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당제와 팬덤정치를 극복한 생활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위기는 정치인이 무능해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더 근본적인 위기는 시민이 정치를 포기할 때 시작된다. 선거 때마다 투표는 하지만 정치에는 참여하지 않는다. 정당에 가입하지 않고,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람을 모으지도 않는다. 정치인을 비판하면서도 정치가 자신의 삶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정치가 잘못되면 다시 정치인을 욕한다.
이 이상한 악순환을 깨뜨리는 질문이 있다.
정치는 왜 반드시 직업 정치인에게만 맡겨야 하는가.
최근 헝가리의 ‘두 개의 꼬리를 가진 강아지당’이 보여주는 실험은 이 질문을 가볍게 넘길 수 없게 만든다. 농담과 풍자로 출발한 정당이 실제 선거에 참여하고, 지방의회에 진출하고, 주민들과 함께 놀이터와 공공시설을 개선하며, 지역의 생활 문제를 해결한다. 처음에는 정치의 허위를 조롱하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실제 정치의 주체가 된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웃긴 정당’의 성공담이 아니다. 현대 민주주의가 잃어버린 것을 되찾으려는 하나의 실험이다. 그것은 바로 시민의 정치적 행위 능력이다.
한국 정치의 문제를 생각할 때 이 사례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의 정치는 지나치게 정치인 중심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치인과 정당,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언론과 팬덤이 정치의 대부분을 독점한다. 시민은 그 정치의 관객이 된다. 선거철이면 후보의 유세를 보고, 유튜브 영상을 보고, 여론조사를 보고, 댓글을 달고, 서로 싸운다. 그러나 정작 자신의 동네에서 무엇을 바꿀 것인가를 놓고 다른 시민들과 함께 행동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정치는 국가적이고 거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하다. 대통령, 국회, 검찰, 사법부, 부동산, 외교, 안보, 정권의 운명. 정치는 언제나 이런 거대한 단어로 말해진다. 그러나 시민의 삶은 훨씬 작고 구체적이다. 집 앞의 보행로가 위험하고, 아이들이 갈 놀이터가 부족하고, 노인들이 버스를 타기 어렵고, 동네 상권이 무너지고, 쓰레기가 쌓이고, 청년들이 지역을 떠난다.
정치가 시민의 삶에서 멀어지는 순간 정치에는 거대한 말만 남는다. 그리고 거대한 말이 현실을 바꾸지 못하면 시민에게는 냉소가 남는다. 그래서 자포자기한 시민이 같은 냉소주의에 빠지게 된다.
“정치인은 다 똑같다.”
“누가 정권을 잡아도 달라지는 게 없다.”
“정치에 관심 가져봐야 소용없다.”
이 냉소는 특정 정당의 문제가 아니다. 보수와 진보를 가리지 않는다. 오히려 한국 양당제가 깊어질수록 냉소도 역설적으로 강화될 수 있다.
양당제의 가장 큰 위험은 두 정당이 경쟁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다. 문제는 시민에게 선택지가 ‘우리 편이냐, 저쪽 편이냐’로 축소되는 것이다.
정치는 정바카라의 경쟁이 아니라 진영의 경쟁이 된다.
상대방의 실패가 나의 성공이 되고, 상대방의 몰락이 나의 승리가 된다. 그러면 정치의 목적도 바뀐다. 무엇을 잘할 것인가보다 상대방을 어떻게 무너뜨릴 것인가가 중요해진다. 정바카라보다 정체성이 강해진다. 논쟁보다 충성이 중요해진다. 사실보다 진영의 해석이 중요해진다. 그리고 여기서 팬덤정치가 등장한다.
팬덤정치는 정치적 지지를 넘어선다. 팬덤은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인을 둘러싼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한다. 그 세계관 안에서는 지도자의 실수조차 상대 진영의 음모로 설명될 수 있다.
이때 정치인은 더 이상 시민의 대표가 아니다. 오히려 시민이 정치인의 방어자가 된다. 이것은 민주주의의 순서를 뒤집는 일이다.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은 시민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팬덤정치에서는 시민이 정치인을 위해 존재하기 시작한다. 정치인이 비판받으면 지지자들이 달려가 방어하고, 정바카라 실패가 발생하면 바카라임을 묻기보다 상대 진영을 공격한다. 정치는 대표의 제도가 아니라 응원단의 전쟁터가 된다.
이 구조에서 가장 손해를 보는 세대가 청년일 가능성이 높다. 청년에게 정치는 이미 지나치게 오래된 언어로 말한다. 기성세대 정치인은 민주화, 산업화, 이념, 지역, 정권교체 같은 거대한 역사적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청년이 매일 고민하는 것은 취업, 주거, 결혼, 출산, 교육비, 노동시장, 자산 격차, 지역 소멸, AI로 인한 일자리 변화다.
그런데 정치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서도 청년에게 정치적 열정을 요구하면 청년은 오히려 정치에서 멀어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청년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단순한 진단을 버리는 것이다. 어쩌면 청년은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아니라 기성 정치의 문법에 관심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청년이 정치에 참여하지 않는다면 정치가 청년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바꿔야 한다. 정치가 청년을 훈계할 것이 아니라 청년이 실제로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SNS와 AI는 단순한 정치 홍보 수단이 아니다. 잘 활용한다면 정치의 진입장벽 자체를 낮추는 기술이 될 수 있다.
과거에는 정당을 만들려면 돈이 필요했다. 사무실이 필요했고, 조직이 필요했고, 신문과 방송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해야 했다. 정치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높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스마트폰 하나로 영상을 만들 수 있고, SNS에서 정치적 메시지를 확산할 수 있으며, AI를 이용해 자료를 분석하고 정바카라을 비교하고 토론 자료를 만들 수 있다. 소규모 시민 모임도 과거의 거대 조직 못지않은 정보와 소통 능력을 가질 수 있다. 이것은 정치의 민주화를 한 단계 더 밀어붙일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위험한 양날의 검이기도 하다. SNS는 시민을 정치의 주체로 만들 수도 있지만 정치적 부족주의를 강화할 수도 있다. AI는 시민의 정보 접근성을 높일 수도 있지만 가짜뉴스와 딥페이크를 대량 생산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기술이 민주주의를 자동으로 발전시키는 것은 아니다. 기술은 민주주의의 방향을 결정하지 않는다. 시민의 정치문화가 기술의 방향을 결정한다.
AI 시대의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능력은 어쩌면 정보를 많이 생산하는 능력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무엇이 사실인지 확인하고, 다른 의견을 견디고, 자신의 진영에도 질문을 던지고, 필요하다면 자신의 판단을 수정하는 능력이다. 이것은 정치적 성숙의 문제다.
여기서 다시 토크빌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토크빌은 민주주의의 건강을 단순히 헌법이나 선거제도에서 찾지 않았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결사하고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는 습관을 중요하게 보았다.
이 관점에서 보면 민주주의의 가장 작은 단위는 국회가 아니다. 동네의 시민 모임일 수 있다. 공원을 어떻게 만들 것인지 논의하는 주민들, 학교 앞 교통 문제를 해결하려는 학부모들, 지역의 노인 돌봄을 고민하는 시민들, 청년들이 지역에서 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 이들이 함께 문제를 발견하고, 토론하고, 해결바카라을 만들고, 지방정부에 요구하고, 필요하면 직접 실행한다면 그것 역시 정치다. 오히려 이것이 정치의 원형에 가깝다.
로버트 퍼트넘이 말한 슬롯적 자본 역시 여기서 중요해진다. 민주주의는 법과 제도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신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 슬롯에서 신뢰는 빠르게 고갈되고 있다. 온라인에서는 상대방을 쉽게 적으로 규정한다. 정치적 의견이 다르면 인간 자체를 부정한다. 선거가 끝나도 선거는 끝나지 않는다. 댓글과 유튜브와 커뮤니티에서 정치적 전쟁은 계속된다. 이런 슬롯에서는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어렵다.
민주주의는 상대방을 사랑하는 제도가 아니다. 상대방을 싫어하더라도 함께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제도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핵심은 만장일치가 아니다. 불일치를 관리하는 능력이다. 한국 정치가 회복해야 할 것도 바로 이것이다.
정치인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정치를 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 정당도 시민에게 선거 때만 찾아가는 조직이 아니라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플랫폼이 되어야 한다. 국회의원도 자신의 의정활동을 홍보하는 데 그치지 말고 지역 시민이 직접 정바카라을 제안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지방정치는 더욱 과감하게 시민에게 열어야 한다. 주민참여예산을 형식적인 절차로 만들 것이 아니라 실제 권한을 줘야 한다. 지역별로 시민들이 직접 정바카라을 제안하고 우선순위를 정하고 결과를 평가하도록 해야 한다.
정당 밖에서도 정치가 가능해야 한다. 이것이 중요하다. 시민이 정치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정당에 가입해야 한다는 생각부터 바꿔야 한다. 한 달에 한 번 지역 문제를 논의하는 시민 모임도 정치다. 온라인에서 정바카라을 검증하는 시민 플랫폼도 정치다. AI를 이용해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을 분석하는 시민 프로젝트도 정치다. 청년들이 지역의 교통 문제를 조사해 지방의회에 정바카라을 제안하는 것도 정치다. 그리고 동네의 낡은 벤치를 직접 고치는 것도 넓은 의미에서는 정치다. 정치란 결국 공동의 삶을 어떻게 만들어갈 것인가를 결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치의 가장 큰 적은 정치적 무관심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정치의 외주화다. “정치는 정치인이 알아서 하겠지.” 이 한마디가 민주주의를 가장 편리하게 무너뜨린다.
정치를 정치인에게 맡기고 시민은 관객이 된다. 관객은 박수를 치거나 야유를 보낼 수 있지만 무대 자체를 만들 수는 없다. 반대로 시민이 정치의 무대에 올라오면 정치인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정치인은 더 이상 신성한 지도자가 아니다. 시민의 고용인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시민은 소비자가 아니라 공동체의 공동 경영자가 된다. 이것이 헝가리의 작은 풍자정당이 한국 정치에 던지는 가장 큰 질문이다.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정치가 진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지함과 권위는 같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나치게 근엄한 정치가 가장 비민주적일 수 있다. 권력을 웃음의 대상으로 만들 수 없는 슬롯는 권력을 비판하기 어렵다. 그래서 정치에는 때때로 광대가 필요하다. 왕의 옷이 얼마나 우스운지를 말해주는 사람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광대가 왕이 되는 순간에도 스스로를 웃음의 대상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민주주의다.
한국 정치에도 새로운 정치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거대한 구호보다 작은 실천을, 정치인의 팬덤보다 시민의 결사를, 진영의 승리보다 지역의 문제 해결을, 일방적인 선동보다 토론과 검증을, 정치 소비보다 정치 참여를 복원해야 한다. AI와 SNS는 이 변화를 가능하게 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결정하는 것은 기술이 아니다.
시민이 다시 정치의 주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정치인을 소비하는 관객으로 남을 것인가. 민주주의는 4년이나 5년에 한 번 투표소에서 완성되는 제도가 아니다. 매일 누군가와 공동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서로 다른 의견을 듣고, 타협하고, 작은 문제라도 함께 해결하는 과정 속에서 민주주의는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이제 질문을 바꿔야 한다.
“어느 정치인이 우리를 구해줄 것인가?”
그 질문은 너무 오래됐다.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 공동체를 위해 무엇을 직접 할 것인가?”
정치를 정치인에게만 맡기지 않는 순간, 시민은 다시 민주주의의 주체가 된다. 그리고 어쩌면 한국 민주주의가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또 하나의 강력한 정치 지도자가 아닐지도 모른다. 자신이 정치의 주체라는 사실을 다시 발견하는 수많은 평범한 시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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