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협력을 바탕으로 아시아가 세계 중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세계 경제의 질서가 조용하지만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20세기 후반의 세계는 미국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소련의 붕괴 이후에는 미국의 경제력과 군사력이 사실상 경쟁 상대가 없는 일극체제를 형성했고, 달러와 미국의 금융시장, 미국의 기술기업,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기구와 동맹체제가 세계 질서를 규정했다.
그러나 21세기 중반으로 접어드는 지금, 이 질서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
중국이 경제·기술·군사 강국으로 성장했고, 한국과 대만은 세계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국가가 됐으며, 일본도 자동차·소재·정밀기계·로봇 등에서 여전히 막강한 산업 기반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인도와 동남아시아까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들 국가가 서로 경쟁하면서도 서로 없이는 세계적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운 산업구조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이 현상을 설명하는 데 ‘프레너미(frenemy)’라는 단어가 매우 적절하다.
프레너미는 친구(friend)와 적(enemy)을 결합한 말이다. 서로 경쟁하고 때로는 적대하지만 동시에 협력하지 않으면 자신의 이익을 확보하기 어려운 관계를 뜻한다. 이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생각보다 오래전이다. 미국의 칼럼니스트 월터 윈첼이 1953년 ‘러시아인을 우리의 프레너미라고 부르면 어떻겠느냐’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대표적인 초기 용례다. 이후 이 단어는 개인적 관계뿐 아니라 기업과 국가 사이의 복잡한 경쟁·협력 관계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확장됐다.
흥미로운 것은 1953년 이 단어가 미국과 소련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70여 년이 지난 지금 프레너미라는 단어가 다시 국제질서를 설명하는 데 유용해지고 있다.
다만 이번에는 미국과 소련이 아니라 아시아의 경제 강국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CNN이 최근 보도한 한국과 대만의 반도체 관계가 그 대표적인 사례다.
한국과 대만은 오랫동안 치열한 경쟁자였다. 삼성전자와 대만 기업들은 디스플레이·스마트폰·전자제품 등에서 경쟁했고, 반도체에서도 서로의 시장을 빼앗기 위해 경쟁했다. CNN은 과거 대만 언론이 삼성전자의 이른바 ‘Kill Taiwan’ 전략을 보도했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고 소개했다. 물론 삼성 측은 그러한 전략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부인했고, 기사에 등장한 전문가 역시 기업 간 경쟁을 지나치게 국가 간 적대관계로 확대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AI 시대가 등장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엔비디아의 AI 서버 하나를 생각해보면 이 변화가 얼마나 극적인지 알 수 있다. 핵심 연산칩은 대만의 TSMC가 생산하고, AI 연산에 필수적인 HBM은 한국의 SK하이닉스와 삼성전자가 공급한다. 그리고 이들을 하나의 고성능 AI 가속기로 결합하는 첨단 패키징 기술 역시 대만의 산업 생태계에 크게 의존한다.
한국과 대만이 서로 경쟁하면서도 서로의 기술 없이는 AI 반도체 공급망을 완성하기 어려운 구조가 만들어진 것이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이 SK하이닉스의 메모리 웨이퍼에 ‘더 많이 만들어 달라’는 의미의 메시지를 직접 남긴 장면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과거에는 삼성과 TSMC가 서로 시장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했다면, 이제는 엔비디아라는 거대한 AI 수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한국과 대만의 기술이 하나의 공급망 안에서 결합해야 한다.
CNN이 최근 기사에서 이를 ‘frenemy’라고 표현한 이유다.
대만은 세계 최고의 파운드리 경쟁력을 가지고 있고 한국은 HBM에서 압도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경쟁자인 두 나라가 AI라는 거대한 시장 앞에서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된 것이다.
이 변화는 단순한 반도체 산업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계 경제가 앞으로 어떤 방식으로 움직일 것인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축소판이다.
과거 산업경쟁의 기본 단위는 국가와 기업이었다. 미국 기업과 일본 기업, 일본 기업과 한국 기업, 한국 기업과 대만 기업이 서로 경쟁했다.
하지만 AI와 첨단산업 시대에는 공급망이 너무 복잡해졌다. 하나의 제품을 만드는 데 여러 나라의 기술과 기업이 동시에 필요하다.
이 때문에 경쟁과 협력이 동시에 발생한다.
한국과 대만은 반도체에서 경쟁하지만 서로 필요하다. 한국과 일본은 자동차·전자·소재 분야에서 경쟁하면서도 핵심 소재와 장비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중국과 일본은 지정학적으로 경쟁하지만 자동차·배터리·전자제품 등에서는 거대한 경제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중국과 한국 역시 첨단산업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면서 동시에 거대한 교역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것이 앞으로의 세계 경제를 특징짓는 새로운 모습이다. 적과 동지를 명확하게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면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가능성이 보인다. 미국 일극체제가 과연 영원히 지속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미국은 사실상 유일한 초강대국이 됐다. 군사력에서는 압도적이었고 경제력에서도 세계 최대였으며, 달러는 국제 금융시스템의 중심이었다. 인터넷과 반도체, 소프트웨어, 플랫폼 기업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술 역시 미국 기업들이 주도했다.
이른바 미국의 일극체제였다.
그러나 일극체제의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이 모든 영역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이 직면한 가장 큰 변화는 중국이라는 거대한 경쟁자의 등장이다.
중국은 이제 단순한 제조업 국가가 아니다. AI, 전기자동차, 배터리, 드론, 로봇, 태양광, 통신장비 등 여러 첨단산업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
최근 로이터가 중국의 로봇산업을 분석한 보도는 흥미로운 사례다. 중국의 유니트리 로보틱스 같은 기업들은 미국에서 군사 연구비로 개발된 로봇 기술을 공개 연구성과를 통해 흡수한 뒤 중국의 산업정바카라과 제조 생태계를 이용해 대량생산으로 연결하고 있다. 미국이 원천 연구와 혁신에서 앞선 분야에서도 중국은 빠른 상용화와 제조 규모를 통해 경쟁력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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