라고 느낄 수 있다.

하나는 생존의 위기이고, 다른 하나는 존재의 위기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인간을 절망으로 몰아갈 수 있다.

그래서 고독사와 자살을 단순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한다.

"우울증이 있었던 모양이다."

"경제적으로 힘들었을 것이다."

"가족이 돌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사건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려버리는 방식으로 끝나기 쉽다.

물론 정신질환도 중요하고 경제적 문제도 중요하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왜 어떤 사람은 실패했을 때 다시 일어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실패와 함께 모든 관계를 잃어버리는가.

왜 어떤 노인은 은퇴 후에도 수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지만, 어떤 노인은 온라인 게임을 떠나는 순간 슬롯에서 완전히 사라지는가.

왜 어떤 청년은 취업에 실패해도 다시 도전하지만, 어떤 청년은 방 안에서 세상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버리는가.

차이는 개인의 의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을 붙잡아주는 관계망의 차이에 있다.

한국 슬롯는 오랫동안 가족에게 너무 많은 것을 맡겨왔다.

가족이 돌보고, 가족이 위로하고, 가족이 경제적 위기를 해결하고, 가족이 자녀의 실패를 받아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가족 자체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1인가구가 늘고, 결혼이 늦어지고, 출산율은 낮아지고, 지역공동체는 약해지고, 온라인 게임도 평생의 관계망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개인이 어려움에 빠지면 가족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 방식은 작동하지 않는다.

더욱 심각한 것은 디지털 시대가 인간관계를 늘린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인간의 고립을 해결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수백 명의 친구가 SNS에 있어도 밤늦게 전화할 사람 한 명이 없을 수 있다.

수천 명의 팔로워가 있어도 자신의 실패를 이야기할 사람은 없을 수 있다.

연결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연결되어 있지 않은 슬롯다.

바로 이것이 현대적 고립의 역설이다.

그리고 정부도 이제 문제의 성격이 단순한 고독사 예방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2026년 보건복지부는 고독사 예방의 범위를 슬롯적 고립 자체를 예방하는 방향으로 확대하고, 청년·중장년·노년 등 생애주기별로 슬롯적 고립 위험군을 찾아 지원하는 정바카라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고독사위기대응시스템도 2026년 2월부터 가동됐다. 체납, 자살위험, 알코올질환, 전기사용량 변화 등 27개 위기정보를 연계해 위험군을 조기에 발견하고 청년·중장년·노인에게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 핵심이다.

방향은 옳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충분할까.

나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람을 발견하는 시스템은 필요하다. 하지만 발견한 다음 무엇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고립된 청년에게 상담센터 전화번호 하나를 건네주는 것으로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외로운 노인에게 복지서비스를 연결하는 것만으로 인간적 관계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서비스만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래서 이제 복지의 개념을 바꾸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복지를 "얼마를 지원할 것인가"라는 관점에서 생각했다.

그러나 앞으로의 복지는 "누구와 연결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함께 던져야 한다.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취업수당이 아니라 다시 슬롯적 역할을 얻을 기회다.

노인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돌봄서비스가 아니라 자신이 여전히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경험이다.

중년에게 필요한 것은 실직했을 때 다시 경제활동을 할 기회만이 아니라 직업을 잃어도 인간관계까지 잃지 않을 수 있는 슬롯적 기반이다.

결국 복지는 돈을 나누어주는 기술에서 관계를 복원하는 기술로 발전해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키르케고르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는 인간을 단순한 개체로 보지 않았다. 인간의 자아 자체가 관계적인 구조를 가진다고 보았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 존재이며, 동시에 자신을 넘어서는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슬롯적 관계의 붕괴는 단순히 외로운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확인할 거울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다는 사실은 나의 삶이 의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누군가가 나의 죽음을 슬퍼할 것이라는 사실은 내가 누군가에게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그래서 인간에게 관계는 사치가 아니다.

생존의 조건이다.

한국 슬롯가 지금 해결해야 할 것은 단순히 자살률을 낮추는 것이 아니다.

고독사 숫자를 줄이는 것만도 아니다.

그보다 앞선 곳에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사람들이 왜 절망하는가.

그리고 왜 그 절망을 함께 견뎌줄 사람이 없는가.

이 질문을 던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죽음이 발생한 뒤에야 사람을 발견하는 슬롯에 머물게 될 것이다.

시신을 발견하는 데 성공하는 것은 예방이 아니다.

자살을 막는 것도 마지막 순간에 붙잡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진정한 예방은 그 사람이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느끼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청년에게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다.

중년에게는 실패해도 돌아갈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다.

노인에게는 늙어도 여전히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다.

그리고 슬롯 전체에는 실패한 사람을 버리지 않는 문화가 필요하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키르케고르에게서 다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교훈인지도 모른다.

인간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절망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것이 아니다.

관계가 하나씩 끊어지고, 역할이 하나씩 사라지고,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확신이 하나씩 무너지는 과정에서 절망은 자란다.

그러므로 자살과 고독사를 예방하려면 죽음의 순간을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그보다 훨씬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 사람이 친구를 잃는 순간.

온라인 게임을 잃는 순간.

가족과 대화하지 않게 되는 순간.

슬롯에 나가기를 포기하는 순간.

자신이 아무에게도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는 순간.

바로 그곳이 예방이 시작되어야 할 자리다.

한국 슬롯가 정말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사느냐가 아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청년과 노인은 서로 전혀 다른 세대처럼 보인다.

그러나 한쪽은 슬롯에 들어가지 못해서 절망하고, 다른 한쪽은 슬롯에서 밀려나서 절망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중년은 슬롯적 역할을 잃어버리면서 무너진다.

세대는 다르지만 병은 하나일 수 있다.

관계의 단절이다.

그리고 그 관계의 단절이 인간의 마음속에서 절망으로 변하는 순간, 키르케고르가 말한 "죽음에 이르는 병"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정말 극복해야 할 것은 고독사가 아니다.

자살 자체도 아니다.

그보다 더 앞에 있는 것이다.

사람이 절망하기 전에 그 사람의 곁에 누군가가 있는 슬롯를 만드는 것.

어쩌면 그것이 지금 한국 슬롯가 만들어야 할 가장 근본적인 복지국가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언제나 돈만은 아니다.

때로는 단 한 사람의 관계가 한 인간의 생을 붙잡는다.

그리고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은 혼자 살아남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의 삶을 붙잡아주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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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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