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숙이 올바른 역사 인식을 찾는 때가 오기를 바란다
역사는 성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말 자체는 틀리지 않다. 어떤 역사적 사건도 연구와 비판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는 없다. 새로운 자료가 나오면 기존의 해석은 수정되어야 하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진실이 있다면 끝까지 추적해야 한다. 민주주의 슬롯에서 이것은 상식에 가깝다.
그러나 여기서 반드시 물어야 한다. 역사가 성역이 아니라는 말은 역사적 사실도 성역 없이 부정할 수 있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역사에 대한 연구의 자유와 역사적 사실을 왜곡할 자유는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역사학은 사실을 더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 기존의 통념을 의심하는 것이지, 이미 확인된 사실을 정치적 필요에 따라 다시 허구와 동일한 위치에 올려놓는 것이 아니다.
최근 이진숙 국민의힘 의원이 국회도서관에서 개최한 '5·18 민주화운동의 재조명 국회 공개포럼'은 바로 이 경계를 우리 슬롯에 다시 묻고 있다. 이 의원은 5·18이 특정 진영의 소유물이 되어서는 안 되며 '성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표현의 자유와 학문의 자유를 위해서라도 다른 역사적 해석을 검토할 수 있어야 한다는 논리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그 포럼에서 실제로 무엇이 논의됐는가. 그리고 누가 그 논의를 이끌었는가.
공동 주최자는 이진숙 의원과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가 공동대표로 있는 새역사국민운동이었다. 이영훈은 이날 5·18을 단순한 과거사가 아니라 현재 한국 정치를 지배하는 '문화 권력'으로 규정하면서 기존의 5·18 서사를 강하게 비판했다. 다른 발제자들 사이에서는 5·18을 '소요 사태'로 규정하는 주장까지 나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 허화평이 등장했다.
허화평은 1979년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비서실장이었고 12·12 군사반란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12·12 및 5·18 관련 사건으로 기소돼 대법원에서 징역 8년이 확정됐다. 그런 인물이 국회도서관 대강당의 첫 줄에 앉아 포럼 자료집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주최 측은 초청하지 않았고 본인이 왔다고 설명했지만, 그 장면 자체가 이번 행사의 정치적 의미를 훨씬 무겁게 만든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여기에서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은 정말 역사학적 토론인가. 아니면 정치적 기억의 전쟁인가.
나는 후자의 성격이 훨씬 강하다고 본다.
5·18을 다시 연구하자는 말 자체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더 연구해야 한다. 발포 명령은 누구에게서 시작됐는가. 군 지휘체계는 어떻게 움직였는가. 미국은 당시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 시민들의 무장은 어떤 과정에서 발생했는가. 계엄군의 진압 과정에서 정확히 어떤 명령이 내려졌는가. 사망자와 행방불명자는 얼마나 되는가. 암매장 의혹 가운데 확인된 것은 무엇이며 확인되지 않은 것은 무엇인가.
이 모든 질문은 끝까지 가야 한다.
5·18에 관한 진상규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상규명이 끝나지 않았다는 말과 5·18의 역사적 성격 자체가 불확실하다는 말은 전혀 다르다.
대한민국은 이미 5·18에 대해 수십 년 동안 조사하고 법적 판단을 내려왔다. 12·12 군사반란과 5·18 당시의 헌정질서 파괴에 대해서는 사법적 판단도 존재한다. 1995년 특별법이 제정됐고, 이후 국가 차원의 진상규명 작업도 이어졌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일은 '5·18이 민주화운동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을 1980년으로 되돌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확인된 사실 위에서 아직 밝혀지지 않은 사실을 더 밝혀내는 것이다.
이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면 역사학은 곧 정치 선전으로 변질된다.
역사를 다시 연구하는 것과 역사를 다시 정치적으로 만드는 것은 다르다.
이번 포럼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5·18이 성역인가'라는 질문은 그럴듯하다. 그러나 질문 자체에 함정이 있다. 마치 지금 대한민국에서 누구도 5·18에 대해 연구하거나 비판할 수 없는 것처럼 전제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5·18은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연구되어 왔다. 학자들은 서로 다른 자료를 놓고 논쟁했고, 새로운 증언과 문서가 발견될 때마다 기존의 설명도 수정됐다. 국가기관 역시 진상규명을 진행했다.
그렇다면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5·18에 대한 연구가 금지되어 있는가? 아니면 특정한 정치적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연구라는 이름이 동원되고 있는가.
두 질문은 전혀 다르다.
학문의 자유를 말하려면 최소한 학문적 태도를 보여야 한다. 반대되는 자료를 함께 검토하고,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도 공개하고, 자료의 출처와 신뢰도를 검증하고, 기존 연구의 성과를 반박할 때는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그런데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5·18은 소요였다', '광주를 해방해야 한다', '좌파가 5·18의 문화 권력을 독점했다'는 식의 정치적 언어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학문의 자유라기보다 역사정치에 가깝다. 실제 행사에서도 이런 주장이 등장했고 이에 항의하는 참석자들과 물리적 충돌까지 벌어졌다.
더구나 국회라는 공간의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국회는 어떤 주장이든 아무렇게나 붙여놓는 정치적 스피커가 아니다. 국민을 대표하는 헌법기관이다. 국회도서관에서 개최되는 포럼에는 그 공간이 가진 상징적 권위가 따라붙는다.
따라서 국회의원이 특정 역사관을 토론의 장으로 가져오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지만, 그 역사관이 무엇이며 누구와 함께 그것을 제기하는지는 당연히 정치적으로 검증받아야 한다.
특히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 사건으로 유죄가 확정된 인물이 그 자리에 등장했다면 더욱 그렇다.
그렇다고 허화평에게 말할 권리가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에게도 말할 자유는 있다.
그러나 말할 자유와 그 말이 역사적 진실과 동등한 권위를 갖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전두환 정권의 핵심 인물이 자신의 역사를 말할 자유는 보장하되, 그의 주장을 역사적 사실과 동일한 무게로 받아들일 의무는 국민에게 없다.
오히려 민주주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작동한다.
말할 자유는 보장하되, 말의 진실성은 검증한다.
이것이 자유주의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정치에서는 이 두 가지가 자주 뒤섞인다.
'내가 말할 자유가 있다'는 것이 어느 순간 '내 말도 사실이다'로 바뀐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 '내 주장을 반박하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다'라는 논리로 변한다.
이것이야말로 위험한 논리다.
표현의 자유는 비판받지 않을 권리가 아니다.
표현의 자유는 말할 권리이지, 믿게 만들 권리가 아니다.
학문의 자유 역시 마찬가지다.
학문의 자유는 엉터리 주장을 학문이라고 부를 수 있는 면허가 아니다.
오히려 학문의 자유는 가장 엄격한 검증을 감당하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나는 '5·18은 성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을 이렇게 되돌려주고 싶다.
맞다. 5·18은 성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5·18을 비판하는 주장 역시 성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주장도 똑같이 검증받아야 한다.
자료를 내놓아야 한다.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반대 증거에 답해야 한다.
학계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국민 앞에서 공개적으로 바카라임져야 한다.
그것이 진짜 역사 논쟁이다.
여기에서 홍준표의 반응은 매우 흥미롭다.
홍준표 전 대구시장은 이번 논쟁을 비판하며 5·18을 부정하거나 폄훼하는 것은 시대정신에 맞지 않는다는 취지의 입장을 밝혔다. 이는 단순히 홍준표 개인의 정치적 호불호를 넘어 한국 보수주의 내부에서 벌어지는 중요한 균열을 보여준다.
한국 보수의 가장 큰 문제는 과거의 모든 것을 긍정하는 것이 보수라고 착각하는 데 있다.
그러나 보수주의는 과거 숭배가 아니다.
보수주의의 핵심은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위해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를 판단하는 데 있다.
에드먼드 버크가 말한 보수주의도 결국 공동체의 역사와 제도를 보존하면서 점진적으로 개선하는 태도였다. 그렇다면 보수주의가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을 보존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대한민국이 저지른 잘못도 대한민국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국가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인정하는 것이 국가를 부정하는 것인가.
아니다.
오히려 국가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 국가는 민주공화국이 된다.
독일이 나치의 범죄를 인정한다고 독일이라는 국가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치의 범죄를 직시했기 때문에 전후 독일 민주주의의 정당성이 강화됐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5·18을 인정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5·18의 국가폭력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도와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것이야말로 대한민국을 지키는 일이다.
따라서 전두환을 비판한다고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5·18의 국가폭력을 인정한다고 좌파가 되는 것도 아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보수는 보수가 아니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향수일 뿐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민주당과 진보 진영에도 있다.
5·18을 정치적 성역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5·18은 민주당의 소유물이 아니다.
광주의 희생자들이 특정 정당의 정치적 자산이 되어서는 안 된다.
5·18은 민주당의 역사도 아니고 진보 진영의 역사도 아니다.
대한민국 국민 전체의 역사다.
그러므로 민주당 역시 5·18에 관한 모든 새로운 연구를 환영해야 한다. 진상규명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새로운 사실이 기존의 민주화운동 서사를 수정해야 한다면 수정해야 한다.
그것이 오히려 5·18을 강하게 만드는 길이다.
5·18이 진실이라면 진실은 검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실은 토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실은 새로운 자료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실은 끝까지 가도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역사적 사실을 두려워하는 쪽은 언제나 진실보다 정치적 서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나 아렌트의 '사실적 진실'을 떠올릴 필요가 있다.
아렌트가 전체주의와 현대 정치의 위험을 분석하면서 경고한 것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었다. 더 위험한 것은 사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드는 정치였다.
사실을 없애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실을 금지하는 것만이 아니다.
수많은 주장 가운데 하나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국가가 시민을 학살했다는 사실과 '누군가는 그것을 소요라고 생각한다'는 주장을 같은 수준에 놓으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 모든 것이 의견이 된다.
그 순간 역사적 사실은 사라진다.
'당신의 진실'과 '나의 진실'만 남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장 큰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역사를 차지한다.
오늘날 소셜미디어와 팬덤 정치가 위험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가 사실을 요구하지 않고 충성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자료를 보지 않는다.
누가 말했는지를 본다.
어느 진영에서 말했는지를 본다.
그리고 자신의 진영이 말하면 사실이고 상대 진영이 말하면 가짜뉴스가 된다.
5·18까지 이런 팬덤 정치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
5·18은 진보의 신성한 교리가 되어서도 안 되고, 보수의 금지된 역사로 남아서도 안 된다.
5·18은 역사학의 대상이어야 한다.
그리고 역사학은 정치보다 강해야 한다.
정치인은 임기가 끝나지만 기록은 남는다.
정권은 바뀌지만 문서는 남는다.
정당은 사라지지만 증언과 유해와 사진과 판결문은 남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치인의 말보다 자료를 봐야 한다.
정당의 논평보다 법원의 판결을 봐야 한다.
유튜브의 분노보다 사료를 봐야 한다.
팬덤의 박수보다 증거를 봐야 한다.
그것이 역사 인식을 회복하는 첫걸음이다.
이번 사태에서 국민의힘이 보여준 태도 역시 뼈아프다. 당 지도부가 이진숙 의원의 포럼을 부적절하다고 만류했지만 행사는 결국 열렸다. 당이 국회의원 한 사람의 행동을 막을 수 없었다는 해명도 나왔다.
그러나 국민의힘이 정말 보수정당이라면 여기에서 더 분명한 입장을 내놓아야 한다.
5·18에 관한 자유로운 연구를 보장하라.
그러나 12·12 군사반란과 국가폭력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는 것을 보수의 이름으로 정당화하지 말라.
그리고 무엇보다 전두환의 복권을 꿈꾸는 세력과 거리를 두라.
이것은 진보에 대한 양보가 아니다.
보수의 자기정화다.
보수에게 필요한 것은 전두환의 복권이 아니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복권이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강력한 국가를 그리워할 것이 아니라 자유와 법치와 헌정질서를 지키는 강한 민주국가를 만들어야 한다.
지금 한국 보수에게 필요한 것은 1980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2026년의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인구가 줄고 있다.
지방이 무너지고 있다.
청년은 미래를 믿지 못한다.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는 커지고 있다.
AI가 노동과 교육의 질서를 바꾸고 있다.
복지국가의 재정은 압박받고 있다.
세계질서는 급변하고 있다.
그런데 정치권은 46년 전의 역사를 다시 꺼내 서로 싸운다.
이것이야말로 한국 정치의 비극이다.
미래를 설계할 능력이 없을수록 정치인은 과거의 적을 소환한다.
오늘의 경제 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없으면 박정희를 불러낸다.
오늘의 민주주의 문제를 해결할 자신이 없으면 전두환을 불러낸다.
오늘의 슬롯통합을 할 능력이 없으면 광주와 반공을 불러낸다.
과거는 정치적으로 너무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미 죽은 사람들은 반박할 수 없고, 역사적 상징은 팬덤을 결집시키기 쉽다.
그러나 국가의 미래를 만드는 데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5·18을 더 이상 말하지 말자'가 아니다.
정반대다.
5·18에 대해 더 많이 말하자. 더 깊이 연구하자. 더 엄격하게 검증하자. 더 많은 자료를 공개하자. 그리고 끝까지 가자.
누가 발포를 명령했는지 끝까지 가자.
누가 바카라임을 회피했는지 끝까지 가자.
누가 거짓말을 했는지 끝까지 가자.
사라진 사람들의 행방을 끝까지 추적하자.
국가 기록의 누락과 은폐가 있었다면 끝까지 밝혀내자.
당시 시민들의 행동에 잘못이 있었다면 그것 역시 사실대로 기록하자.
군의 피해도 기록하자.
시민의 피해도 기록하자.
그 과정에서 기존의 민주화운동 서사가 수정되어야 한다면 수정하자.
그러나 그 모든 작업의 목적은 5·18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5·18의 진실에 더 가까이 가는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역사학이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그리고 이것이 진정한 자유다.
그러므로 나는 이진숙 의원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5·18이 성역이냐고? 아니다.
5·18은 성역이 아니다.
그러므로 더 철저하게 조사해야 한다.
더 엄격하게 연구해야 한다.
더 많은 자료를 공개해야 한다.
더 많은 반론을 허용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묻자.
5·18을 부정하는 주장 역시 성역이 될 수 있는가?
그것 역시 아니다.
그 주장도 똑같이 검증받아야 한다.
그리고 검증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역사는 어느 정당의 소유도 아니다.
광주의 역사도 민주당의 소유가 아니다.
5·18의 기억을 독점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역사의 진실까지 정치적 취향에 따라 나눠 가질 수도 없다.
역사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가 바카라임져야 할 유산이다.
그래서 올바른 역사 인식을 찾는 일은 끝까지 가야 한다.
어제의 진실에 만족해서도 안 된다.
오늘의 정치적 필요 때문에 진실을 뒤집어서도 안 된다.
내 진영에 유리한 진실만 선택해서도 안 된다.
불편하더라도 사실이면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믿었던 역사관이 틀렸다면 버릴 수 있어야 한다.
상대 진영이 제시한 자료라도 사실이라면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성숙한 민주주의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5·18은 한국 민주주의의 시험대가 된다.
5·18을 끝까지 연구할 수 있는 슬롯인가.
동시에
5·18을 정치적으로 왜곡하지 않고 사실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슬롯인가.
이 두 질문에 모두 '예'라고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5·18을 넘어설 수 있다.
망각해서가 아니라 기억했기 때문에.
침묵해서가 아니라 끝까지 물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신화를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끊임없이 검증했기 때문에.
그리고 마침내 역사 앞에서 진영보다 진실을 선택했기 때문에.
5·18은 성역이 아니다.
그러나 진실은 성역보다 훨씬 강하다.
그리고 진실을 찾는 일은 끝까지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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