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이는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La Guerre éternelle』 3천년 전 전쟁을 다시 읽는 이유

바카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여행도 바카라을 찾아다닌다. 도서관 건물을 보고, 서점에 들르고, 센강변을 걷다가도 부키니스트 앞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그럼 『일리아스』를 좋아하는 사람은 어떨까?


그는 오래전 전쟁이 벌어졌다고 전해지는 장소를 찾아가는 기행문을 썼다.



올리비에 롤랭과 그의 소설 『영원한 전쟁(La Guerre éternelle)』



올리비에 롤랭(Olivier Rolin)의 『영원한 전쟁(La Guerre éternelle)』은 한 권의 바카라을 찾아 떠난 여행의 기록이다.


그가 찾은 곳에는 밀밭과 올리브나무, 플라스틱 파라솔이 꽂힌 해변, 그리고 3,000년 전의 노래가 남긴 폐허만 남아 있었다.


TROYA, 3 KM.



튀르키예 서부의 트로아드(Troade)를 여행하던 롤랭은 어느 갈림길에서 작은 표지판 하나를 발견했다.


트로이까지 3킬로미터.


길 양쪽에는 밀밭과 올리브나무가 펼쳐져 있었다. 그 사이로 붉은 양귀비꽃이 피어 있었고, 멀리 이다산이 보였다.


그가 오랫동안 바카라에서 읽고 상상했던 트로이가 평범한 시골길 끝에 있었다.


롤랭은 역사학자 프랑수아 아르토그(François Hartog), 호메로스의 서사시를 번역한 에마뉘엘 라스쿠(Emmanuel Lascoux) 등과 함께 트로이의 흔적을 따라가는 중이었다.


그리스 군대가 배를 정박시켰을 것으로 추정되는 베시크 만(Beşik Koyu)의 해변에는 플라스틱 의자와 파라솔이 놓여 있었다. 작은 생선 식당과 올리브유를 파는 가게들이 있었고, 멀리 바다에는 화물선이 지나갔다.


어쩌면 이곳에 아킬레우스의 군대가 진을 쳤을지도 모른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슬퍼하며 아킬레우스가 바라보았던 바다가 바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이곳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들은 해변을 걷고, 이다산 자락의 마을들을 지나고, 아킬레우스의 무덤으로 여겨지는 언덕에 올랐다.

롤랭은 이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일 년 넘게 트로이 근처에서 살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그곳에 주소지를 두고 거주했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그는 발을 딛고 있는 장소에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바카라을 읽고 상상하는 동안 마음이 머무는 곳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장소가 될 수 있고 보았다.


그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다시 읽기 시작한 뒤, 롤랭의 마음은 줄곧 트로이 주변을 맴돌았다. 수많은 바카라을 읽고, 지도를 살펴보고, 고고학자들의 연구를 따라가다가 결국 자신이 직접 그 땅을 보아야겠다는 결론에 도착했다.


그를 이곳까지 데려온 것은 오래된 전쟁의 역사였지만, 무엇보다 그 전쟁을 이야기한 문학이었다.


사실 우리가 트로이 전쟁에 관해 알고 있는 것들은 생각보다 불확실하다. 그리스 군대가 실제로 트로이를 공격했는지, 전쟁이 정확히 언제 일어났는지, 지금까지 발굴된 유적 가운데 어느 것이 호메로스가 노래한 도시인지조차 분명하지 않다.


심지어 『일리아스』를 쓴 호메로스라는 사람이 실존했는지도 알 수 없다.


롤랭은 이런 불확실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그 불확실성 때문에 『일리아스』에 더욱 매혹되었다.


실제로 있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전쟁을 기록한 작품이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을 사로잡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의 관심을 사이게 충분했다.


『일리아스』는 처음부터 바카라으로 존재했던 작품이 아니었다. 오랫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다른 사람의 입으로 전해지던 노래들이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로 엮였고, 이후 문자로 기록되면서 지금까지 살아남았다.


물론 트로이의 성벽이 정확히 어디에 있었는지, 그곳에서 누가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킬레우스와 헥토르가 누구인지, 그들이 어떤 선택을 했고, 최후를 맞이했는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롤랭은 이 사실에서 문학의 놀라운 힘을 발견한다. 역사적 사실을 입증할 수 없는데도, 그 이야기는 우리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 수많은 것보다 오래 살아남았다.


그렇다면 이 오래된 서사시가 역사적 사실이었다고 증명해내야 할까? 그는 오히려 수천 년 전의 사람들과 오늘의 우리까지 여전히 같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집중했다.


그리고 그 오랜 시간 동안 작품이 살아남았다는 사실만큼이나, 사람들이 이 작품을 서로 다르게 읽어왔다는 점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과거 그가 『일리아스』에서 좋아했던 인물은 아킬레우스였다. 그러나 나이가 든 지금, 그의 마음이 향하는 곳은 헥토르였다.


아킬레우스는 그리스 군대에서 가장 강한 전사였다. 전쟁에서 누구보다 용감하게 싸웠고, 자신의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동료 파트로클로스가 죽자 복수를 위해 전장으로 돌아갔고, 결국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를 죽였다.


그는 1968년 파리에서 벌어진 시위와 충돌 속에서도 고대의 전투를 떠올리고는 했다. 경찰의 투구와 방패는 고대 전사들의 무장을 연상시켰고, 거리에서 던지는 돌은 『일리아스』의 전장에서 날아다니던 무기들과 겹쳐 보였다.


그때의 롤랭에게는 싸움과 저항에 대한 낭만적인 기대가 있었다.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을 바꿀 수 있으리라는 믿음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일리아스』를 다시 읽는 롤랭은 마음에 오래 남는 인물은 헥토르가 되었다. 헥토르는 트로이의 왕자이자 뛰어난 전사였지만, 자신이 싸우는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했다.


그는 트로이가 언젠가 무너질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전장으로 돌아가야 했다.


헥토르에게는 아내 안드로마케와 어린 아들이 있었다. 『일리아스』에는 그가 전장으로 돌아가기 전 가족과 작별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안드로마케는 남편에게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지만, 그녀는 이미 전쟁으로 아버지와 형제들을 잃은 뒤였다. 이제 남편마저 죽는다면 자신에게는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그때 어린 아들이 아버지의 품에 안기기를 두려워한다. 헥토르의 투구에 달린 깃털 장식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헥토르는 투구를 벗고 아이를 들어 올렸다. 남편과 아내는 웃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헥토르가 곧 죽을 것이고, 트로이가 무너진 뒤 그의 어린 아들마저 살해당할 것이다.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그리고 어린 아들, 영화 트로이, 2004년



롤랭은 이제 이 장면을 오래 바라본다.


젊은 시절에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용맹함에 눈길이 갔다면, 지금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남겨두고 떠나는 헥토르의 마음에 더 이입하게 되었다. 롤랭은 자신이 살아온 세계도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리고, 바카라을 읽고, 문학이 세상을 바꿀 수도 있다고 믿었던 시대는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젊었을 때 당연하게 생각했던 삶의 방식들이 이제는 낯선 것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과거의 방식이 그립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늙어간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알고 사랑했던 세계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의 눈에 들어온 헥토르가 트로이의 몰락을 예감하는 장면은 그에게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자신이 속한 세계가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의 마음. 시간이 지나고서야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어쩌면 고전을 읽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바카라 속의 이야기는 달라지지 않지만, 그 이야기를 읽는 사람은 달라진다. 한때는 누가 싸움에서 이겼는지를 궁금해했다면, 어느 순간부터는 그 싸움이 끝난 뒤 누가 남겨졌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그렇다고 롤랭이 아킬레우스를 좋아하지 않게 된 건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일리아스』를 다시 읽으며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영웅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더욱 집요하게 살펴보게 되었다.


아킬레우스는 전쟁의 영웅이었지만 동시에 다른 도시들을 공격하고, 남자들을 죽이고, 여자들을 포로로 데려간 사람이었다.


『일리아스』의 시작에서 아가멤논과 아킬레우스가 다투는 이유도 포로로 붙잡혀 온 여자 때문이었다.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이었던 브리세이스를 빼앗으려 하자 아킬레우스는 격분했다.


위대한 서사시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바로 이 분노였다. 그러나 롤랭은 이제 그 분노만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는 브리세이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생각했다.


그녀에게도 남편과 가족이 있었다. 살던 집과 익숙한 장소가 있었고,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이어져 온 삶이 있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를 붙잡아 온 남자들은 그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누구의 소유가 되어야 하는지를 두고 다투었다.


『일리아스』의 아름다운 작품이다. 잔혹한 전쟁을 아름답게만 꾸며놓은 작품은 아니다. 무기가 사람의 몸을 찢고, 죽어가는 사람이 흙을 움켜쥐고, 남겨진 사람들이 울부짖는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롤랭은 그 거칠고 생생한 언어에서 문학의 놀라운 힘을 느꼈다. 이러한 양면성이 그가 『일리아스』를 사랑하면서도 불편해하는 이유였다.


끔찍한 폭력을 담고 있는
아름다운 문학



그 폭력을 묘사하는 언어가 너무도 강렬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자신이 그 아름다움에 매혹된다.


롤랭은 이 모순을 쉽게 해결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작품이 가진 매력 속에서 무엇을 바라보아야 하는지 끊임없이 질문했다.


아킬레우스의 승리를 이야기하면서 그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을 떠올리고, 영웅들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그들이 남겨놓은 여자와 아이들의 삶을 바라보는 식이다.


1995년, 롤랭은 사라예보에서 제인(Jane)이라는 여자를 만났다. 당시 사라예보는 오랜 포위전과 포격으로 파괴되고 있었다.


제인은 영국에서 온 배우였다. 그녀는 사라예보에 오기 전 런던 국립극장에서 에우리피데스의 『트로이의 여인들』에 출연했었다. 그녀가 맡았던 역할은 안드로마케였다. 오래전 트로이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었던 여자를 연기한 사람이, 이제 실제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있는 사람들의 도시를 찾은 것이다.


롤랭은 제인과 함께 사라예보를 돌아다녔다. 그들은 포격으로 파괴된 국립도서관을 방문하고, 전쟁 중에도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을 만났다. 어떤 여자는 밤마다 직접 만든 등불을 켜고 바카라을 읽었다. 다른 여자는 남편을 포탄에 잃은 뒤 어린 아들을 키우기 위해 작은 카페를 열었다.


전쟁 중에도 사람들은 학교에 가고, 바카라을 읽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롤랭은 그런 일상의 장면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제인이 그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도 기억한다. 제인은 자신이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유고슬라비아의 역사에 관해 모든 것을 이해하는 척하지 않았고, 낯선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갔다. 지하실에서 노래를 부르고, 사람들과 농담을 나누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롤랭은 그녀가 지닌 단순함과 용기를 사랑했다.


그는 제인을 생각할 때면 그녀가 즐겨 입던 회색 청바지와 흰 티셔츠, 허리에 묶었던 카디건을 떠올렸다. 머리를 묶고 그림을 그리던 모습도 함께.


롤랭은 글을 쓰고, 제인은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포격이 계속되는 도시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


그 가운데 롤랭이 특히 잊지 못한 장면이 하나 있었다.


사라예보 외곽의 바레(Bare) 묘지에서 장례식이 열리던 밤이었다. 죽은 사람은 포탄 파편에 맞아 목숨을 잃은 남자였다.


장례는 밤에 치러졌다. 낮에는 저격수의 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덕 아래로 불빛이 꺼진 도시가 희미하게 보였고, 어둠 속에서는 이슬람 성직자의 기도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흰 수의에 싸인 시신을 무덤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흙을 덮기 시작했다.


그때 제인이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는 무덤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장례에 참여한 남자들과 함께 맨손으로 흙을 밀어 넣었다.


그녀는 죽은 사람을 알지 못했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과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누군가를 땅에 묻는 순간만큼은 그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


롤랭은 그 모습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제인은 마치 고대 비극에서 걸어 나온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안드로마케이거나 안티고네처럼, 죽은 사람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여자였다.


제인은 이후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딸 케이트도 아스티아낙스의 운명을 떠올리게 하는 비극적인 죽음을 맞았다.


이후로 롤랭은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안드로마케가 어린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대사를 읽을 때마다 제인을 떠올렸다. 그녀가 무대에서 그 말을 했을 때에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던 일들이 있었다. 그리고 롤랭 역시 그때에는 자신이 훗날 그 대사를 전혀 다른 마음으로 읽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제인을 충분히 행복하게 해주지 못했던 일을 삶의 잘못 가운데 하나로 기억했다.


트로이의 유적을 찾아다니는 동안 롤랭이 돌아보고 있었던 것은 오래전 전쟁의 역사만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과 지나간 시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삶의 순간들을 함께 떠올리고 있었다.


롤랭에게 트로이의 함락을 한 도시의 파괴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사랑했던 세계가 끝나는 일이었다. 거대한 역사의 비극과 개인의 상실을 나란히 놓는 것이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경험한 상실을 통해서 비로소 타인의 고통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롤랭에게 안드로마케의 슬픔은 더 이상 고대 서사시 속의 사건만이 아니었다. 그 슬픔에는 제인의 얼굴이 겹쳐 있었고,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시간들이 함께 남아 있었다.






트로이에서 시작한 롤랭의 이야기는 다른 시대의 도시들로 이어졌다. 기원전 146년, 로마군이 카르타고를 파괴했을 때 장군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는 불타는 도시를 바라보며 『일리아스』의 구절을 떠올렸다고 전해진다.


언젠가 트로이도 무너질 것이라는 헥토르의 예언이었다. 그는 자신이 파괴한 카르타고에서 오래전 트로이의 모습을 보았고, 언젠가 로마도 같은 운명을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했다.


롤랭은 이 장면에서 역사의 묘한 역설을 발견했다.


승리한 사람이 자신이 파괴한 도시를 바라보며 미래의 패배를 생각한다는 것.


그로부터 2천 년이 넘게 흐른 1922년에는 스미르나가 불탔다.


튀르키예의 이즈미르인 이 도시는 여러 민족과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던 곳이었다. 그러나 그리스와 튀르키예 사이의 전쟁 끝에 도시는 파괴되었고, 수많은 사람이 불길을 피해 항구로 몰려들었다.


롤랭은 바다와 불길 사이에 갇힌 사람들의 모습을 트로이의 마지막 밤과 겹쳐 보였다. 그의 시선은 카르타고와 스미르나를 지나 드레스덴과 히로시마, 사라예보, 마리우폴과 가자로 이어졌다.


서로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벌어진 전쟁들, 전쟁의 원인도, 바카라임도, 역사적 상황도 달랐다. 그러나 롤랭의 눈에는 그 도시들은 비극이 되풀이되는 장소에 불과했다.


그는 전쟁을 단순히 인간이 끊임없이 반복해 온 어리석은 행동으로만 설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리아스』의 영웅들이 저지른 약탈과 살인을 다시 바라보고, 현대의 전쟁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그러면서 롤랭은 도시라는 공간 자체를 다시 생각했다. 도시에서는 사람들은 만나고 헤어지고, 매일 같은 길로 출근하고, 같은 가게에서 빵을 산다. 오래된 건물과 새로운 건물이 함께 존재하고, 서로 다른 언어와 생활 방식이 하나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롤랭은 도시를 수많은 사람이 함께 만들어낸 거대한 조각품처럼 느껴졌다. 도시가 아름다운 이유는 그 안에서 서로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를 파괴한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을 무너뜨리는 일로 끝나지 않는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쌓아온 시간과 기억, 함께 만들어온 삶의 형태를 파괴하는 일이다. 이것이 롤랭이 수천 년 전의 트로이를 이야기하면서도 지금도 파괴되고 있는 도시들을 외면할 수 없는 이유이다.


『La Guerre éternelle』의 마지막 장에서 롤랭은 다시 트로이로 돌아간다.


시간은 자정이었다. 달이 떠 있었고, 바다는 어두웠다.


트로이의 사람들은 잠들어 있었다. 그리스 군대가 전쟁을 포기하고 떠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십 년 동안 이어진 전쟁이 마침내 끝났다고 믿었다. 남자들은 술에 취해 잠들었고, 여자들은 거울 앞에서 머리를 빗고 있었다.


그러나 도시 밖에서는 그리스 군대가 돌아오고 있었다. 테네도스섬 뒤에 숨어 있던 배들이 어둠 속에서 해안으로 다가왔다. 군인들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노를 저었다.


그들은 트로이의 성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성벽 안에는 거대한 나무 목마가 놓여 있었다. 그 안에서는 그리스 병사들이 문을 열어줄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그리스 병사들은 더 이상 위대한 영웅으로만 보이지 않았다. 전리품을 기대하고, 여자들을 빼앗을 생각에 들떠 있는, 자신들이 저지를 살인을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반대로 트로이의 사람들은 그저 평범한 밤을 보내고 있었다. 전쟁이 끝났다고 믿으며 잠들어 있는 사람들은 내일도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롤랭의 작품 속에서 트로이의 사람들에게 아직 아침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