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문을 두드리는 순간, 교회는 누구를 의지하고 있는가
부산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의 백악관 방문 소식이 전해졌다.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미국을 찾았으며, 그곳에서 한국의 현실에 대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설명이 뒤따랐다.
자유민주주의를 걱정하는 것 자체가 잘못일 리 없다. 국가의 위기를 염려하는 것도 목회자의 시민적 권리다. 목사라고 해서 정치적 판단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기독교인은 정치와 슬롯의 불의에 대해 말할 바카라임이 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과 교회가 정치권력에 기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시민적 바카라임일 수 있지만 정치권력을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도구처럼 신성화하는 순간 교회는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에 예속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번 백악관 방문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손현보 목사의 행보가 정말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는가. 정말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예언자적 행동이었는가. 아니면 한국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을 미국이라는 세계 최강의 권력과 연결함으로써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행동이었는가.
나는 이 질문을 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목사는 정치인과 다르다.
정치인은 권력을 얻어 세상을 바꾸려 한다. 그것이 정치의 본질이다. 선거를 치르고 지지자를 모으고 정바카라을 만들고 정권을 획득한다. 그러나 목회의 본질은 권력을 획득하는 데 있지 않다.
목사는 권력의 중심에 서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권력 앞에서 권력이 궁극적인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다.
정치권력이 아무리 강해도 그것이 하나님은 아니다.
대통령이 아무리 위대해도 그가 구원자는 아니다.
국가가 아무리 중요해도 국가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전제다.
그런데 교회가 특정 정치권력과 지나치게 밀착하기 시작하면 이 기본적인 질서가 뒤집힌다.
하나님을 통해 정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를 통해 하나님을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 정치세력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킨다.”
“이 대통령이 나라를 구한다.”
“미국의 정치권력이 대한민국의 위기를 막아줄 것이다.”
이런 언어가 반복되는 순간 정치가 종교화된다.
그리고 정치가 종교화되는 순간 교회는 가장 위험한 유혹에 빠진다.
정치적 메시아니즘이다.
정치적 메시아니즘이란 정치 지도자나 정치 세력을 마치 구원자처럼 바라보는 태도다.
역사에서 이것은 언제나 위험했다.
왕이 구원자가 되고, 국가가 구원자가 되고, 혁명이 구원자가 되고, 민족이 구원자가 되고, 이념이 구원자가 된다.
현대 민주주의에서는 대통령이 구원자의 자리를 차지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는 처음부터 그것을 거부해 왔다.
예수 가르침의 가장 급진적인 선언은 인간과 국가와 정치권력 가운데 어느 것도 궁극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이 계명은 교회 안에서만 적용되는 말이 아니다.
정치에도 적용된다.
국가도 우상이 될 수 있다.
민족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조차 우상이 될 수 있다.
미국도 우상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대통령도 우상이 될 수 있다.
우상은 반드시 돌이나 나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처럼 의지하는 순간 우상이 된다.
그렇다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교회가 지금 미국을 바라보는 방식은 무엇인가.
미국은 중요한 동맹국이다. 한미동맹은 한국의 안보와 외교에서 매우 중요한 현실이다.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전통과 헌정질서에서 배울 것도 많다.
그러나 미국은 하나님이 아니다.
백악관은 성전이 아니다.
미국 대통령은 선지자가 아니다.
백악관의 문이 열린다고 해서 하나님의 문이 열리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가 백악관 방문을 마치 무슨 영적 성취처럼 내세운다면, 우리는 그 행위가 무엇을 상징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왜 하필 백악관인가.
왜 세속 권력의 중심에 서는 것이 국가를 위한 중요한 신앙적 행위가 되는가.
왜 가장 강력한 정치권력의 인정이 교회의 메시지에 권위를 더해주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가.
목사가 백악관에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백악관에 갔다는 사실을 자신의 신앙적 권위와 정치적 영향력을 증명하는 훈장처럼 사용하는 것이 문제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의 오래된 유혹과 만난다.
교회는 언제나 권력을 원했다.
초대교회 이후 기독교가 제국의 종교가 되었을 때부터 이 유혹은 시작되었다.
교회가 세상의 권력을 얻으면 복음을 더 쉽게 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국가가 교회를 보호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더 빨리 이루어질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나 역사는 반복해서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착각인지를 보여주었다.
교회가 권력을 얻는 순간 권력은 교회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교회는 자신이 권력을 이용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권력의 언어를 배우게 된다.
숫자를 말한다.
세력을 말한다.
영향력을 말한다.
동원력을 말한다.
정치적 승패를 말한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복음의 언어를 잃어버린다.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정치권력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는데, 정작 변화된 것은 세상이 아니라 교회 자신일 수 있다.
교회가 정치의 언어를 닮아가는 것이다.
루터의 ‘두 왕국론’을 여기서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루터에게서 세속 정부와 교회의 역할은 동일하지 않았다. 국가는 세속적 질서를 담당하고 교회는 복음을 선포한다. 이것을 현대적 의미의 완전한 정교분리와 동일시해서는 안 되지만, 적어도 중요한 원칙 하나는 분명하다.
교회는 국가가 될 수 없고, 국가 역시 교회가 될 수 없다.
교회가 국가권력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는 순간 교회는 자신의 본질을 잃는다.
특정 정당을 하나님의 정당으로 만들고, 특정 대통령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고, 특정 국가를 자유의 성지로 만드는 순간 교회는 이미 복음보다 정치에 가까워진다.
왜냐하면 정치는 본질적으로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정권은 바뀐다.
대통령은 바뀐다.
정당은 흥망성쇠를 거듭한다.
국제질서도 변한다.
어제의 동맹이 내일의 경쟁자가 될 수도 있다.
그런데 교회가 특정 권력과 자신의 운명을 묶어버리면 그 권력이 무너지는 순간 교회의 신뢰도 함께 무너진다.
더 심각한 문제는 정치적 상대를 신앙의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여기서 한나 아렌트의 통찰이 중요하다.
아렌트가 전체주의와 정치적 극단주의를 분석하면서 보여준 것은 정치가 단순한 정바카라의 영역을 넘어 인간의 세계관 전체를 장악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문제였다.
정치가 선과 악의 절대적인 투쟁으로 변하면 상대방은 더 이상 정치적 경쟁자가 아니다.
그는 악이 된다.
그렇다면 타협은 배신이 된다.
대화는 타협주의가 된다.
상대방의 존재 자체가 국가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종교가 결합하면 상황은 더욱 위험해진다.
정치적 상대가 단순히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사람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이 순간 민주주의는 사라진다.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제도다.
그러나 정치가 종교화되면 상대방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제거해야 한다는 생각이 생긴다.
“우리가 옳고 저들은 악하다.”
“우리는 하나님 편이고 저들은 하나님을 대적한다.”
이 언어가 교회에서 정치적 구호가 되는 순간 기독교는 복음을 잃는다.
예수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로마 제국을 무너뜨리라고 명령하지 않았다.
예수는 정치권력의 중심으로 들어가 왕좌를 차지하지 않았다.
그가 찾아간 곳은 권력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 낮은 자리였다.
병든 자였다.
가난한 자였다.
죄인이라 불리던 사람들이었다.
슬롯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결국 십자가였다.
기독교 신앙의 가장 놀라운 역설은 여기에 있다.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의 권력과 가장 멀리 떨어진 십자가에서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로마의 군사력도 아니었다.
황제의 권력도 아니었다.
성전의 종교권력도 아니었다.
정치적 로비도 아니었다.
십자가였다.
그러므로 목회자의 무릎은 권력의 문턱에서 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꿇어야 한다.
이것은 목사가 정치에 관여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목사는 정치권력에 더 강하게 말해야 한다.
그러나 권력의 편에 서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앞에서 복음의 이름으로 말해야 한다.
“당신들의 정바카라이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만드는가.”
“당신들의 결정이 이주민과 약자에게 어떤 고통을 주는가.”
“당신들은 전쟁보다 평화를 선택하고 있는가.”
“경제적 이익보다 인간의 존엄을 앞세우고 있는가.”
이것이 예언자적 정치다.
예언자는 왕의 편에 서는 사람이 아니다.
왕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사람이다.
나단이 다윗에게 그랬다.
엘리야가 아합에게 그랬다.
세례 요한이 헤롯에게 그랬다.
그리고 예수는 당시의 종교권력과 정치권력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 일부에서는 예언자적 목회 대신 정치적 로비스트의 모습이 나타난다.
권력자에게 질문하기보다 권력자에게 접근한다.
권력자의 잘못을 비판하기보다 권력자의 힘을 이용하려 한다.
교회가 세속 권력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세속 권력의 인정을 통해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 한다.
이것은 신앙의 성공이 아니라 영성의 종속이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보여준 것도 바로 다른 길이었다.
본회퍼는 현실정치를 외면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치 독재에 맞서 자신의 신앙과 양심을 걸었다.
그러나 그의 저항은 권력을 얻기 위한 교회의 정치운동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음 때문에 권력에 저항한 것이었다.
기도와 행동이 분리되지 않았다.
그에게 기도는 현실로부터 도망치는 일이 아니었고, 현실정치는 하나님 없는 권력투쟁도 아니었다.
이 차이가 중요하다.
기도냐 정치냐가 아니다.
기도에서 나온 정치냐, 권력욕에서 나온 정치냐의 문제다.
그러므로 나는 “국가가 위기에 처했으니 백악관으로 가는 대신 산속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해야 한다”는 식의 단순한 이분법에도 만족하지 않는다.
목사는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기도만 하고 현실의 고통을 외면해서도 안 된다.
동시에 정치적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 목회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영성은 기도와 바카라임을 결합한다.
그러나 그 출발점은 언제나 하나님이어야 한다.
정치권력이 아니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의 문제는 정치에 관심을 가진다는 데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정치가 신앙을 지배하기 시작했다는 데 있다.
정치적 입장이 신앙의 정통성을 결정하고 있다.
어느 후보를 지지하느냐가 어느 교회에 속했느냐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정치적 구호가 복음보다 앞서고 있다.
국기와 성조기와 십자가가 한 공간에 함께 등장하면서 그것들이 동일한 신성성을 가진 것처럼 취급되는 순간도 있다.
그러나 십자가와 국기는 같은 것이 아니다.
태극기와 성조기도 같은 것이 아니다.
국가는 거룩하지 않다.
정당은 거룩하지 않다.
대통령도 거룩하지 않다.
오직 하나님만이 궁극적이다.
이것을 잊는 순간 기독교는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또는 정치이념과 결합한 새로운 종교가 된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나는 한국교회가 지금 이 질문 앞에 서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가, 아니면 하나님이 우리 편이라는 것을 믿는가.
둘은 전혀 다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자신이 틀릴 가능성을 인정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반드시 지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심문한다.
반면 “하나님은 우리 편”이라고 확신하는 순간 인간은 자신을 절대화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악마화한다.
그때 신앙은 가장 위험한 정치도구가 된다.
손현보 목사의 백악관 방문을 둘러싼 논란도 바로 이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
그가 미국 정치권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했는지를 따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왜 한국의 한 목회자가 미국의 정치권력과 연결되는 것을 자신의 신앙적 사명의 중요한 장면으로 제시하는가라는 질문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깊은 불안을 볼 수 있다.
정치권력에 대한 불안이다.
슬롯 변화에 대한 불안이다.
교회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그리고 그 불안을 정치적 힘으로 해결하려는 유혹이다.
그러나 교회가 영향력을 잃는 것이 반드시 교회가 실패했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복음은 언제나 세상의 권력과 다른 방식으로 작동해 왔다.
초대교회에는 로마의 백악관이 없었다.
제국의 후원도 없었다.
거대한 정치조직도 없었다.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 그리고 서로를 사랑하는 공동체였다.
그 작은 공동체가 결국 제국을 변화시켰다.
힘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힘이 없어도 복음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다시 물어야 할 질문도 이것이다.
교회가 왜 정치권력을 필요로 하는가.
교회가 왜 대통령의 지지를 필요로 하는가.
교회가 왜 백악관의 문을 열어야 자신의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고 생각하는가.
교회의 힘은 대통령의 악수가 아니다.
교회의 힘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교회의 힘은 정치적 동원력이 아니다.
교회의 힘은 사랑이다.
교회의 힘은 국가의 보호가 아니다.
교회의 힘은 십자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잊는 순간 교회는 가장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장 약해진다.
권력과 손잡은 교회는 당장은 강해 보인다.
그러나 권력이 사라지면 함께 흔들린다.
반면 권력 없이도 복음을 살아내는 교회는 약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것이 영성이다.
진짜 목사는 대통령을 만나 자신의 힘을 증명하는 사람이 아니다.
대통령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 선 한 인간으로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대통령에게도 “당신이 틀릴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세력에게도 “당신들이 잘못하면 우리는 당신들을 비판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이 속한 교회와 자신에게도 같은 잣대를 적용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목사의 무릎은 어디에서든 자유롭다.
백악관에서도 자유롭고, 청와대에서도 자유롭고, 교회에서도 자유롭다.
왜냐하면 그의 궁극적인 충성의 대상이 정치권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무릎은 하나님 앞에서만 꿇기 때문이다.
오늘 한국교회에 필요한 것은 더 강력한 정치적 목사가 아니다.
더 강력한 영성을 가진 목사다.
정치권력의 문을 두드리는 목사가 아니라 정치권력 앞에서도 복음을 말할 수 있는 목사다.
미국 대통령의 악수를 자랑하는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이웃의 손을 붙잡는 교회다.
정치적 세력을 과시하는 교회가 아니라 상처 입은 사람의 곁에 머무는 교회다.
백악관의 조명 아래에서 사진을 남기는 교회가 아니라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는 교회다.
그리고 그 골방에서 나온 사람이 세상으로 나가 권력자에게 복음을 말할 때, 그때 비로소 정치와 영성은 타락하지 않고 만날 수 있다.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교회가 정치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하다.
목사가 정치적 의견을 갖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목사가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는 것은 영적으로 위험하다.
미국과 동맹을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미국을 구원자의 자리에 올려놓는 순간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우상숭배가 된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자유민주주의를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는 순간 정치가 종교가 된다.
그래서 나는 묻는다.
오늘 한국교회는 누구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권력인가.
복음인가.
아니면 정치적 이념인가.
십자가인가.
아니면 백악관인가.
목사의 무릎은 원래 권력의 문 앞에 놓여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앞에 놓여 있어야 한다.
그 무릎으로 기도하고,
그 무릎으로 낮아지고,
그 무릎으로 약자의 상처를 바라보고,
그 무릎으로 다시 일어나 권력 앞에 복음을 말해야 한다.
그것이 영성이다.
그것이 목회다.
그리고 그것이 정치에 무릎 꿇지 않는 교회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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