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오디세우스가 영웅이었는가

승자의 미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byFrancis Lee

만인의 걸작으로 칭송받아온 <오디세이>를 오늘날의 시선으로 다시 바라보면, 단순한 영웅 서사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지점이 적지 않다. 오히려 이 작품은 우리에게 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오디세우스가 영웅이었는가.

그는 전쟁에서 승리했다. 적국을 무너뜨렸고 수많은 시련을 견뎌냈으며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통적인 영웅 서사의 문법으로 보면 더할 나위 없는 주인공이다. 고난, 투쟁, 승리, 귀환, 가족과의 재회. 영웅 서사의 거의 모든 요소가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이 서사에서 빠져 있는 것이 있다.

그 승리로 누가 무엇을 얻었는가.

트로이는 불탔다.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오디세우스를 따르던 병사들도 희생됐다. 한 국가가 파괴됐고, 수많은 가정이 무너졌다. 그러나 영웅의 서사는 이 죽음과 폐허를 배경으로 밀어낸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트로이의 죽은 자들이 아니라 살아남아 고향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다.

여기서 영웅 서사의 오래된 비밀이 드러난다.

살아남은 자는 이야기를 갖지만 죽은 자는 침묵한다.

이 침묵의 비대칭이 승자의 역사를 만든다.

전쟁에는 언제나 명분이 있다.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서,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 복수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명분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전쟁이 정당하다는 사실은 동일하지 않다.

트로이 전쟁 역시 헬레네를 둘러싼 갈등과 맹세, 명예와 복수의 논리 속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 명분이 수많은 인간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전쟁의 명분을 결정하는 사람과 그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 다르다는 데 있다.

명예는 왕과 영웅의 것이지만 죽음은 병사의 것이다.

복수는 지도자의 언어지만 희생은 이름 없는 사람들의 몫이다.

전쟁의 명분은 살아남은 자들이 만들지만 전쟁의 대가는 죽은 자들이 치른다.

그런데 영웅 서사는 이 구조를 거꾸로 뒤집는다.

전쟁을 결정하고 지휘한 사람이 영웅이 되고,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은 배경이 된다.

침략은 원정이 되고, 학살은 승리가 되며, 약탈은 전리품이 된다. 죽음은 숭고한 희생으로 포장되고 승자는 역사의 주인공이 된다.

문명의 역사는 폭력의 역사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폭력에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온 역사이기도 하다.

영웅이라는 이름은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이름이다.

오디세우스가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행동 역시 이 질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트로이에 침투하고, 목마의 계략을 이용해 도시를 무너뜨리며, 결국 수많은 사람의 죽음을 초래한다.

그런데 영화는 그를 단순한 살육자로 그리지 않는다.

그는 번민한다.

전쟁의 허무를 깨닫는다.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폭력 앞에서 인간적인 표정을 짓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현대 문화가 가해자를 재현하는 방식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 우리는 악인을 단순한 악인으로 묘사하는 것을 불편해한다. 인간은 복합적이어야 하고, 악을 행한 사람에게도 사연이 있어야 하며, 그에게도 고뇌가 있어야 한다.

그 결과 가해자의 내면은 점점 풍부해지는 반면 피해자의 삶은 점점 단순해진다.

가해자는 이름과 얼굴을 갖는다.

그의 어린 시절과 사랑, 두려움과 고뇌가 설명된다.

그러나 피해자는 숫자가 된다.

수천 명, 수만 명이라는 통계가 된다.

이것은 단순한 영화적 표현의 문제가 아니다.

누구의 내면을 보여주는가를 결정하는 것은 누구를 인간으로 기억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가 고뇌했다는 사실은 그가 저지른 폭력을 없애주지 않는다. 그가 가족을 사랑했다는 사실 역시 트로이의 죽은 자들을 되살리지 못한다. 그가 끝내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사실도 불타버린 도시를 복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영웅 서사는 모든 것을 한 인간의 귀환으로 압축한다.

전쟁의 역사는 사라지고 귀환의 서사가 남는다.

집단의 비극은 개인의 시련이 된다.

타인의 죽음은 주인공의 성장 과정이 된다.

그리고 마침내 영웅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다.

관객은 안도하고 감동한다.

이렇게 전쟁의 객관적 바카라임은 개인의 감동적인 서사 속에서 희석된다.

가해자의 고뇌가 피해자의 고통을 대신하는 순간이다.

이것이 영웅 서사가 가진 가장 오래되고 강력한 기술인지도 모른다.

집단의 비극을 개인의 성장담으로 바꾸는 것.

역사의 폭력을 인간적 감동으로 바꾸는 것.

그리고 승자의 역사를 보편적 인간의 이야기처럼 만드는 것이다.

영화에서 강조되는 환대의 윤리도 이러한 맥락에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 환대는 단순한 친절이 아니었다. 낯선 이방인을 인간으로 인정하고 보호하는 것은 문명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규범이었다. 타자를 함부로 배척하지 않는 것, 자신과 다른 존재를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 그것이 문명의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문명은 언제나 자신이 말하는 가치를 실천해 온 것은 아니다.

근대 서구 문명의 역사를 돌아보면 타자를 환대하라는 윤리와 타자를 정복하고 배제하고 식민화한 역사가 나란히 존재한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역사는 그 모순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유럽에서 온 이방인을 받아들였던 사람들이 결국 토지의 점유와 폭력, 학살과 강제이주의 대상이 되었다.

고대 그리스의 환대 윤리와 근대 미국의 역사를 단순하게 동일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역사적 동일성이 아니라 하나의 문명적 모순이다.

문명은 자신이 믿는 가치와 자신이 실제로 행한 역사 사이에서 얼마나 거대한 간극을 만들어낼 수 있는가.

그리고 그 간극을 가장 아름답게 가려주는 것이 문화다.

문명은 자신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이야기한다.

문화는 그 이야기에 아름다운 형식을 부여한다.

영화는 그 형식을 이미지로 만든다.

그 과정에서 폭력적인 역사도 숭고한 서사가 될 수 있다.

정복의 역사도 모험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

제국의 역사는 문명의 확장으로 표현될 수 있고, 침략자의 귀환은 영웅의 귀환으로 재현될 수 있다.

승자의 미화는 역사바카라에서 끝나지 않는다. 스크린에서도 계속된다.

오늘날 영화산업은 이 작업을 과거 어느 시대보다 강력한 기술로 수행한다.

거대한 제작비와 최첨단 촬영기술은 전쟁을 하나의 압도적인 시각적 경험으로 만든다. 불타는 도시, 무너지는 성벽, 거대한 군대의 충돌, 폭발과 살육은 실제 전쟁보다 더 선명하고 더 장엄한 이미지로 재현된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역설이 있다.

전쟁이 끔찍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전쟁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폭력을 비판하기 위해 폭력의 이미지를 소비하게 한다.

전쟁을 혐오하게 만들기 위해 전쟁의 스펙터클에 매혹되게 한다.

이것은 현대 문화산업의 독특한 능력이다.

현대 자본주의는 비판을 반드시 억압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판을 상품으로 만든다.

전쟁에 대한 분노도 콘텐츠가 되고,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도 영화가 되며, 영웅주의에 대한 해체조차 흥행상품이 된다.

자본주의가 강력한 이유는 자신을 비판하는 목소리를 제거하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 목소리마저 팔 수 있기 때문이다.

저항도 상품이 된다.

반항도 콘텐츠가 된다.

비판도 소비된다.

그리고 소비된 비판은 관객을 다시 일상으로 돌려보낸다.

영화관에서 전쟁의 부조리에 분노하고, 인간의 폭력성에 절망하고, 영웅주의의 허구를 생각하더라도 영화가 끝나는 순간 그 모든 감정은 하나의 소비 경험으로 포장된다.

티켓은 팔리고, 극장은 수익을 얻고, 제작사는 흥행을 기록하며, 감독의 이름은 하나의 문화적 브랜드가 된다.

비판은 상품이 되고, 상품은 다시 자본이 된다.

이것이 오늘날 문화산업의 가장 놀라운 역설이다.

문화는 현실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현실을 소비하게 만든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영화가 전쟁을 비판했느냐 아니냐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전쟁에 대한 비판마저 하나의 상품으로 소비되는 구조에서 우리는 정말 전쟁을 비판하고 있는가, 아니면 전쟁의 이미지를 소비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오디세이> 한 편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오늘날 대중문화 전체가 직면한 문제다.

영화는 역사적 폭력을 재현할 수 있다. 가해자의 심리를 탐구할 수도 있다. 그것은 예술의 자유다.

그러나 관객은 그 자유와 함께 질문할 자유도 가져야 한다.

누구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누구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가.

누구의 고통이 서사의 중심에 놓이는가.

누구의 죽음은 배경이 되는가.

누가 영웅이 되고, 누가 이름 없는 희생자가 되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누가 살아남아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권리를 갖는가.

오디세우스는 살아남았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갖게 되었다.

그 이야기는 세대를 넘어 전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영웅이 되었다.

어쩌면 영웅이란 위대한 사람이어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기억될 수 있었기 때문에 위대한 사람이 된 존재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크게 다르지 않다.

고대에는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영웅이었다면, 현대에는 자본과 기술과 미디어를 장악한 사람이 문화적 영웅이 된다.

막대한 자본을 동원하고, 거대한 스펙터클을 만들고, 대중의 열광을 끌어낸 사람은 거장이 된다.

성공은 권위를 만들고, 권위는 다시 성공을 부른다.

자본이 흥행을 만들고, 흥행이 예술적 권위를 강화하며, 그 권위가 다시 더 많은 자본을 끌어들이는 순환이다.

이것이 현대의 새로운 영웅 제조 시스템이다.

오디세우스는 전쟁에서 승리해 영웅이 되었다.

현대의 문화적 영웅은 거대한 자본과 기술을 동원해 대중의 열광을 만들어냄으로써 영웅이 된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원리는 놀랍도록 비슷하다.

성공한 자의 서사는 성공하지 못한 자의 서사를 압도한다.

그러므로 영웅을 판단하는 기준을 승리와 성공에서 바카라임과 정의로 옮겨야 한다.

얼마나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는가만 물을 것이 아니라, 그 업적의 대가는 누가 치렀는지를 물어야 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는가만 볼 것이 아니라, 그 감동이 무엇을 가리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얼마나 거대한 성공을 이루었는가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성공의 뒤편에서 어떤 목소리가 사라졌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의 영광 뒤에 누가 희생되었는가.

그의 승리 뒤에 누가 침묵했는가.

그의 성공을 가능하게 한 비용은 누가 부담했는가.

이 질문을 통과하지 않은 영웅은 단지 승자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오늘날 문화가 해야 할 일도 영웅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영웅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어내 그가 만들어낸 세계를 바라보게 해야 한다. 영웅의 눈물보다 그 눈물 뒤에 남겨진 사람들을 바라보게 해야 한다. 승자의 귀환보다 패자의 폐허를 기억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문화가 문명을 성찰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디세이>는 단순한 고대의 영웅담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문명이 수천 년 동안 반복해 온 하나의 오래된 장면이다.

승리한 자가 살아남는다.

살아남은 자가 이야기를 갖는다.

이야기를 가진 자가 역사를 만든다.

그리고 역사를 가진 자가 영웅이 된다.

그렇다면 질문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과연 오디세우스가 영웅이었는가.

아니면 그저 승자의 이야기가 영웅의 이야기로 바뀐 것인가.

그리고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그대로 돌아온다.

우리는 누구를 영웅이라고 부르고 있는가.

정말 위대한 사람이어서 영웅인가.

아니면 성공했기 때문에 영웅인가.

살아남았기 때문에 영웅인가.

혹은 너무 강력한 서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웅인가.

문명이 성숙한다는 것은 새로운 영웅을 찾아내는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너무 오랫동안 영웅의 이름 아래 가려져 있던 사람들을 다시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승자의 이야기를 듣되 패자의 침묵도 함께 기억하는 것.

가해자의 고뇌를 이해하되 피해자의 고통을 잊지 않는 것.

폭력의 스펙터클에 매혹되더라도 그 스펙터클이 현실의 죽음을 어떻게 소비하는지 질문하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영웅에게 질문하는 것.

그의 영광은 누구의 희생 위에 세워졌는가.

어쩌면 진정으로 성숙한 문화는 영웅을 숭배하는 문화가 아니라 영웅에게 질문하는 문화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디세이>가 우리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오디세우스가 영웅인가라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훨씬 오래되고 불편한 질문이다.

승자의 미화는 왜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언제쯤 그 영웅의 얼굴에서 시선을 돌려, 그의 승리 뒤에 남겨진 사람들을 바라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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