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들

물건에 담긴 기억, Choses que je croyais perdues

내일이면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올 테고, 이 집도 비워질 것이다.


에밀리는 혼자 아파트에 앉아 짐을 싸고 있었다.

접시는 깨지지 않도록 신문지로 감싸서, 작은 물건들은 테트리스 블록처럼 상자 안에 차곡차곡 집어넣었다.


속이 가득 찬 박스 날개를 다물고 테이프를 일직선으로 길게 붙였다. 그렇게 포장을 마친 박스 위에 주황색 펜으로 '주방 잡동사니'라고 적었다.


이사는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지 않았다.
적어도 손으로 하는 일만 놓고 보면 그랬다.


짐을 정리하면서 집 안에 놓인 물건들이 시선에 들어올 때마다 오래된 장면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양말 한 켤레, 할머니가 만들어준 체크무늬 행주, 오래된 병따개와 여행지에서 주워온 돌멩이까지 에밀리는 물건 하나에 시선을 두는 것만으로도 오래된 얼굴들이 한꺼번에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에밀리는 남자 친구가 아끼던 유리컵을 실수로 깨뜨렸던 일이 떠올랐다.


벼룩시장에서 2유로를 산 오래된 컵이었다. 히맨(He-Man)이라는 오래된 만화의 주인공 그려져 있었는데, 그는 어렸을 때 사용하던 것과 같은 컵이라며 무척이나 기뻐하던 모습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두 사람의 관계는 괜찮았던 것 같았다.


적어도 에밀리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클레망틴 멜루아와 그녀의 소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들(Choses que je croyais perdues)』



클레망틴 멜루아(Clémentine Mélois)의 2026년 소설 『잃어버린 줄 알았던 것들(Choses que je croyais perdues)』는 주인공 에밀리가 자신이 살던 아파트에서 이사를 나가기 위해 짐을 정리하는 대략 하루 정도의 시간을 다루고 있는 소설이다.


집 안 곳곳에는 남아 있는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에밀리는 그것들과 얽혀 있는 기억을 떠올린다. 얼마 전 헤어진 남자 친구와 함께했던 시간, 어린 시절의 추억, 새로운 삶을 찾아 방황하던 시절까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가버린 자신의 모습이 되살아 났다.


부엌을 정리하던 에밀리는 오래된 유리잔 하나를 발견했다. 잔에는 'Menthe Pastille'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유리컵을 바라보던 에밀리는 한때 프랑스 남쪽의 작은 바에서 일하던 시절을 떠올렸다.


그때 에밀리는 변화가 필요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찾아 지중해가 보이는 프랑스 남쪽으로 향했다.


배낭 하나와 유스호스텔 주소만 들고 도착한 곳에서 우연히 일자리를 구했다. 레스카드리유(L'Escadrille), 비행대를 의미하는 이름의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바였다. 가게 문 앞에서는 배들이 떠나는 모습이 보였고, 단골손님 중에는 은퇴한 선원들도 많았다.


아침 근무가 있는 날이면 여섯 시 반에 가게 문을 열었다. 해가 떠오르는 동안 나무 테이블을 닦았다. 일곱 시쯤이면 스쿠터를 타고 도도(Dodo)가 작은 개와 함께 나타났다. 그는 매번 술을 끊었다고 말하면서도 항상 와인에 레모네이드를 섞은 음료를 주문했다. 잠시 뒤에는 동네에 신문을 배달하는 피가로(Figaro)가 도착했다.


말이 거의 없어 '침묵의 세계'라는 별명이 붙은 두 노인도 그곳을 자주 찾았다. 두 사람은 함께 들어와 말없이 자리에 앉았고,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와인과 잔 두 개를 주문했다.


에밀리는 그들의 일상에 금세 익숙해졌다.


맥주통을 급하게 갈아 끼우는 법을 알게 되었고, 카페 크렘을 위한 우유 거품을 만들 줄 알게 되었다. 세 개의 층이 또렷하게 나뉜 아이리시커피를 만들어 냈고, 술에 취한 손님들의 싸움이 시작되려 하면 능숙하게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방법을 익혔다.


하지만 지금은...

에밀리는 더 이상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프랑스 남부에 있지 않았다. 그녀가 그때 배운 맥주통을 교체하고, 아이리시커피를 만드는 법 같은 기술들은 지금의 삶에서는 더 이상 쓸모가 없어 보였다. 앞으로도 별로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무의미해졌지만 'Menthe Pastille'라고 적힌 유리잔은 아직 그녀의 부엌에 남아 있었다. 바에 음료를 납품하는 업체에서 홍보를 위해 나눠준 유리잔이었다.


Menthe Pastille (망트 파스티유): 1885년 프랑스 약사 에밀 지파르(Émile Giffard)가 개발한 민트향 술. 투명한 색과 산뜻한 민트 향이 특징으로, 다른 재료의 색을 해치지 않으면서 깔끔한 향을 더할 수 있어 칵테일에 자주 사용된다.


에밀리는 그 잔에 물을 따라 마셨다. 물을 한 모금 마시는 동안만큼은, 에밀리는 잠시 그 시절의 삶을 다시 살아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어떤 물건은 왜,
그리고 어떻게
우리의 삶에서
이렇게 큰 의미를
갖게 되었을까?



클레망틴 멜루아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 소설의 출발점이 약 6년 전부터 갖고 있던 질문이었다고 말한다.


멜루아는 자신의 집에서도 시선이 닿는 곳마다 이야기가 하나씩 튀어나온다고 했다. 산바카라길에서 주워온 돌멩이는 그날 걸었던 길의 풍경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물건에는 훨씬 오래된 가족의 시간이 쌓여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렇다고 물건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었다.

그 위에 내려앉은 기억을 소중하고 다루었다고 덧붙였다.


에밀리의 집에도 이런 식의 물건들이 많았다. 부엌 찬장을 정리하던 그녀는 유통기한이 2016년 1월까지라고 쓰여 있는 페스토 소스 병 하나를 발견했다. 순간 고고학 박물관에 기증해도 되겠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그 옆에는 더 난감한 것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잼이 담겨 있던 비어있는 유리병 21개였다.


그녀는 아침이면 그 안의 잼을 빵에 발라 먹었다. 병이 비면 뜨거운 물에 담가 라벨을 떼고, 깨끗한 행주로 닦은 다음 물기가 완전히 마를 때까지 기다렸다가 뚜껑을 다시 닫아두었다. 매번 그 과정을 반복했고, 빈 유리병들은 어느새 에밀리의 집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에밀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 빈 유리병들과 정이 들어 버렸다. 이제 그것들과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잼 21병을 다 먹는 동안 함께 한 시간 동안 가족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반대로 아무런 이야기도 남아 있지 않은 물건들에게는 이유 모를 슬픔이 느껴졌다.

한때 누군가의 마음이 닿아 있었을,

하지만 이제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물건들을 보면 왠지 가엾고 쓸쓸함 간점이 몰려왔다.

그것들이 가지고 있던 이야기들은 이미 사라져 버린 뒤였다.


부엌에는 예순 장이 넘는 접시가 있었다. 그 가운데 푸른색과 흰색의 작은 꽃무늬가 그려진, 유난히 오래된 접시 하나가 있었다.


접시는 원래 그녀의 할머니 것이었다.


할머니는 동네 마트에서 물건을 살 때마다 포인트를 모았다. 어느 날 마트 카탈로그에서 디저트 접시를 발견했고, 마트 포인트로도 구매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고심 끝에 12장의 접시를 골랐다.


평소에 이 접시들을 찬장에 보관되었다가 크리스마스이나 부활절 같이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특별한 날에만 꺼내졌다. 접시 위에는 로렌 지방의 브리오슈가 올라갔고, 가족들은 크리스마스에는 자정 미사를 다녀와 핫초코와 함께 브리오슈를 먹고는 했다.


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는 에밀리의 어머니가 열두 장의 접시를 물려받았다. 이번에도 접시는 부엌 찬장의 가장 높은 곳에 보관됐다. 크리스마스와 부활절, 가족의 생일이 되면 접시가 다시 내려왔고, 독일식 케이크인 슈바르츠발더 키르슈토르테(Schwarzwälder Kirschtorte)나 과일과 크림을 채운 샤를로트, 생크림을 올린 딸기 케이크를 만들어 가족이 함께 먹었다.


그러던 어느 크리스마스였다. 헤어진 남자 친구가 처음으로 에밀리의 가족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던 날이었다. 아이들이 집 안을 뛰어다니고, 얼마 전 새끼를 열두 마리 낳은 강아지까지 있어 부엌은 정신없이 분주했다.


그때 설거지 건조대 위에 있던 그라탱을 굽는 오픈용 접시 하나가 떨어졌다. 아래에는 할머니의 접시가 쌓여 있었고, 12장 모두 한꺼번에 깨져버렸다.


에밀리의 아버지는 그중 한 장을 다시 붙였다. 깨진 자리를 숨기지 않고, 갈라진 부분을 금빛 선으로 이었다.

그리고 그 접시를 딸에게 건넸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싶다면,
지금까지 쌓아온 것들을
모두 없애버리면 되지 않을까?



집 안을 텅 비우고 오래된 물건들을 한데 모아 없애버리면,
과거마저 깨끗이 지워질 것 같았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가벼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것이 가능할 리 없었다.


작고 별것 아닌 물건들이지만, 하나씩 모아놓고 보니 그 안에 지금까지 살아온 시간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무심코 사들이고, 쌓아두고, 찬장 깊숙이 밀어 넣었던 물건들까지 모두 합쳐지자 어느새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한 윤곽이 드러나는 것 같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집안의 물건들이 자신을 만들어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밀리는 그 어떤 것도 쉽게 두고 갈 수 없었다. 새로운 집으로 가져갈 것들 가운데에는 앞으로의 삶에 꼭 필요한 물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다시 사용할 일이 없어 보이는 것들, 새로 사는 편이 훨씬 간단해 보이는 것들도 하나씩 신문지로 감싸고, 상자 안에 자리를 만들어 넣었다.


그리고 상자를 닫았다.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몰랐던 날

짐을 거의 다 정리한 에밀리는 아파트를 마지막으로 한 바퀴 돌아보았다. 찬장은 텅 비었고, 가구가 있던 자리에는 그동안 보이지 않던 벽과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에밀리는 부엌 바닥에 앉아 이삿짐센터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 바닥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키친타월 한 롤이 눈에 들어왔다.

종이에는 쿠키와 생선튀김, 봄 채소를 넣은 쇠고기 스튜 같은 요리법이 인쇄되어 있었다. 에밀리는 그 요리법을 읽다가 문득 고등학교 시절 라틴어 수업을 떠올렸다.

당시 선생님은 라틴어로 바카라을 읽는다는 표현이 ‘두루마리를 펼친다’는 뜻에서 나왔다고 설명해 주셨다.

생각해 보면 키친타월도 마찬가지였다. 인쇄된 요리법을 읽으려면 말려 있는 종이를 조금씩 풀어내야 했다.

그 단순한 동작에서 에밀리의 생각은 오래전 파피루스 두루마리로 옮겨갔다. 그리고 다시 그보다 먼 곳으로 뻗어나갔다.

동굴 벽에 남겨진 손바닥 자국에서 시작해 점토판과 파피루스, 양피지를 거쳐 지금 우리가 읽는 바카라과 인쇄물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무언가를 남기기 위해 만들어온 긴 시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에밀리의 머릿속은 그렇게 샐러드에 들어갈 오이에서 시작해 구텐베르크, 나일강과 인쇄술의 역사처럼 생각의 꼬리를 물고 아무 관계도 없어 보이는 곳까지 이어졌다.


이 종이들 속에는 얼마나 많은 삶이 숨어 있을까?


그녀는 부엌에 앉아 그 키친타월 롤을 바라보며 나는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키친타월 한 장을 뜯어 눈물을 닦았다.

이제는 텅 비어버린 아파트는 수많은 기억이 겹겹이 쌓여 있는 이곳을, 이제 정말 떠나야 할 시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에밀리는 곧 아파트를 떠날 예정이다. 그리고 앞으로 그곳에 다시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떤 것도 남기지 않았고, 집안을 채우던 물건들은 그곳에서 있었던 시간과 기억을 가지고 박스에 담았다. 이제 그곳에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오래된 유리잔과 금빛 선으로 이어 붙인 접시, 그녀가 살아온 시간의 흔적이 담긴 물건들은 모두 새로운 장소로 향해질 예정이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순간 헤어짐과 끝이 끊임없이 찾아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리고 대부분의 마지막은 마지막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어떤 순간에는 그것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어머니가 밤마다 이불을 덮어주던 마지막 날학교에 가기 위해 버스를 마지막으로 탄 날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만난 날

바의 카운터 뒤에서 마지막으로 유리잔을 닦았던 날

작업실의 문을 마지막으로 닫았던 날

헤어진 남자친구와 마지막으로 사랑 나누었던 날

그녀는 그때가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그저 평범한 하루였다.


그리고 오늘, 이 아파트에서 떠나가는 이 순간도 언젠가는 그런 마지막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 분명했다.

잠시 뒤면 에밀리는 이 집을 나간다.

상자들은 트럭에 실리고,

부엌 바닥은 비고,

한동안 자신의 삶이 머물렀던 아파트의 문도 마지막으로 닫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