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 정치로부터의 도피가 필요한가
정치에 무관심한 슬롯는 위험하다. 그러나 정치에 지나치게 몰입한 슬롯 역시 위험하다.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것은 시민의 정치 참여이지, 정치가 인간의 삶 전체를 점령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 슬롯에서 우리가 마주한 것은 단순한 정치적 양극화가 아니다. 더 근본적인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정치가 일상의 모든 영역으로 침투하고 있다. 누구를 지지하는가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정치적 입장이 인간관계의 경계를 만들며, 상대방의 정바카라을 비판하는 것을 넘어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의심한다. 한겨레21이 이를 ‘하이퍼정치’라는 개념으로 포착한 것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기사 역시 하이퍼정치의 동력을 자기표현, 도덕적 열정, 파편화된 정체성 등에서 찾는다.
그렇다면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우리는 정치에 더 참여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정치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정치 혐오나 정치적 무관심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필요한 질문이다.
정치는 원래 인간의 삶을 위한 수단이다. 그런데 하이퍼정치에서는 정치가 목적이 된다. 정치가 경제보다 중요하고, 정치가 종교보다 중요하고, 정치가 문화보다 중요하고, 심지어 인간관계보다 중요해진다. 친구와 가족 사이에서도 정치적 입장이 중요해지고, 교회에서도 정치적 성향이 신앙의 진정성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언론은 시민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공간이 아니라 진영의 전쟁터가 된다.
이 순간 정치의 본래 의미가 뒤집힌다.
사람이 정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가 사람을 규정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하이퍼정치의 첫 번째 함정이다.
정치가 이렇게 강해진 데에는 디지털 미디어의 구조도 크게 작용한다. SNS는 숙고보다 즉각적인 반응을 보상한다. 복잡한 정바카라보다 짧고 자극적인 문장이 살아남는다. 상대방의 주장을 이해하는 것보다 상대방을 조롱하는 것이 더 빠르게 확산된다. 정치인은 정바카라을 설명하는 사람에서 자신의 지지층에게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는 정치적 인플루언서로 변하고, 시민은 유권자에서 팔로워로 변한다.
그 결과 정치적 참여는 증가하는데 정치적 숙의는 오히려 감소한다.
이것은 매우 기묘한 역설이다.
정치에 관한 말은 넘쳐나는데 정치에 관한 생각은 점점 사라진다.
왜 그런가.
생각에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주장을 이해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자신의 생각이 틀렸을 가능성을 인정하려면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팬덤 정치가 요구하는 것은 생각이 아니라 충성이다.
“당신은 어느 편인가?”
이 질문 하나면 충분하다.
정바카라의 내용은 부차적이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 편인가 아닌가이다. 우리 편이면 같은 발언도 용납되고, 상대편이면 같은 발언도 악의 증거가 된다.
그래서 하이퍼정치는 결국 정치의 도덕화를 가져온다.
정치적 반대자가 단순히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악한 인간으로 규정된다. 그러면 타협은 배신이 되고, 중도는 기회주의가 되며,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태도는 변절로 취급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민주주의는 매우 위험해진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우리가 서로를 좋아하기 때문에 함께 사는 것이 아니다. 서로 싫어하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더라도 함께 살아갈 제도를 만드는 것이다.
알렉시 드 토크빌이 민주주의에서 결사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시민들은 국가와 개인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자발적 결사체를 통해 서로 협력하는 법을 배운다. 로버트 퍼트넘이 훗날 이를 슬롯적 자본의 문제로 발전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하이퍼정치는 이 중간 영역을 파괴한다.
교회도 정치적 진영이 되고, 대학도 정치적 진영이 되고, 시민단체도 정치적 진영이 되고, 언론도 정치적 진영이 되고, 온라인 커뮤니티도 정치적 진영이 된다.
그 결과 인간이 정치 이외의 방식으로 서로 만날 공간이 줄어든다.
이것이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현상이다.
정치가 너무 강해진 것이 아니라 슬롯가 너무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팬덤 정치 역시 여기에서 등장한다. 정치 팬덤은 시민 참여의 한 형태라는 점에서 무조건 악이라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정치적 팬덤이 시민의 참여를 활성화하고 정치적 효능감을 높이는 측면도 존재한다. 하지만 팬덤이 정치적 판단을 대신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달라진다. 최근 한국 정치에서 팬덤이 당내 갈등과 의사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상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위험한 것은 팬덤이 정치인을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을 보호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민주주의에서 시민은 정치인을 지지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감시해야 한다. 정치인이 잘못하면 지지자일수록 더 엄격하게 비판해야 한다.
그러나 팬덤에서는 그 반대가 일어난다.
지도자를 비판하면 적이 되고, 적에게 공격받으면 지도자를 더욱 강하게 방어한다. 정치인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사실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진영에 대한 충성심의 문제가 된다.
그렇게 정치인은 유권자를 설득할 필요가 없어진다.
자신의 팬덤만 붙잡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슘페터가 생각했던 민주주의의 정치적 경쟁과도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민주주의가 정치 지도자들의 경쟁이라면, 그 경쟁은 궁극적으로 시민의 선택을 얻기 위한 경쟁이어야 한다. 그러나 팬덤 정치에서는 시민 전체를 설득하는 대신 핵심 지지층을 자극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그래서 정치의 언어가 점점 과격해진다.
타협보다 결집이 중요하고, 설득보다 공격이 중요하고, 정바카라보다 적이 중요해진다.
적이 강할수록 팬덤은 강해진다.
여기서 정치의 가장 오래된 유혹이 되살아난다.
공동의 적을 만들어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적을 통해 결집한 공동체는 적이 사라지면 내부의 적을 찾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야당이 적이지만, 어느 순간 같은 당의 다른 계파가 적이 된다. 그다음에는 같은 계파 안에서 노선이 다른 사람이 적이 된다.
그래서 하이퍼정치는 외부의 적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결국 내부의 적을 만들어낸다.
정치가 극단으로 갈수록 가장 먼저 사라지는 사람들은 정치적 무관심층이 아니다. 오히려 중간에 있는 사람들이다.
중간에 있는 사람들은 양쪽에서 의심받는다.
보수에게는 좌파라고 불리고, 진보에게는 보수라고 불린다. 양쪽 모두에게 배신자로 취급될 수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이들은 사실 가장 중요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는 극단적인 사람들의 열정만으로 운영되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능력이 민주주의의 진짜 토대다.
그래서 이제 ‘정치로부터의 도피’를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치로부터 도피한다고 해서 투표하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시민권을 포기하자는 것도 아니다. 슬롯적 문제에 관심을 갖지 말자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정치로부터 잠시 물러남으로써 정치가 아닌 것들을 다시 회복하자는 것이다.
가족과 밥을 먹으면서 정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자유.
친구가 나와 다른 정당을 지지해도 친구로 남을 자유.
교회에 가서 정치적 성향을 증명하지 않을 자유.
온라인 게임에서 상사의 정치적 성향을 추측하지 않을 자유.
대학에서 정치적 입장 때문에 사람을 평가하지 않을 자유.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어느 진영에 속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자유.
이것은 정치적 무관심이 아니다.
나는 이것을 민주주의적 거리두기라고 부르고 싶다.
정치에 참여하되 정치에 포획되지 않는 것. 정당을 지지하되 정당의 논리를 자신의 양심보다 앞세우지 않는 것. 정치인을 지지하되 정치인을 우상화하지 않는 것. 상대 진영을 비판하되 상대방을 인간으로서 인정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성숙한 시민의 태도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이 정치의 세계는 서로 다른 인간들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이다. 따라서 차이를 없애는 것이 정치의 목표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차이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정치의 본령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다름을 제거하고 있다.
다른 의견을 견디지 못하고, 다른 언어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기억을 인정하지 못한다.
결국 상대방을 설득하는 대신 상대방이 사라지기를 원한다.
이것은 정치의 승리가 아니다.
정치의 실패다.
지금 한국 슬롯에 필요한 것은 정치에 대한 더 큰 열광이 아니다. 오히려 정치가 인간의 삶에서 차지하는 자리를 적절한 크기로 되돌리는 일이다.
경제는 경제의 논리로, 교육은 교육의 논리로, 종교는 종교의 논리로, 문화는 문화의 논리로, 인간관계는 인간관계의 논리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슬롯는 자유로운 슬롯가 아니다.
정치가 아닌 영역이 충분히 존재하는 슬롯가 자유로운 슬롯다.
그러므로 우리가 던져야 할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정치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아니다.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이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치가 나의 인간성을 대신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가?”
하이퍼정치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정치의 포기가 아니다.
정치의 절제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가장 급진적인 시민적 행동은 거리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정치적 소음에서 한 걸음 물러나 정치가 아닌 삶을 다시 살아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치를 사랑하되 정치에 중독되지 않는 것.
정치인을 지지하되 그에게 자신의 양심을 맡기지 않는 것.
진영을 선택하되 인간을 진영보다 앞세우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나와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능력을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것이 하이퍼정치의 시대에 민주주의를 지키는 가장 어려운 저항일 것이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