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에서 선 사람들

les bifurqueurs와『De l'autre côté du lac』

아파트를 팔고 바닷가 마을로 내려간 부부, 광고 회사를 그만두고 산골에서 염소젖으로 치즈를 만드는 농부, 낡은 밴을 집으로 고쳐 계절을 따라 옮겨 다니는 서른 살의 여자.


어딘가 익숙한 방송에서 한 번쯤 소개되었을 법한 친숙한 얘기들이지만, 이들은 모두 프랑스 잡지에 등장한 사람들이다.


프랑스에서는 미래가 어느 정도 보장된 안정적인 삶의 방향을 틀어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한 사람들을 가리켜 종종 비퓌르쾨르(bifurqueurs)라고 부른다. 갈림길에서 다른 길로 방향을 튼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최근 몇 년 사이 프랑스에서도 이렇게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앞으로도 같은 방식으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묻는 일이 꽤 익숙한 고민이 되었다.


'삶의 의미', 특히 자신이 하는 일에서 의미를 찾고 싶어 하는 흐름이 유행을 넘어 노동과 삶을 이야기할 때 반복해서 등장하는 주제가 되었다.


그들의 삶이 꼭 불행해서만은 아니다.

문득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 정말 내가 원했던 삶이었을까'라는 질문 앞에서,
지금과는 다른 삶, 여기와는 다른 곳, 오늘과 다른 하루에서 '나다움'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이번 공쿠르상 후보에 오른 두 소설에도 이 질문을 정면으로 다룬다.



야닉 에넬(Yannick Haenel)



야닉 에넬(Yannick Haenel)의 『교사들의 고독은 무한하다(La solitude des professeurs est infinie)』는 1990년대 초, 교직 생활을 시작해 파리 교외의 여러 중학교에서 9년 동안 프랑스어를 가르친 장 데셸(Jean Deichel)의 시간을 되짚는 소설이다.


교단을 떠난 지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는 처음 교사가 되었던 순간부터 그곳에서 겪었던 기쁨과 좌절, 그리고 끝내 자신에게 남은 시간들을 하나씩 되돌아본다.


그는 임용시험에 합격해 첫 온라인 게임을 얻었지만, 당시에는 교사가 되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고 회상한다. 스물두 살의 그는 자신이 제대로 삶을 시작했다는 감각조차 없었고, 일을 시작한다기보다 아직 열리지 않은 삶 속에서 모험과 빛, 그리고 시가 주는 기쁨 같은 다른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던 시절을 떠올린다.


하지만 교직 생활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현실은 조금 달랐다.



▍교문 밖에 있을 것 같았던 삶


장의 첫 출근은 새벽 6시 반에 시작되었다. 파리 북쪽 교외 지역에 살고 있던 그는 방에서 나와 열차를 타고 한 시간 반 만에 학교에 도착했다. 땀에 젖은 채 교문을 들어서자 8시 종이 울렸다.


그날은 개학 전 교사 회의를 위한 출근이었기에 학교에 학생들은 없었다. 운동장에 혼자 서 있던 장을 발견한 직원은 유리로 된 안내실 안에서 그를 가까이 불렀다.


장이 창구 앞으로 다가가자 직원은 유리창을 열고, 회의는 9 시에 시작하는데 너무 일찍 왔다며 소리를 질렀다.


장은 잔디밭 옆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그러자 조금 전의 직원이 슬리퍼를 끌고 달려와 그의 입에서 담배를 낚아챘다. 학교는 아이들이 있는 곳이라며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며 소리를 지르듯 말했다.


잠시 뒤 정문이 열리고 차 한 대가 행정실 전용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짙은 모자를 쓴 마른 남자와 금발의 여자가 차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장을 거의 거들떠보지 않은 채 건물 안으로 향했다.


회색 건물과 주차장, 군데군데 풀이 벗겨진 잔디밭까지. 그날 아침 장의 눈에는 학교의 모든 것이 우울하고 초라하게만 보였다.



이대로 돌아가 버린데도
누가 알기나 할까?



그 순간 장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상상은 순식간에 멀리 뻗어갔다.


교문을 빠져나와 아직 잠에서 깨지 않은 교외의 거리를 달렸고, 플라타너스가 늘어선 철길을 따라 역으로 향했다. 시간표도 종소리도 없이, 눈앞에 펼쳐지는 시간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누리는 삶이었다. 조금 전 잔디밭을 돌아다니던 검은지빠귀가 날갯짓으로 길을 안내했고, 나뭇잎 사이로 새어 나온 빛이 불안했던 아침을 가볍게 흩뜨렸다.


교장과의 첫 면담에서 그는 장에게 교실에서는 절대 웃지 말라고 충고했다. 이듬해에는 기준보다 훨씬 많은 수업을 해야 했다. 바로 옆 임시 교실에서는 첫 수업에 들어간 젊은 음악 교사가 부서진 교탁 아래 깔린 채 발견되는데, 학교가 내놓은 말은 일을 키우지 말라는 것뿐이었다. 그 교사의 이름은 끝내 아무도 알지 못했다.



교사들의 고독은 끝이 없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 날이면, 장은 새벽 열차에서 주문처럼 한 문장을 되뇌었다.

교문 밖은 점점 다른 삶의 이름이 되어 갔다.



실뱅 프뤼돔(Sylvain Prudhomme)



또 다른 후보작 실뱅 프뤼돔(Sylvain Prudhomme)의 『호수 건너편(De l’autre côté du lac)』은 산속 주차장에서 잠시 만난 뒤 몇 차례 연락을 주고받았던 사진작가 파올라(Paola)가 실종되면서 시작한다. 소설 속 화자는 그녀와 알고 지냈던 사람들을 찾아가고, 파올라가 남긴 사진과 메모, 기록을 들여다보며 그녀의 마지막 시간을 하나씩 되짚어가는 소설이다.


그는 알프스의 작은 마을 주차장에서 파올라를 처음 만났다. 그녀는 헬리콥터를 타고 막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었다. 산 정상 부근에 있는 자연보호구역을 촬영하고 돌아오는 중이었고, 그는 파올라의 무거운 짐들을 차에 싣는 것을 도와주면서 몇 분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짧은 만남 뒤 연락을 주고받으며 다시 만나기로 했지만, 파올라는 겨울이 되자 혼자 산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화자는 파올라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녀와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연인을 만나고, 산에서 함께 지냈던 고고학자와 공원 관리인을 찾아갔다. 파올라가 남긴 사진과 메모, 메시지와 기록을 들여다보면서 그녀가 마지막으로 무엇을 보고,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를 하나씩 따라갔다.


그 중심에 하나의 호수가 있었다.


호수 한쪽에는 사람들이 머무는 오두막과 산길이 있었다. 하지만 반대편은 20세기 초부터 사람의 출입이 금지된 자연보호구역이 펼쳐져 있었다. 오랜 시간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으면서 식물과 새, 야생동물이 다시 돌아온 곳이었다.


파올라와 함께 산에 머물렀던 고고학자 플로랑스는 호수 앞에 서면 자신들이 있는 이쪽이 문명의 세계이고, 건너편은 인간의 세계에서 벗어난 야생처럼 느껴진다고 말했다.


그리고 파올라의 흔적을 따라갈수록 한 가지 사실이 선명해졌다. 그녀의 시선은 계속 호수 건너편을 향하고 있었다.



로비텔 호수(Lac du Lauvitel)



▍호수 건너편에 있는 삶


파올라에게 호수 건너편은 막연한 상상 속 장소가 아니었다.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었고, 날이 맑으면 호숫가에서 눈으로도 바라볼 수 있는 곳이었다.


한때 개인의 사냥터였던 호수 건너편은 20세기 초부터 사람들의 출입이 막힌 채 거의 한 세기 동안 인간의 손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등산객만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과학자들의 출입도 허용되지 않았다. 1948년에 마지막으로 실시된 생태 조사 이후, 그곳에 대한 기록조차 없었다.


파올라 역시 처음에는 호수 이쪽에 서 있었다. 그녀는 낡은 대형 카메라와 유리 건판을 이용해 사진을 찍었다.


약 2주 동안 그녀는 고고학 발굴팀과 함께 호숫가 산장에 머무르면서 아침이면 발굴을 조금 돕다가 이내 카메라를 메고 혼자 비탈을 올랐다. 그리고는 저녁이 되어서야 다시 산장으로 돌아왔다.


저녁마다 동료들은 서로에게 그날 무엇을 찾았는지 물었다. 누군가는 부싯돌 하나를 발견했다고 했고, 누군가는 뼛조각 세 개를 찾았다고 말했다.


파올라의 대답은 거의 언제나 비슷했다.


자신은 꽝이었다고. 형편없는 사진 세 장을 찍었을 뿐이라고.


보호구역은 너무 넓고, 너무 무성하고, 모든 것이 지나치게 많아서 자신이 느끼는 그곳의 힘을 사진 안에 제대로 담아낼 수 없었는 대답뿐이었다.


그녀는 매일 자리를 옮겨가며 사진을 찍었다.

더 높은 곳으로, 다른 각도로, 조금 더 가까이.


사진을 찍는다는 건 언제나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뒤쫓는 일이다. 그런데 나는 대체 무엇을 뒤쫓고 있는 걸까?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온몸으로는 느껴지는 것. 그녀는 그것이 유리판 위에 새겨지기를 기다렸다.



▍떠나고 싶었던 바로 그곳


장에게 일상은 처음부터 둘로 나뉘어 있었다.


학교라는 의무와 시간표, 규칙의 세계와
시와 음악, 숲과 호수, 여행이라는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끼는 세계였다.


그리고 현실이 버거워질 때마다 그는 머릿속으로 다른 장소를 그렸다.


소설은 처음부터 이 둘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었다. 교문을 나가 버리는 상상을 했던 바로 그날 아침, 장은 운동장 한쪽 벤치에 앉아 있었다. 잔디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그곳에서 검은지빠귀 한 마리가 낙엽을 헤집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잠시 햇빛이 비치자 나무들 사이로 고요가 내려앉았다. 그는 문득 앞으로 모든 일이 엉망이 될 때면 이곳에 와서 잠시 앉아 있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벤치에 앉아 침묵에게 말을 걸면 될 것 같았다.


첫 수업 전날 밤, 그는 거의 잠을 자지 못했다. 수업 순서를 다시 한번 암기하고, 카드에 적었다. 거울 앞에서 목소리를 연습하고, 바지 주머니에 교실 열쇠가 있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아이들에게 얼마나 엄격하게 굴어야 할지, 웃어도 될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막상 수업이 시작되자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장은 아이들에게 개학 전날 하루를 짧게 써보라고 했다. 아이들은 느리고 서툴게 몇 줄의 문장을 적어나갔다. 그동안 바카라상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잠깐 동안 뜻밖의 평화를 맛보았다.


두 번째 시간에는 아이들에게 눈을 감게 한 뒤 제라르 드 네르발(Gérard de Nerval)의 시 「툴레의 왕(Le roi de Thulé)」을 들려주었다. 이어 미리 칠판에 적어둔 시를 보여주었고 한 사람씩 소리 내어 읽게 했다.


아이가 한 번 읽을 때마다 장은 칠판의 단어를 하나씩 지워갔다. 칠판에 단어들은 사라졌지만 다음 아이들은 시를 계속해서 읽어갔다.


없어진 단어들은 목소리로 되살려 냈다. 그리고 마침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칠판을 보고 아이들은 시를 읊었다.


웃지 말라던 교장의 충고에도 장은 아이들 앞에서 웃음을 보였다. 아이들도 함께 웃었다.


수업을 마친 장은 학교 밖으로 뛰어나갔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도망치고 싶어서 넘으려 했던 교문 밖을 나서는 기분은 가벼웠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낡은 거리를 달리듯 걸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사람


장과는 달리 파올라를 산으로 이끈 것이 일상에서 채울 수 없는 어떤 갈증 때문은 아이였다.


그녀는 극북 지방에서 두 달을 보내고 돌아와서도 일주일만 지나면 다시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던 사람이었다. 관계든 대화든 작업이든 생활이든 적당한 타협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을 소유자였다.



자기 안에
고요해질 수 없는
무언가를 품은 사람들



파올라가 원했던 것은 자신을 더 행복하게 만드는 장소가 아니었다. 자신이 느끼는 것과 자신이 살아가는 방식 사이에 아무런 틈도 없는 삶에 가까웠다.


그녀는 불편함 속에서야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다고 말버릇처럼 되새기곤 했다.

그리고 사진이 그녀가 생각하는 그 세계에 닿을 수 있는 방식이었다.


호수 이쪽, 문명의 세계에 서서 반대쪽을 바라보며 그곳을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쉽게 담기지 않는다.


그녀는 오솔길을 따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갔고, 보호구역이 바로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절벽 끝까지 갔다. 조금만 몸을 기울이면 그대로 저 안으로 떨어질 것 같은 곳에서 그녀가 남기고 싶었던 것은 개인의 행복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녀의 집착은 자신이 동경하는 세계와 지금 서 있는 자리 사이의 거리를 조금씩 좁혀가는 일처럼도 보였다. 그런데 결정적인 변화는 오히려 사진가로서 성공한 뒤 찾아왔다.


그녀가 호수에서 촬영한 사진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다. 갤러리스트는 판매금을 미리 지급하고 그녀가 앞으로 찍을 사진들을 구매하겠다고까지 했다.


그리고 그해 12월, 혼자 산으로 돌아온 파올라는 호숫가의 익숙한 바위 위에 다시 카메라를 세웠다.


빛은 완벽했다. 맞은편 봉우리는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파올라는 자신이 찍으려는 사진이 완벽하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기쁘지 않았다.


그날 오후에는 다시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호수는 예전보다 더 짙은 청록빛을 하고 있었고, 드러난 절벽은 한층 더 가파르고 아찔해 보였다. 다시 카메라를 세우고 사진을 찍었다. 이번에도 사람들이 좋아할 사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아무런 기쁨을 느낄 수 없었다. 처음에는 한 장의 사진을 위해 몇 시간이고 비탈을 오를 만큼 그곳에 매혹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그녀는 그저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호수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파올라는 사진 해설로 썼던 이 문장마저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이 올라왔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고, 아무리 좋은 사진을 찍어도 그녀는 여전히 이쪽에서 저쪽을 바라보는 사람일 뿐이었다. 제목 그대로 그곳은 끝까지 '호수 건너편'에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라졌다.


눈사태가 지나간 뒤 산장으로 구조대가 찾아왔다. 다시 눈사태가 일어날 수 있으니 모두 하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구조 헬기가 도착했고 다른 사람은 이미 헬리콥터에 올라타 있었다. 한동안 파올라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파올라가 실제로 보호구역까지 건너갔는지, 그곳에서 살아남았는지도 소설에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품은 그녀가 마침내 자신이 그렇게 오래 바라보던 세계 안으로 들어갔을 거라고 암시한다.



바라보기만 하던 세계를 끝내 자신의 삶으로 선택한 사람



어떤 사람에게는 정말 다른 곳으로 가야만 가능한 삶이 있을지도 모른다.


행복은 가까이에 있다는 말도, 지금 있는 곳에서 답을 찾으라는 말도 파올라에게는 일종의 타협이었을 것이다. 그녀가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바라보는 것과 실제로 살아가는 것 사이의 거리였다.


소설은 결국 그 거리를 없앤 그녀를 상상한다. 보호구역에서 첫날밤을 보낸 파올라, 그녀는 바위 사이에 마련된 은신처에서 나와 눈이 내리기 시작한 계곡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위에 떨면서도 곧바로 안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이 들어온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파올라의 시선은 호수 맞은편에 아주 작게 보이는 산장에 멈추었다.


오랫동안 그녀가 서서 호수 건너편을 바라보던 바로 그곳.

하지만 이제 파올라는 자신이 그토록 바라보던 세계 안에 서 있었고,

이제 '호수 건너편'에 있는 것은 그녀가 떠나온 산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