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보수는 다시 태어날 때가 되었다
국민의힘이 이진숙 의원 한 사람을 둘러싼 논란조차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다. 5·18 민주화운동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는데도 당 지도부는 징계를 검토하지 않고 있다며 한발 물러섰다. 학술행사였다는 점과 논란이 된 발언이 이 의원 자신의 직접적인 발언이 아니라는 점 등을 이유로 들고 있다.
그러나 지금 국민이 묻고 있는 것은 이진숙 의원 개인의 역사관이 아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국민의힘이라는 정당이 스스로 원칙을 세우고 지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5·18을 둘러싼 학술적·역사적 논쟁 자체를 모두 금지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민주슬롯에서 역사에 대한 연구와 비판적 검토는 자유로워야 한다. 하지만 정치적 정당이 어떤 역사적 가치를 존중하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특히 대한민국의 보수정당이라면 자유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지키겠다는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
5·18은 민주당의 역사도, 진보 진영만의 역사도 아니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피와 희생을 통해 만들어진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국가적 역사다. 따라서 국민의힘이 5·18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의미를 인정하는 것은 진보 진영에 굴복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겠다는 보수의 원칙을 확인하는 일이다.
그런데 국민의힘은 바로 이 지점에서 머뭇거리고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진숙 의원을 강하게 제지하면 당내 강성 지지층의 반발을 살 수 있다. 민주당이 공격할 정치적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 그러다 보니 ‘개인의 의견’, ‘학술행사’, ‘정치적 공세’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논란을 최소화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산이야말로 국민의힘이 오랫동안 극복하지 못한 정치문화의 핵심이다.
강성 지지층의 눈치를 보느라 정당의 원칙을 세우지 못하는 정당은 국민 전체를 설득할 수 없다.
정당의 원칙은 지지율보다 강해야 하고, 계파의 이해관계보다 강해야 하며, 특정 정치인의 영향력보다 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당은 정치적 상황에 따라 원칙을 바꾸는 조직으로 전락한다.
국민의힘이 지금까지 반복해서 보여준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문제가 터질 때마다 무엇이 옳은가를 판단하기보다 어떤 선택이 당내 갈등을 최소화하고 선거에 유리한가를 먼저 계산한다. 그러다 보니 당의 가치와 정체성은 상황에 따라 흔들리고, 국민에게는 무엇을 지키려는 정당인지 명확하게 보이지 않는다.
이것은 단순한 이미지의 문제가 아니다.
정당이 원칙을 잃으면 결국 정바카라도 흔들린다. 오늘은 강성 지지층의 요구를 따라가고 내일은 중도층을 잡겠다며 방향을 바꾸는 식의 정치는 국민에게 예측 가능성을 주지 못한다. 특히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당이라면 이런 불안정성은 치명적이다.
그래서 국민의힘이 지금 해야 할 일은 이진숙 의원 한 사람을 둘러싼 논란을 적당히 봉합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보수가 무엇을 지키려는 정치세력인지 다시 정의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국 보수에는 분명 자랑스러운 역사가 있다. 산업화와 경제성장, 국가안보 강화, 자유시장경제의 발전에 보수 정치가 기여한 부분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 문제는 그 성과를 인정하기 위해 권위주의 정권의 잘못까지 함께 감싸야하는 것처럼 행동해 왔다는 데 있다.
그러나 산업화의 공로와 권위주의의 폐해는 동시에 인정할 수 있다.
박정희 시대의 경제성장을 평가하면서 유신체제를 비판할 수 있고, 국가안보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전두환 정권의 국가폭력을 비판할 수 있다.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면서 노동자의 권리를 보호할 수도 있다.
오히려 이것이 정상적인 보수의 태도다.
보수는 과거의 모든 것을 지키는 정치가 아니다. 지켜야 할 가치를 지키면서 버려야 할 것은 과감하게 버리는 정치다. 따라서 한국 보수가 과거 권위주의의 흔적과 결별하는 것은 보수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수의 본질로 돌아가는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5·18 문제는 오히려 국민의힘에게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
국민의힘은 5·18 민주화운동을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역사로 분명하게 규정하고, 국가폭력과 권위주의적 통치를 미화하거나 민주주의의 기본질서를 부정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당의 원칙에 따라 바카라임을 묻는 기준을 마련해야 한다.
이것은 특정 정치인을 겨냥한 징계규정을 만들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드는 것이 핵심이다.
지금처럼 논란이 발생할 때마다 지도부가 정치적 유불리를 따져 대응한다면 같은 문제는 계속 반복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당 윤리위원회 역시 지도부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립적으로 판단할 수 있도록 제도적 장치를 강화해야 한다. 징계 대상자의 정치적 영향력이나 계파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인식을 없애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당원과 국민 모두에게 “국민의힘에서는 누구도 원칙 위에 있지 않다”는 신뢰를 줄 수 있다.
그러나 제도를 만드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결국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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