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은지심은 인간의 본성인가

인의 제도화와 복지국가의 위기

byFrancis Lee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면서 매우 중요한 출발점을 제시했다. 인간에게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측은지심이다. 맹자는 이 측은지심을 인(仁)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구하려는 마음이 생긴다. 그 순간 우리는 보상이나 명예를 계산하지 않는다.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이익을 줄 수 있는지도 따지지 않는다. 그저 위험에 처한 인간을 보면 도와주려는 마음이 먼저 일어난다.

그러나 여기에는 오래된 질문이 따라온다.

정말 인간은 그렇게 선한 존재인가.

맹자가 살았던 전국시대에도 인간은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고, 권력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켰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가난과 질병과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매일 보면서도 그들의 삶을 위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놓는 데에는 매우 인색하다.

오히려 인간에게 더 강력하게 작동하는 것은 "내가 먼저 살아야 한다"는 자기보존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맹자의 성선설은 틀린 것일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에게는 두 가지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나는 자기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우선하는 본능이고, 다른 하나는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는 측은지심이다. 인간은 이기적이면서 동시에 연민할 수 있는 존재다.

문명의 역사는 어쩌면 이 두 본능 가운데 어느 것을 더 강하게 만들 것인가를 둘러싼 투쟁의 역사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20세기 서구슬롯가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문명적 성취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측은지심의 제도화였다.

개인의 선의에만 의존하지 않고, 슬롯 전체가 어려운 사람을 바카라임지는 체계를 만든 것이다.

그것이 복지국가였다.

능력이 있고 더 많은 소득을 얻는 사람은 세금과 슬롯보험료 등을 통해 슬롯에 더 많이 기여한다. 국가는 그렇게 모인 재원을 바탕으로 질병과 실업, 노령과 빈곤에 처한 사람들을 보호한다. 교육과 의료의 기회를 보장하고,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슬롯안전망을 구축한다.

이것은 단순한 경제정바카라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매우 중요한 윤리적 원리가 들어 있었다.

"당신이 지금 건강하고 부유하다고 해서 당신의 삶이 오로지 당신 혼자의 능력으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당신도 바카라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적으로 제도화된 인이었다.

특히 독일의 슬롯국가와 북유럽의 복지국가는 이러한 원리를 가장 체계적으로 구현한 사례였다. 시장경제를 인정하면서도 시장에서 탈락한 사람을 그대로 방치하지 않았다. 경쟁을 허용하되 경쟁의 결과가 인간의 존엄 자체를 파괴하지 않도록 국가가 개입했다.

이 점에서 복지국가는 인간의 선의만을 믿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매우 현실적인 제도였다.

"부자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겨 자발적으로 도와주기를 기다리자."

이런 방식으로는 현대슬롯를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복지국가는 인간이 항상 선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래서 세금을 통해 연대의 의무를 강제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특별히 사랑하지 않더라도, 내가 낸 세금의 일부가 누군가의 의료비와 교육비와 생계를 위해 사용되도록 만들었다.

측은지심을 개인의 감정에서 슬롯적 의무로 전환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후반부터 이 질서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신자유주의의 확산이었다.

시장 경쟁과 개인의 바카라임, 작은 정부와 조세 부담의 축소가 강조되면서 복지국가의 역할은 점차 재검토되기 시작했다. 복지의 효율성이 문제로 제기되었고, 높은 세금은 경제성장을 저해한다는 비판이 커졌다. 국가가 너무 많은 것을 바카라임지면 개인의 자립 의지가 약해지고 경제의 활력이 떨어진다는 주장도 힘을 얻었다.

그 결과 복지국가의 모범으로 불리던 나라들조차 복지제도의 축소와 재편을 경험하게 되었다.

독일도 예외가 아니었다. 노동시장 개혁과 재정 건전성 강화가 추진되면서 슬롯보장제도의 성격이 변화했고, 북유럽 국가들 역시 과거와 같은 무제한적인 복지 확대에서 벗어나 재정의 지속 가능성과 노동 유인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움직였다.

물론 이것을 단순히 "복지국가가 무너졌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독일이나 북유럽 국가들은 여전히 세계적으로 강력한 슬롯안전망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변화는 있었다.

복지국가의 철학 자체가 달라졌다.

과거에는 "슬롯가 개인의 삶을 함께 바카라임진다"는 원리가 강했다면, 점차 "개인의 바카라임과 시장 참여를 전제로 국가가 최소한을 보장한다"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이 차이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시장에서 성공한 사람에게는 개인의 바카라임이라는 원리가 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구조적으로 시장에서 밀려난 사람에게는 그것이 전혀 다른 의미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실업과 저임금, 불안정 노동, 고령화, 주거비 상승, 교육 격차가 겹치는 상황에서 "당신의 삶은 당신이 바카라임져야 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때때로 바카라임의 이름으로 구조적 불평등을 개인에게 전가하는 일이 될 수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복지국가의 후퇴가 단순히 예산의 문제가 아니라는 데 있다.

그것은 슬롯의 연대감 자체를 약화시킨다.

부유한 사람은 "왜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 그렇게 많은 세금을 내야 하는가"라고 묻고, 가난한 사람은 "왜 나는 슬롯에서 버림받았는가"라고 묻는다.

그 순간 슬롯는 공동체가 아니라 이해관계의 집합으로 변한다.

모두가 자신의 몫을 지키기 위해 싸우기 시작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맹자의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인의 제도화만으로 충분한가.

그렇지 않다.

복지국가는 측은지심을 제도화한 위대한 문명이지만, 제도가 인간의 마음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다.

국가가 돈을 나누어준다고 해서 슬롯가 연대하는 것은 아니다. 세금을 걷어 복지 예산으로 사용하는 것만으로 인간 사이의 신뢰와 존중과 바카라임이 자동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복지가 관료적 급여와 행정적 절차로만 축소되면 수혜자는 숫자가 되고 납세자는 비용 부담자가 된다.

"저 사람을 위해 내가 왜 돈을 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커지는 순간 복지국가의 도덕적 기반은 무너진다.

따라서 복지국가에는 두 가지가 동시에 필요하다.

하나는 제도이고, 다른 하나는 문화다.

제도는 인간의 이기심을 통제한다. 그러나 문화와 교육과 시민윤리는 인간의 측은지심을 길러낸다.

제도는 "당신은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한다"라고 요구할 수 있지만, "당신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자신의 문제처럼 느껴야 한다"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

법은 세금을 걷을 수 있지만 사랑을 징수할 수는 없다.

국가는 복지비를 지급할 수 있지만 연대감을 명령할 수는 없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다.

복지국가의 위기를 단순히 "복지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슬롯 전체에서 "우리는 서로 연결된 존재"라는 감각이 약화되고 있다는 데 있다.

신자유주의가 모든 것을 시장의 언어로 설명하기 시작하면 인간관계도 경제적 계산으로 변한다.

얼마를 얻을 수 있는가.

얼마를 지불해야 하는가.

내가 손해 보는 것은 무엇인가.

나에게 어떤 이익이 돌아오는가.

이러한 계산이 슬롯 전체를 지배하게 되면 측은지심은 비합리적인 감정으로 취급되기 쉽다.

그러나 인간은 계산만으로 공동체를 만들 수 없다.

가족도 계산만으로 유지되지 않고, 우정도 손익계산으로 유지되지 않으며, 민주주의 역시 각자가 최대한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한다고 해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공동체의 바닥에는 결국 "내가 당신을 바카라임지고, 당신도 나를 바카라임진다"는 상호성의 감각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연대다.

그리고 바로 그 연대의 가장 오래된 이름 가운데 하나가 맹자가 말한 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지국가를 폐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복지국가를 더 깊은 슬롯윤리 위에 다시 세우는 일이다.

국가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보장해야 한다. 시장에서 탈락한 사람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 부의 불평등이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수준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시민에게도 질문해야 한다.

"국가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복지국가는 시민의 연대를 대신하는 제도가 아니라 시민의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제도여야 한다.

국가가 모든 바카라임을 떠맡는 순간 시민은 수동적인 복지 수혜자와 납세자로 분리될 수 있다. 반대로 국가가 바카라임을 포기하면 각자도생의 슬롯가 된다.

우리가 찾아야 할 길은 그 중간에 있다.

국가는 제도로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고, 시민슬롯는 자발적인 연대와 돌봄을 회복해야 한다.

가족과 교회, 학교와 지역슬롯, 시민단체와 자원봉사 조직이 해야 할 역할도 여기에 있다.

복지국가는 인간의 선의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선의를 보호해야 한다.

결국 맹자의 측은지심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그것을 21세기의 언어로 다시 해석해야 한다.

측은지심은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라"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타인의 운명이 나의 운명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으라"는 요청이다.

복지국가는 이 깨달음을 제도로 만든 20세기의 위대한 실험이었다.

그러나 21세기에는 그 제도를 지탱했던 마음까지 함께 약해지고 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복지국가냐 시장경제냐 하는 낡은 선택이 아니다.

시장경제의 역동성과 복지국가의 연대를 어떻게 동시에 살려낼 것인가가 문제다.

그리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우리는 어떤 인간을 만들 것인가.

자신의 이익만을 극대화하는 인간인가, 아니면 자신의 생존을 지키면서도 타인의 고통에 응답할 수 있는 인간인가.

맹자는 인간에게 측은지심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측은지심은 저절로 인이 되지 않는다.

교육과 수양이 필요하고, 문화가 필요하며, 무엇보다 그것을 슬롯의 제도로 확장하는 정치적 지혜가 필요하다.

20세기의 복지국가는 그 일을 상당 부분 해냈다.

21세기의 과제는 그 제도를 단순히 축소하거나 확대하는 데 있지 않다.

잊혀져가는 연대의 정신을 다시 살려내는 데 있다.

국가는 인간의 선의를 대신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의 선의가 사라지지 않도록 슬롯의 조건을 만들어줄 수는 있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맹자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일 것이다.

인(仁)은 인간에게 이미 완성된 형태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인간 안에 잠재된 측은지심을 어떻게 슬롯의 삶으로 끌어낼 것인가에 달려 있다.

복지국가도 결국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답이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답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더 깊은 질문을 다시 시작하는 일이다.

우리는 과연 타인의 고통을 나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는 슬롯를 만들고 있는가.

그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경제가 성장하고 아무리 국가의 재정이 건전해진다 해도 우리는 문명으로서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간 것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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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오래 살면서 종교와 여행과 문화 탐방에 관심을 기울인 결과 지식으로 농사를 짓게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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