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쭙잖은 기득권 노름에 빠졌기 때문이다
한국 개신교의 역사는 이제 겨우 100여 년을 넘었다. 그런데 벌써 늙어가고 있다. 이만열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한국 개신교는 불교가 1000년 이상, 유교가 500년 이상 지속한 뒤 쇠퇴기에 나타냈던 모습을 너무 일찍 보이고 있다. 한때 슬롯를 향해 질문을 던지던 종교가 이제는 슬롯로부터 질문을 받는 처지가 됐다.
더 심각한 것은 교회가 쇠퇴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교회가 왜 쇠퇴하는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데 있다.
초기 한국 개신교가 지금과 같았던 것은 아니다. 이만열 교수의 지적처럼 초기 기독교인들은 단순히 교회 안에서 예배하고 전도하는 데 머물지 않았다. 유교적 신분제와 부정부패에 저항했고,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배에 맞섰다. 을사늑약에 항의했고, 3·1운동에 참여했으며,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 인권운동에 뛰어든 기독교인들도 적지 않았다.
당시 기독교인은 전체 인구에서 극소수였다. 그런데 3·1운동 당시 체포된 사람 가운데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비율은 전체 인구에서의 기독교인 비율보다 훨씬 높았다.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교세가 아니다.
그때 교회는 약자였지만 약자의 편에 서려고 했다.
이것이 중요하다.
교회가 세상을 바꾸겠다고 말했을 때 교회가 가진 것은 돈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거대한 조직도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의 편에 설 수 있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성공했다.
너무 성공했다.
교회가 성장했고, 대형교회가 등장했고, 거대한 재산이 축적됐고, 목회자는 슬롯적 영향력을 갖게 됐다. 정치인들이 교회를 찾아가고, 교회가 선거에 영향을 미치고, 일부 목회자들은 정치권력과 직접 연결되기 시작했다.
바로 그 순간부터 문제가 시작됐다.
교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조직에서 자신의 것을 지키는 조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가난한 사람을 걱정하던 교회가 교회의 재산을 걱정하기 시작했고, 슬롯적 약자의 권리를 주장하던 목소리가 어느 순간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지키는 목소리로 바뀌었다.
이것이 종교의 기득권화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가장 큰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다.
교회가 기득권이 되었다는 사실보다 더 우스운 것은 100년도 채 되지 않아 기득권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한국교회가 서구의 오래된 기독교 문명처럼 수백 년 동안 슬롯적 제도와 문화를 만들어온 것도 아니다. 그런데 벌써 거대한 교회 건물과 재산을 가지고 권력을 행사하며 슬롯의 주류인 것처럼 행동한다.
말 그대로 어쭙잖은 기득권 노름이다.
기득권이란 단순히 돈이 많다는 뜻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슬롯의 변화를 두려워하고, 약자의 요구를 불편해하며, 비판을 받으면 자신을 공격하는 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이 기득권의 본질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일부 모습이 정확히 그렇다.
특히 정치와 결합하는 순간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복음을 전해야 할 교회가 정치적 진영의 확성기가 되고, 인간의 존엄을 이야기해야 할 목회자가 특정 정치인을 구원자처럼 떠받들며, 사랑과 용서를 말해야 할 사람들이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적으로 규정한다.
이것이 과연 기독교인가.
교회가 정치에 참여할 수는 있다. 기독교인도 시민이므로 정치적 의견을 가질 자유가 있다. 그러나 교회가 특정 정치세력의 이해관계를 종교적 진리처럼 포장하기 시작하면 그 순간 교회는 복음보다 권력을 선택한 것이다.
더욱 역설적인 것은 한국교회가 과거의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면서도 오늘날에는 그 정신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만열 교수가 강조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1960~70년대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 1980년대 통일운동에 앞장선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 역사 전체가 오늘날 한국교회의 정체성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왜 그런가.
교회가 약자의 편에 서는 것보다 자신의 조직을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교회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교회는 기득권이 되는 순간부터 종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을 잃기 시작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떠올려보면 이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예수는 성전의 권력자 편에 서지 않았다. 슬롯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편에만 서지도 않았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죄인 취급받던 사람, 소외된 사람의 곁으로 갔다.
그런데 오늘날 일부 교회는 정반대의 길을 간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성공하라고 말하고, 노동자에게는 인내하라고 말하며, 이주노동자에게는 경계의 눈길을 보내면서, 자신들은 부동산과 재산과 정치적 영향력을 지키려고 한다.
그것은 복음의 역전이다.
교회가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맞게 길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만열 교수가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희년선교회를 만들어 한글을 가르치고 무료 의료봉사를 하는 것은 단순한 선행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일본의 식민지배를 통해 이민족에게 당했던 고통을 다른 민족에게 되돌려주어서는 안 된다.”
이 생각은 기독교가 민족주의를 넘어 보편주의로 나아가는 지점이다.
우리가 당한 차별을 기억하되 그 기억을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명분으로 사용하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 방법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가 과연 이런 정신을 얼마나 실천하고 있는가.
여기서 한국교회의 위기가 드러난다.
교회가 쇠퇴하는 이유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만이 아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보면서 묻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저 교회가 나에게 무엇을 주는가”가 아니라
“저 교회가 세상에 무엇을 주고 있는가”라고.
그리고 이 질문에 한국교회가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사람들에게 사랑을 말하면서 정작 교회 내부에서는 돈과 권력과 세습을 둘러싼 갈등이 벌어지고, 섬김을 말하면서 거대한 교회 건물을 경쟁적으로 세우고, 가난한 사람을 말하면서 부동산과 재산을 둘러싸고 싸우고, 정치적 자유를 말하면서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적으로 취급한다면 누가 그 말을 믿겠는가.
종교의 가장 강력한 설교는 설교가 아니다.
종교인이 살아가는 모습 그 자체다.
한국교회가 사람들에게 신뢰를 잃은 것도 바로 이것 때문이다.
교회가 말하는 것과 교회가 행동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위기는 교인 숫자의 감소보다 훨씬 심각하다.
교회의 도덕적 권위가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작아지는 것은 다시 성장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교회를 위선적인 권력집단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 회복하기가 훨씬 어렵다.
한국교회가 정말 다시 살아나고 싶다면 거대한 부흥회를 다시 열 것이 아니라 먼저 기득권부터 내려놓아야 한다.
정치권력과 거리를 두어야 하고, 교회 재산을 성역화하지 말아야 하며, 목회자의 권력을 제한해야 하고, 교회 세습과 특권을 철저하게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약자의 편으로 다시 내려가야 한다.
외국인 노동자의 손을 잡고, 가난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차별받는 사람을 보호하고, 슬롯적 약자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자신의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것이 기독교의 본질이라면 말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선택해야 한다.
계속해서 정치권력과 결탁하고, 거대한 조직과 재산을 지키며,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들이 가진 것을 내려놓고 다시 인간의 고통 속으로 들어갈 것인가.
나는 한국교회가 쇠퇴하는 것이 반드시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의 교회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교인이 줄어들고, 헌금이 줄어들고, 거대한 교회 건물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는 일이 오히려 교회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를 다시 묻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진짜 문제는 교회의 크기가 아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다.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려고 한다면 교회는 이미 실패한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섬기려고 한다면 교회가 작아져도 실패한 것이 아니다.
예수의 길은 원래부터 권력의 길이 아니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너무 빨리 권력의 맛을 알아버렸다.
겨우 100년 남짓한 역사 속에서 벌써 거대한 건물과 재산과 정치적 영향력을 갖고, 자신을 지키기 위해 세상과 싸우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이 떠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국 기독교가 벌써 망하는 이유는 교리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성경을 몰라서도 아니다.
기도가 부족해서도 아니다.
어쩌면 가장 단순한 이유일 수 있다.
자기를 섬기는 종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가 자기 자신을 섬기기 시작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세상을 구원하는 종교가 아니다.
그저 자기 보존을 위해 싸우는 하나의 기득권 조직일 뿐이다.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먼저 이 사실부터 인정해야 한다.
교회가 망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화된 교회가 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 몰락의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것인가가 아니라, 교회가 세상에 무엇을 내어놓을 것인가를 묻는 순간부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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