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교분리의 원칙을 손현보는 제대로 배워야 한다
손현보의 최근 행보를 보고 있으면 한 가지 질문을 피하기 어렵다. 그는 목사인가, 정치가인가.
미국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고, 미국 보수 기독교계의 방송에 출연해 자신의 구속을 ‘정부를 비판했기 때문에 당한 종교탄압’으로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 더욱 그렇다. 문제는 정치적 의견을 갖는 것 자체가 아니다. 목사도 시민이므로 정치적 견해를 가질 자유가 있다. 문제는 목회자의 종교적 권위와 교회의 조직을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순간 발생한다.
손현보는 자신의 사건을 ‘정부 비판에 대한 탄압’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법원이 문제 삼은 것은 단순한 정부 비판이 아니었다. 2025년 대통령선거와 부산교육감 재선거 과정에서 특정 후보를 지지하거나 다른 후보의 낙선을 호소하고, 교회에서 후보자와 대담하는 등 선거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행위가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것이다. 1심 법원은 유죄를 인정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다.
그런데도 이를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5개월 동안 독방에 갇힌 사건’으로 설명한다면 사건의 본질을 바꾸어버리는 것이다.
정부를 비판하는 것은 민주주의 시민의 권리다. 그러나 특정 후보의 당선과 낙선을 목적으로 교회의 조직과 예배라는 종교적 공간을 이용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손현보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다시 배워야 한다.
정교분리는 교회가 정치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더 근본적인 원칙이다. 국가는 교회의 신앙을 지배해서는 안 되고, 교회 역시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국가권력을 장악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이다.
정교분리는 국가로부터 종교를 보호하는 장치인 동시에 종교로부터 정치를 보호하는 장치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정교분리는 아주 이상한 논리로 변한다. 국가가 교회를 간섭하면 ‘종교 탄압’이라고 주장하면서, 교회가 선거에 조직적으로 개입하면 그것을 ‘종교의 자유’라고 주장하게 된다. 그러나 종교의 자유는 종교기관이 법 위에 설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목사도 시민이다. 교회도 법인격을 가진 슬롯적 조직이다. 신앙공동체라고 해서 대한민국의 법질서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강단의 권위다.
일반 시민이 정치적 의견을 말하는 것과 목사가 예배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슬롯적 의미가 다르다. 목사는 단순한 정치적 의견을 가진 개인이 아니다. 신도들에게는 영적 지도자이고, 그의 말에는 종교적 권위가 부여된다.
따라서 목사가 “나는 이 후보를 지지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기독교인이라면 이 후보를 지지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후자는 정치적 선택을 종교적 신앙의 문제로 바꿔버린다.
그 순간 민주주의의 시민은 사라지고 종교적 추종자가 등장한다. 정치적 판단은 사라지고 신앙적 복종이 들어온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단순하다.
민주주의에서 정당한 권력은 시민의 자유로운 판단에서 나온다. 그러나 종교적 권위가 특정 정치세력과 결합하면 정치적 선택이 신앙의 정당성으로 포장될 수 있다. 그러면 상대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은 단순히 정치적 반대자가 아니라 신앙적으로 잘못된 사람처럼 취급될 위험이 있다.
이것은 교회를 정치화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정치를 신성화하는 일이다.
한국 슬롯에서 일부 보수 기독교의 정치화가 위험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치적 보수주의와 기독교 신앙을 동일시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선택을 곧 신앙의 선택으로 만들어버리는 순간, 교회 안에서 정치적 다원주의가 설 자리가 사라진다.
그러면 교회는 더 이상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하나의 정치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결사체로 변한다.
그 순간 목사는 목회자가 아니라 정치적 지도자가 된다.
나는 손현보에게 바로 이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이 정말 지키고 싶은 것이 교회인가, 아니면 정치적 영향력인가.
정부가 교회의 예배를 통제한다면 당연히 저항해야 한다. 국가가 특정 종교의 신앙을 억압한다면 그것 역시 단호하게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정부가 선거법을 집행하는 것을 종교탄압이라고 규정하려면 먼저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를 정직하게 설명해야 한다.
정부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처벌받은 것인지, 아니면 선거에 직접 개입한 행위 때문에 법적 바카라임을 진 것인지부터 분명히 해야 한다.
이 둘을 의도적으로 뒤섞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미국에 가서 자신의 사건을 ‘종교탄압’으로 설명하는 것은 더욱 신중해야 한다. 국내에서 벌어진 선거법 사건을 미국의 보수 기독교 정치와 연결해 ‘한국에서 기독교가 박해받고 있다’는 이야기로 확대한다면, 이것은 단순한 신앙의 간증이 아니라 정치적 메시지가 된다.
트럼프 시대 미국 보수 기독교가 보여준 정치적 동원 방식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복음과 국가주의, 신앙과 정당정치, 종교적 가치와 특정 정치지도자에 대한 충성이 서로 결합하는 순간 교회는 위험해진다.
기독교는 어느 정당의 소유가 아니다.
복음은 보수의 전유물도 아니고 진보의 전유물도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특정 정치세력의 상징으로 만드는 순간 기독교는 보편성을 잃는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 능력까지 상실한다는 것이다.
오늘의 정치적 동맹이 내일의 정치적 적대자가 될 수 있는 것이 민주주의다. 교회가 특정 권력과 지나치게 밀착하면 그 권력이 잘못했을 때 교회는 비판할 수 없게 된다. 정치권력과 결탁한 종교는 결국 정치권력의 도덕적 장식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권력과 결합했을 때 가장 먼저 잃어버린 것은 정치적 영향력이 아니다. 예언자적 자유였다.
교회가 국가를 비판할 수 있으려면 국가로부터 독립되어 있어야 한다. 동시에 교회가 특정 정당과 후보를 위해 움직이지 않아야 정치권력에 대해서도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다.
그것이 정교분리의 진정한 의미다.
정교분리는 교회를 약하게 만드는 원칙이 아니다. 오히려 교회를 정치권력보다 더 자유롭게 만드는 원칙이다.
그러므로 손현보가 정말 기독교의 자유를 말하고 싶다면 ‘나는 정부에 의해 탄압받았다’는 피해자 서사부터 반복할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먼저 물어야 한다.
나는 목회자로서 정치적 권력을 비판한 것인가.
아니면 목회자의 종교적 권위를 이용해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려 한 것인가.
나는 교회의 자유를 지키려 한 것인가.
아니면 교회를 정치적 동원의 장으로 만든 것인가.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해야 한다.
기독교의 역사에서 교회가 권력을 얻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려운 것은 권력을 얻고도 복음을 잃지 않는 것이다.
목사는 정치적 의견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목사의 권위가 정치적 동원의 도구가 되는 순간 목회는 정치로 변한다.
교회는 정부를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교회가 특정 후보의 당선과 낙선을 위해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순간 교회는 시민슬롯의 정치조직과 구별하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목사가 정치가가 되는 순간, 교회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잃는다.
정치적 진영을 넘어 모든 인간을 바라볼 수 있는 보편성이다.
손현보가 정말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싶다면 먼저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부터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지지하는 정치적 선택도 틀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나의 신앙적 권위가 다른 사람의 정치적 자유를 대신할 수 없다는 것.
이것이 민주주의다.
그리고 이것이 정교분리다.
정교분리는 국가가 교회에 침묵을 강요하는 원칙이 아니다. 교회가 국가를 지배하지 못하게 하는 원칙도 아니다. 그것은 국가와 교회가 서로의 영역을 존중함으로써 국가도 자유롭고 교회도 자유롭게 만드는 원칙이다.
그러므로 손현보가 배워야 할 것은 ‘정치에 참여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정치에 참여하되 목사로서 참여할 것인지 정치가로서 참여할 것인지를 분명히 하라는 것이다.
목사라면 교회의 문을 열어 모든 정치적 의견을 가진 사람을 받아들여야 한다. 특정 후보의 선거운동을 하기보다 정의와 자유와 바카라임과 공동선을 말해야 한다. 특정 정치인의 이름을 복음의 이름과 결합하기보다 권력을 가진 자가 누구든 그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
그것이 교회의 정치다.
정치권력을 얻는 것이 교회의 정치가 아니다.
교회가 정치권력에 휘둘리지 않도록 만드는 것, 그리고 어떤 권력이든 진실과 정의 앞에서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지키는 것, 그것이 교회의 정치다.
손현보는 선택해야 한다.
목사인가, 정치가인가.
둘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강단과 선거운동의 경계를 허무는 순간 두 역할은 충돌한다.
목사가 정치가가 되고 싶다면 정치가가 되면 된다.
그것은 자유다.
그러나 정치가가 되면서 목사의 종교적 권위까지 정치적 무기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교회의 십자가를 정치의 깃발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 순간 십자가는 복음의 상징이 아니라 정치적 진영의 로고가 되기 때문이다.
손현보가 정말 정교분리를 지키고 싶다면 국가에게만 정교분리를 요구해서는 안 된다.
교회도 정교분리를 지켜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손현보가 지금 가장 먼저 배워야 할 민주주의의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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