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과 사목의 변증법적 발전이 더욱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한국 개신교의 역사를 돌아보면 지난 반세기를 관통하는 가장 강력한 단어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성장’일 것이다. 교회는 끊임없이 커져야 했다. 교인은 늘어나야 했고, 예배당은 확장되어야 했으며, 주일학교는 붐벼야 했다. 목회자의 성공은 교인의 숫자로 측정되었고, 교회의 건강성은 재정과 건물, 프로그램과 조직의 규모로 증명되는 경우가 많았다.
성장은 곧 축복이었다.
작은 교회는 성장해야 할 교회였고, 큰 교회는 성공한 교회였다. 대형교회는 한국교회의 성공 신화를 상징하는 기념비처럼 여겨졌다.
이 성장주의가 한국 개신교에 기여한 공로를 부정할 필요는 없다. 전쟁의 폐허에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던 시기, 교회는 도시로 몰려드는 사람들을 받아냈고 공동체를 제공했으며 교육과 복지의 기능도 수행했다. 가난과 불안 속에서 교회는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한국교회의 폭발적인 성장은 당시 한국 슬롯의 변화와 일정 부분 맞물려 있었다.
문제는 하나의 역사적 성공이 언제부터 하나의 신학적 절대명제가 되었느냐는 것이다.
교회가 성장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장했기 때문에 그것이 교회의 본질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지금 다시 던져야 한다.
어쩌면 한국교회는 지금 성장주의의 실패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장주의라는 하나의 역사적 패러다임이 수명을 다하는 과정을 경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중요한 차이다.
성장주의가 끝난다고 해서 교회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성장이라는 하나의 기준이 더 이상 교회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 못하게 될 때, 교회는 비로소 교회가 무엇인지 다시 물을 수 있다.
이 질문을 위해서는 먼저 ‘성장’을 역사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헤겔에게 역사는 하나의 질서가 영원히 지속되는 과정이 아니었다. 하나의 질서는 자기 내부에 모순을 품고 있으며, 그 모순이 기존 질서를 부정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넘어간다. 중요한 것은 새로운 단계가 이전 단계를 단순히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보존하면서 넘어선다는 점이다.
한국교회의 성장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다.
성장주의는 한국교회의 역사적 조건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었다. 산업화와 도시화, 인구 증가, 가족 중심의 슬롯구조, 높은 종교적 열망이 결합하면서 교회의 외적 성장은 실제로 가능했다.
그러나 슬롯가 변했다.
인구가 줄고 있다.
가족이 작아졌다.
도시의 인구구조가 바뀌었다.
젊은 세대의 종교성이 약해졌다.
교회에 대한 슬롯적 신뢰도 변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를 삶의 유일한 공동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과거에는 교회가 제공하던 교육, 친교, 정보, 복지, 네트워크를 이제 수많은 다른 조직과 플랫폼이 제공한다.
그렇다면 과거의 성장 모델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은 점점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문제는 단순히 교인이 줄어든다는 데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성장이 멈추는 순간 교회의 존재 이유까지 흔들리는 것처럼 느낀다는 데 있다.
왜 교인이 줄어드는가.
왜 청년이 떠나는가.
왜 헌금이 감소하는가.
왜 작은 교회가 늘어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보다 다시 성장시키는 방법을 찾는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든다.
마케팅을 강화한다.
온라인 콘텐츠를 만든다.
목회자의 브랜드를 키운다.
새로운 예배 형식을 도입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근본적인 질문이 빠져 있다.
우리가 다시 성장시켜야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교회의 크기인가.
교인의 숫자인가.
재정인가.
영향력인가.
아니면 인간의 삶이 복음 안에서 변화되는 것인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성장주의는 더 이상 단순한 목회 방법론이 아니라 신학적 문제가 된다.
교회가 성장해야 한다는 명제는 그 자체로 잘못된 것이 아니다. 문제는 성장의 수단이 목적을 대체할 때 발생한다.
교인 수가 늘어나면 성공이다.
헌금이 증가하면 축복이다.
건물이 커지면 하나님의 역사다.
목회자의 영향력이 확대되면 사역의 열매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시장의 논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성장률을 계산하고,
성과를 측정하고,
브랜드를 관리하고,
고객의 욕구를 분석하고,
프로그램을 최적화한다.
목회는 어느 순간 사목이 아니라 경영이 된다.
신학은 그 뒤를 따라가는 장식이 된다.
이것이야말로 신학과 목회의 관계가 뒤집힌 상태다.
신학은 목회를 위해 존재하지만 목회의 성공을 정당화하기 위해 존재하는 학문은 아니다.
오히려 신학은 목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그것을 멈춰 세우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신학은 사변이 아니라 시련이다.
신학은 목회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논리가 아니라 목회가 불편해지는 질문을 던지는 학문이어야 한다.
“왜 교회가 커져야 하는가.”
“왜 사람이 많아야 성공인가.”
“왜 목회자의 유명세가 교회의 영향력인가.”
“교인이 줄어들면 교회의 가치도 줄어드는가.”
“작은 교회는 실패한 교회인가.”
“가난한 교회는 하나님의 축복을 덜 받은 교회인가.”
이 질문을 견디지 못하는 신학은 이미 목회에 종속된 것이다.
여기에서 루터의 십자가 신학은 오늘날 한국교회에 매우 불편하지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루터에게 하나님은 인간이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곳에서만 자신을 드러내시는 분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눈에는 실패와 약함으로 보이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신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성장주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우리는 큰 것을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것을 성공이라고 생각한다.
강한 것을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는 정반대의 질문을 던진다.
작아짐 속에서도 교회일 수 있는가.
약함 속에서도 복음은 살아 있는가.
성공하지 않아도 충실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지금 한국교회에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왜냐하면 앞으로 상당수의 교회가 작아질 가능성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구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선택해야 한다.
작아지는 것을 실패라고 규정하고 끝없이 과거의 성장을 복원하려 할 것인가.
아니면 작아지는 현실을 받아들이면서 교회의 본질을 다시 발견할 것인가.
이것은 단순한 목회 전략의 선택이 아니다.
교회론의 선택이다.
여기서 ‘변방의 은총’이라는 개념이 중요해진다.
한국교회에서 작은 교회와 작은 교단은 오랫동안 중심에 비해 열등한 위치로 인식되어 왔다.
큰 교단이 중심이고 작은 교단은 주변부다.
대형교회가 성공이고 작은 교회는 실패다.
유명한 목회자가 중심이고 이름 없는 목회자는 주변부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주류 안에 있으면 주류를 보기가 어렵다.
주류의 공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그 공기를 의식하지 않는다.
반면 변방에 있는 사람은 중심을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 변방은 결핍의 공간인 동시에 관측소가 된다.
작은 교회에서 교회가 무엇인지 다시 물을 수 있다.
작은 교단에서 교회의 본질과 제도의 관계를 다시 물을 수 있다.
성장이 멈춘 자리에서 성장이 정말 교회의 본질이었는지를 질문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변방은 유배지가 아니라 관측소다.
그리고 이것은 한국교회 전체에 필요한 관점이다.
이제 한국교회는 중심에서 주변을 내려다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중심을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대형교회는 작은 교회를 실패한 모델로 볼 것이 아니라 작은 교회가 먼저 경험하고 있는 미래의 모습을 볼 수도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구감소 슬롯에서는 지금의 작은 교회가 내일의 대형교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비관론이 아니다.
오히려 현실주의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를 떠올릴 수 있다.
슘페터에게 자본주의는 기존 질서를 영원히 보존하는 체제가 아니었다. 새로운 조건이 등장하면 기존의 기업과 산업, 기술과 생산방식이 파괴되고 그 자리에 새로운 질서가 등장한다.
교회 역시 역사 속에 존재하는 조직이다.
교회도 시대와 슬롯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조직 형태를 재구성해야 한다.
문제는 낡은 것을 얼마나 오래 보존하느냐가 아니다.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버릴 것인가다.
대형교회라는 형태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대형교회가 한국교회의 유일한 성공 모델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성장은 선한 것이지만 성장주의는 위험할 수 있다.
큰 교회는 필요할 수 있지만 ‘커야만 좋은 교회’라는 신화는 신학적으로 검증되어야 한다.
많은 프로그램은 유익할 수 있지만 프로그램의 숫자가 복음의 깊이를 대신할 수는 없다.
목회자의 영향력은 필요하지만 목회자의 개인 브랜드가 교회의 중심이 되는 순간 교회는 위험해진다.
이것이 창조적 파괴의 신학적 의미다.
교회의 본질을 보존하기 위해 때로는 교회의 형태를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신학과 사목의 관계가 다시 중요해진다.
흔히 신학은 이론이고 목회는 실천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구분은 지나치게 단순하다.
신학이 현실을 떠나면 사변이 되고, 사목이 신학을 떠나면 기술이 된다.
바카라상 없는 강단은 소음이 되고, 강단 없는 바카라상은 독백이 된다.
신학은 목회 현장에서 시험받아야 하고, 목회는 신학적 성찰을 통해 끊임없이 수정되어야 한다.
이것이 신학과 사목의 변증법이다.
신학이 목회에 질문을 던진다.
목회는 그 질문을 현실 속에서 살아낸다.
그 과정에서 목회는 신학의 추상성을 폭로한다.
그러면 신학은 다시 수정된다.
수정된 신학은 다시 목회에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이렇게 신학과 사목은 서로를 부정하고 다시 구성하면서 발전한다.
이것은 헤겔식 의미에서의 변증법적 발전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정과 반의 단순한 반복이 아니다.
새로운 단계는 이전 단계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남아야 할 것을 보존하면서 넘어서는 것이다.
한국교회에도 바로 그런 지양이 필요하다.
성장주의를 완전히 부정할 필요는 없다.
성장은 지난 시대 한국교회의 중요한 역사적 사명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영원한 교회론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제 성장의 시대에서 성숙의 시대로 넘어가야 한다.
확장의 시대에서 깊이의 시대로 넘어가야 한다.
대형화의 시대에서 다양성의 시대로 넘어가야 한다.
프로그램의 시대에서 관계의 시대로 넘어가야 한다.
동원의 시대에서 돌봄의 시대로 넘어가야 한다.
숫자의 시대에서 의미의 시대로 넘어가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공의 신학에서 십자가의 신학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는 교회의 실패를 미화하자는 뜻이 아니다.
작은 교회니까 좋은 교회라는 것도 아니다.
가난하면 거룩하다는 낭만주의도 아니다.
핵심은 크기나 작음 자체가 아니라 교회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느냐다.
큰 교회도 복음을 충실하게 증언할 수 있다.
작은 교회도 복음에서 멀어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크기가 아니라 방향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가 이제 물어야 할 것은 “얼마나 커질 것인가”가 아니다.
“무엇을 위해 존재할 것인가”다.
이 질문은 결국 사목의 문제로 돌아온다.
사목은 사람을 교회 안으로 끌어들이는 기술이 아니다.
사목은 인간의 삶을 복음의 빛 아래에서 함께 해석하고 견디고 돌보는 일이다.
그렇다면 성장하지 않는 시대의 사목은 오히려 더 어려워진다.
사람을 모으는 것보다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어려워진다.
행사를 만드는 것보다 한 사람의 고통을 견디는 것이 어렵다.
대형 집회를 만드는 것보다 한 노인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주는 것이 어렵다.
청년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보다 청년이 왜 교회를 떠났는지 끝까지 듣는 것이 어렵다.
그리고 바로 그 어려움 속에서 사목의 본질이 드러난다.
성장경제 시대에는 교회가 사람을 많이 모으는 능력이 중요했다.
축소경제 시대에는 교회가 사람을 끝까지 돌보는 능력이 중요해질 수 있다.
이것은 한국교회에 엄청난 패러다임 전환을 요구한다.
교회가 지역슬롯의 중심이 되기 위해 경쟁할 것이 아니라 지역슬롯의 고통을 감당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인의 숫자를 늘리는 것만큼 이미 있는 한 사람의 삶을 깊이 돌보는 일을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교회 밖의 사람을 교회 안으로 끌어오는 것만큼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다시 세상으로 나가 이웃을 섬기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사목의 기준도 달라진다.
몇 명이 모였는가가 아니라 몇 사람의 삶이 변화되었는가.
얼마나 많은 프로그램을 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깊은 관계를 만들었는가.
얼마나 큰 예배당을 지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고통을 함께 감당했는가.
얼마나 유명한 목회자가 되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해석하도록 도왔는가.
이것이 성장 이후의 목회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다시 신학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러한 질문에는 기술적 답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무엇인지,
복음이 무엇인지,
인간이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
공동체가 무엇인지,
이웃이 무엇인지,
이 질문은 모두 신학의 질문이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성장주의가 약해질수록 신학의 중요성은 더 커질 수 있다.
성장할 때는 방법론이 신학을 대신할 수 있다.
그러나 성장하지 않을 때는 방법론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교회가 작아질 때 교회가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청년이 떠날 때 복음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헌금이 줄어들 때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대형화가 불가능해질 때 공동체의 본질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그때 비로소 신학은 다시 살아난다.
신학은 교회의 성공을 설명하는 학문이 아니라 교회의 성공이라는 기준 자체를 심문하는 학문이어야 한다.
그리고 사목은 신학의 결론을 현장에 적용하는 단순한 응용학문이 아니다.
사목은 신학을 시험하는 현실이다.
신학이 아무리 아름다운 말을 해도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면 그 신학은 다시 질문받아야 한다.
교회의 거대한 교리체계가 한 청년의 절망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시 성찰해야 한다.
교회론이 작은 공동체의 현실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교회론 자체를 다시 물어야 한다.
이것이 신학과 사목의 변증법이다.
신학은 현장을 떠날 수 없다.
사목은 신학을 떠날 수 없다.
둘은 서로를 끊임없이 긴장시키면서 발전해야 한다.
어쩌면 한국교회가 지금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은 새로운 성장전략이 아니라 새로운 신학적 상상력인지 모른다.
다시 커지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작아지는 시대에도 복음이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는지를 상상하는 능력이다.
대형교회가 아닌 작은 교회에서도 교회의 충만함을 발견하는 신학.
숫자가 줄어드는 시대에도 선교의 의미를 발견하는 신학.
청년이 떠나는 시대에도 다음 세대와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신학.
지역슬롯가 해체되는 시대에 다시 공동체를 만드는 사목.
고령화 시대에 노년의 삶을 신앙적으로 해석하는 사목.
외로운 시대에 인간의 관계를 회복하는 사목.
이것이 앞으로 한국교회가 감당해야 할 새로운 과제다.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 성장주의는 종말을 고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히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할 수 없다.
성장 자체가 종말을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성장을 교회의 최고 가치로 삼았던 성장주의는 종말을 고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의 죽음이 아니라 교회의 성숙을 위한 죽음이어야 한다.
한 시대의 교회가 죽어야 다음 시대의 교회가 태어날 수 있다.
이것이 창조적 파괴의 역설이다.
그리고 이것은 복음의 역설과도 닮아 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복음의 논리는 교회에도 적용될 수 있다.
교회가 자신의 과거 형태를 절대화한다면 과거의 성공을 보존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미래를 만들 수는 없다.
한국교회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것은 교인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성장하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작아지는 것을 실패라고 생각하는 순간 교회는 성장주의의 포로가 된다.
그러나 작아지는 현실 속에서 “그렇다면 교회란 무엇인가?”라고 다시 묻는 순간 신학이 시작된다.
그리고 그 질문을 삶 속에서 살아내는 순간 사목이 시작된다.
이제 한국교회에는 성장 이후의 신학이 필요하다.
성장 이후의 교회론이 필요하다.
성장 이후의 사목이 필요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장 이후의 인간 이해가 필요하다.
교회가 사람을 숫자로 보지 않고 한 사람의 고유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
목회자가 교인을 성과의 단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인간으로 대하는 것.
교회가 지역슬롯를 선교의 대상으로만 보지 않고 함께 살아가야 할 이웃으로 보는 것.
그때 교회는 비로소 성장의 논리를 넘어설 수 있다.
성장주의의 종말은 교회의 종말이 아니다.
오히려 성장이라는 하나의 절대적 기준에서 해방되어 교회가 자신의 본질을 다시 발견하는 출발점일 수 있다.
헤겔의 표현을 빌리면 하나의 시대는 자기 내부의 모순을 통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슘페터의 표현을 빌리면 낡은 질서의 파괴는 새로운 질서의 창조를 가능하게 한다.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빌리면 인간이 실패라고 부르는 자리에서 하나님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신다.
그렇다면 한국교회가 지금 맞닥뜨린 작아짐은 단순한 쇠퇴가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교회가 무엇인지 다시 배우라는 역사적 요청일 수 있다.
성장의 시대에는 성장하는 법을 배웠다.
이제는 작아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많아지는 법이 아니라 깊어지는 법을 배워야 한다.
확장하는 법이 아니라 돌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을 모으는 법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신학과 사목이 다시 서로를 만나야 한다.
신학은 목회 현장으로 내려와 자신의 말을 시험받아야 하고, 사목은 신학의 질문 앞에서 자신의 성공 방식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신학은 사목을 심문하고, 사목은 신학을 시험해야 한다.
그 긴장 속에서 둘은 함께 발전한다.
그것이 신학과 사목의 변증법이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 한국교회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질문도 바로 이것인지 모른다.
“교회가 얼마나 커질 것인가?”가 아니라 “교회가 작아져도 무엇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인가?”
그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한국 기독교의 성장주의는 종말을 고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교회가 성장이라는 우상을 내려놓고, 복음이라는 본질로 다시 돌아가는 새로운 시작일 수 있다.
성장의 시대가 끝나는 곳에서 신학이 시작된다.
그리고 신학이 삶을 만나는 곳에서 사목이 다시 시작된다.
어쩌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더 크게 만드는 데 있지 않다.
작아지는 시대에도 교회일 수 있는가를 증명하는 데 있다.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