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서 '나'를 꺼내는 일

『Nous aussi』와 『Minotaure』, 가족이 나를 만드는 방식

'우리 가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내 가족'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같은 가족을 부르는 것처럼 들리지만, 그 안에는 관계를 바라보는 아주 작은 거리의 차이가 숨어 있다.


'우리 가족'이라고 부르는 대한민국,

'내 가족'이라고 부르는 프랑스.


한국에서 '우리 가족'은 자신이 속해 있는 관계를 표시하는 의미로 해석한다. 너와 내가 함께 속해 있는 관계라는 의미를 내포한다. 반대로 '내 가족'은 네 것과 내 것을 구분할 때 주로 사용된다.


그렇다면 프랑스에서는 어떨까?

프랑스에서 '우리 가족', 'notre familles'이라는 표현은 철저하게 소유의 목적으로만 불린다. 둘 이상의 사람이 그들의 가족을 가리킬 때, 즉 친구의 가족과 내 가족을 함께 부를 때 '우리 가족(들)'이라고 말한다.


가족을 부르는 말이 다른 것처럼, 그 관계 속에서 '나'를 바라보는 방식도 다르지 않을까?


미국의 언어학자 에드워드 사피어(Edward Sapir)는 언어를 단순히 생각을 전달하는 도구로만 보지 않았다. 그는 언어를 우리가 슬롯적 현실을 이해하는 하나의 '안내자'라고 보았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의 습관이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고 설명한다.



안 고다르(Anne Godard)와 그녀의 소설 『우리도(Nous aussi)』


그렇다면 가족이라는 가장 가까운 '우리' 안에서, '나'는 어디까지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안 고다르(Anne Godard)의 소설 『우리도(Nous aussi)』는 더할 나위 없이 화목해 보이는 한 가족의 모습을 통해 이 질문을 조금 더 깊숙한 곳까지 밀어 넣는다.


작품은 제목처럼 '우리'로 시작한다.



우리는
파리지엥이다



파리 5구의 한 오스만식 건물에 한 가족이 모여 살고 있었다. 부모와 아이들, 삼촌과 이모, 사촌들까지 같은 주소를 나누어 쓰고 있었다.


아이들은 건물의 계단과 마당을 자기 집처럼 들락날락했고, 같은 학교 같은 반에는 사촌이, 그 윗 학년에는 형과 누나가 다녔다.


여름이면 온 가족은 대대로 물려받은 알프스 오래된 산장에서 휴가를 보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들의 아들딸들과 사촌들까지, 수십 명이 한집에 모이는 시간이었다.


방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가족 누군가의 이름이 붙어 있었고, 복도의 한쪽 벽에는 그곳에서 여름을 보낸 아이들의 이름과 키가 겹겹이 기록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그 사이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내곤 했다. 그런데 같은 이름이 여러 번 쓰여있는 탓에 가끔은 누구의 것인지 헷갈리는 일도 있었다. 할머니의 이름이 손녀에게 이어지고, 삼촌의 이름을 조카가 쓰는 일이 비일이재했다.


그들에게는 한 사람의 이름조차 그 사람에게만 속하지 않았다. 세대를 건너 반복되고, 다시 누군가에게 이어졌다.


테라스 너머로 보이는 산들마저 그들은 '우리 산'이라고 불렀다. 파리에서는 건물이 '우리 건물'이었고, 그곳은 '우리 동네'였다. 늘 다니던 가게도, 학교도, 여름을 보내는 집도 모두 '우리'의 세계 안에 있었다.


집과 장소뿐만이 아니었다. 이름도, 기억도, 취향도, 가족이 오래도록 들려준 이야기들도 함께 물려받았다.


누군가가 누구인지 설명할 때조차 그 사람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누구의 딸이고, 누구의 동생이고, 누구의 사촌인지 알아야 비로소 그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모두가 연결되어 있었다.

누구도 혼자가 아니었고, '우리'라는 테두리 안에서 살았다.


그들 중 한 아이는 어느 여름부터 다른 아이들과 잘 어울려 놀지 않았다.

오후에 사촌들이 모여 카드게임을 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보물 찾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지만, 그 아이는 부엌에 남아 당근 껍질을 벗기고, 오이를 썰고, 샐러드를 씻었다.


오후에도 아이들보다는 어른들 곁에 머물렀다. 거실이나 집 앞에 함께 앉아 어른들이 늘 하던 과거 한때의 이야기와 전쟁통에 겪었던 일화를 들었다.


어느 날부터 아이는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은 있지만 단어들이 입안에서 뒤엉켜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하나의 단어를 끝내기도 전에 다음 단어가 밀려 나왔고, 결국 문장을 끝까지 만들어내지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가족들은 기다려주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빨리 말을 하는 것 같다는 조언을 했다. 발음을 똑바로 하라고, 좀 더 크게 말하라고 요구했다. 그리고는 입 안에서 겉돌던 단어를 먼저 뱉어버리고, 아이가 끝내지 못한 문장을 대신 완성해 주었다.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마치 그 아이의 머릿속에 들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가족은 아이에게 할머니를 닮았다고 했다. 그래서 할머니처럼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고, 심지어 토스트를 좋아하는 거라고 말했다. 할머니를 닮았으니 이것을 해보면 좋겠다고, 어쩌면 저런 일을 하면 잘할 것 같다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그 말들은 하나로 끝나지 않았다. 무엇을 먹고 싶은지, 어떤 활동을 하면 좋을지, 나중에는 무슨 일을 하면 어울릴지까지 가족에게는 이미 아이를 위한 답이 준비되어 있었다.


정작 아이는 자기 입안에서 엉켜버린 단어 하나를 끝까지 꺼내는 일조차 버거웠지만, 주변 사람들은 아이의 문장을 완성하는 일이 먼저였다.


그러던 어느 날, 식탁에 앉아 있던 아이의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이는 가족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침대 위에 몸을 던지고 울기 시작했다.


아이의 머리 위 벽에는 국제앰네스티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철창 사이로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그림,
한 남자의 턱을 망치로 짓누르는 그림,
철조망에 입이 틀어막힌 얼굴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아이는 울면서 엄마를 기다렸다. 엄마가 올라와 자신도 아직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는 자기 안의 그것을 말로 꺼내놓을 수 있도록, 물어봐주기를 바랐다.


잠시 후 엄마가 정말로 방으로 올라왔다. 하지만 엄마는 아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기보다, 자신이 생각한 이유부터 말하기 시작했다. 아이가 왜 우는지, 어떤 감정인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하나씩 설명했다.


아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이야기는 끝나 있었다. 엄마의 얘기가 끝남과 동시에 아이도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아이는 눈물을 닦고, 얼굴을 씻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가 식탁에 앉았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먹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아이는 자랐다.


그때까지 아이에게 '우리'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말이었다. 가족도, 집도, 기억도 언제나 함께였고, 자신이 미처 설명하지 못하는 마음까지 누군가 먼저 알아채고 말해주는 곳에서 아이는 성장했다.


그래서인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전혀 다른 의미의 '우리' 앞에 섰을 때에도 그 안으로 쉽게 들어갈 수는 없었다.


성인이 된 아이는 자신과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곳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우리'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혼자 있지 말자고 말했다. 서로의 말을 믿어주어야 한다고, 침묵을 끝내야 한다고, 함께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했다. 정의를 요구하고, 진실을 밝히고, 더 이상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번의 '우리'는 어린 시절의 그것과 달랐다. 누군가를 대신해 말하기 위한 '우리'가 아니라,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이 서로의 말을 믿고 지키기 위해 만들어낸 '우리'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
서로 몸을 가까이하고 하나의 대열이 되는 것.
여러 사람이 한 목소리를 내는 것.
그리고 다시 어떤 전체의 일부가 되는 것.


그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


On ne peut plus
être nous


그 말 뒤에서 소설은 다시 오래 전의 한 장면을 꺼내놓는다. 아직 너무 어려 서로의 경계조차 선명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집에는 두 아이가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빨간색 플라스틱 장난감 통이 하나 있었다. 아이들은 그 안에 함께 들어가고는 했다. 몸을 바짝 붙이고, 두 다리를 나란히 모은 채 팔로 서로를 감싸 안아야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통 안에 웅크리고 있으면 둘은 마치 하나의 몸처럼 보였다.


아이들은 자신들의 부모를 부르며, 자신들이 머리가 둘이고 팔이 넷, 그리고 다리는 하나가 되었다며 낄낄거렸다.


그러다 통이 기울어졌고, 두 아이도 서로 뒤엉킨 채 바닥으로 쏟아졌다.


어릴 때 둘은 늘 그런 식이었다. 같은 방을 쓰고, 같은 곳에서 놀고, 늘 함께 불렸다. 웃다가 울고, 울다가 소리를 질렀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를 때리고, 맞은 아이가 울었다. 하지만 같은 일이 되풀이될수록 둘 사이에서 누가 무엇을 했는지는 점점 희미해졌다.


엄마가 바카라을 읽어주고 잘 자라는 인사를 남긴 채 방을 나가면, 그 놀이가 시작되었다.


그는 자신의 침대로 올라오라고 했다. 내가 싫다고 하면, 그럼 자기가 내려오겠다고 했다.


그래고 거부하면, 그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학교 운동장에서 더 이상 나를 지켜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함께 놀아주지 않겠다고, 레고도 자전거도 빌려주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가끔은 때리겠다고 겁을 주기도 했다.


어떤 날은 잠든 척했다. 그러면 그는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내 침대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내 위에 몸을 싣고 움직이지 못하게 눌렀다.


그때 나는 그 일이 무엇인지 몰랐다.


왜 싫은지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었고, 놀이가 끝나고 나면 왜 기분이 나빠지는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왜 이 일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아이에게는 그것을 부를 다른 말조차 없었다.


그는 그것을 계속 '우리의 놀이'라고 불렀다.








또 다른 소설, 보리스 베르그만(Boris Bergmann)의 『미노타우로스(Minotaure)』는 정반대의 자리에서 '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바라본다.


안 고다르의 작품에서는 너무 많은 '우리' 속에서 자신을 잃어버린 아이가 있었다면, 이번에는 처음부터 비어있는 자리에서부터 시작한 보리스의 어린 시절을 보여준다.


하지만 소설은 그 부재를 결핍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 빈자리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맺은 관계가 한 사람을 어떻게 만들어가는지를 따라간다.


소설은 스물세 살의 보리스가 한 번도 만나본 적 없는 아버지를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보리스 베르그만(Boris Bergmann)과 『미노타우로스(Minotaure)』



보리스는 어머니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혼자 아버지를 찾아갈 계획을 세웠다.


먼저 한밤중에 아버지가 일하는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사람이 받지 않을 시간을 일부러 골라 자동응답기에 남겨진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보리스는 거의 반사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휴대전화가 갑자기 뜨거워지기라도 한 것처럼 손에서 떨어뜨리기까지 했다.


잠시 뒤 전화기를 주워 다시 걸었다. 한 번으로는 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결국 몇 차례 같은 목소리를 반복해서 들은 끝에, 목요일에는 밤 아홉 시쯤 마지막 진료가 끝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 목요일, 스물세 살의 보리스는 파리 몽파르나스역에서 기차를 타고 아버지가 사는 보르도로 향했다.


하지만 아버지를 만나기는 장면이라고 하기에는, 보리스의 내면에는 기대보다 분노와 흥분, 그리고 두려움이 가득했다.


보르도에 도착한 보리스는 공유 자전거를 타고 아버지의 진료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휴대전화 화면에 길이 표시되어 있었지만, 낯선 도시에서 그는 길을 잃었다. 몇 번이나 방향을 잘못 들고 헤매는 사이, 평범했던 거리는 어느새 숲과 덤불, 키 큰 풀로 뒤덮인 미궁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헤맨 끝에 마침내 건물 앞에 도착했다. 보리스는 자전거를 세우고 출입문으로 다가갔다. 출입문 옆에는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정신과 의사', 그리고 '예약 진료'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보리스는 길을 건너 건물 출입문이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목요일 마지막 진료가 끝나는 밤 아홉 시쯤, 아버지가 그 문을 열고 나오기를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그래, 나는
아버지라는 사람을
만날 거야



보리스는 길 건너편에서 건물 입구를 바라보며 기다렸다.


그때 한 금발 여성이 인터폰을 누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보리스는 그녀가 아버지의 마지막 환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문득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혹시 아버지가 이 건물에서 살면서 집 안에서 환자를 받는 거면 어떡하지?' 그렇다면 진료가 끝나도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 길에서 우연한 듯 그를 마주치려던 계획도 소용없어지는 셈이었다.


보리스는 다시 길을 건넜다.


이번에는 인터폰 앞에 섰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버지의 이름이 적힌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늦은 시간에 방해받은 것이 못마땅한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네?"


보리스가 말했다.


"저는 보리스 베르그만입니다. 당신의 아들입니다."


침묵이 흘렀다.


인터폰 너머에서 아버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겨우 머뭇거리는 소리를 냈다.

보리스는 오히려 그가 당황한 것을 이해한다는 듯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네…… 알아요."


다시 침묵이 흘렀다.


"내려오실 수 있나요?"


그제야 아버지가 말을 되찾았다.


"아니요. 당신이 올라오세요."


곧 현관문이 열렸다.




보리스가 한 살을 조금 넘겼을 무렵, 어머니에게는 한 남자친구가 있었다. 호른을 연주하고 음악을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틈이 나면 이것저것 자신의 손으로 직접 고치는 것을 좋아했다.


어린 보리스는 그를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럽게 '아빠'라고 불렀다.


어느 날 아침, 어머니는 어린 보리스를 불러 앉혔다. 그리고 잠들기 전 이야기를 들을 때처럼, 누군가의 비밀을 들을 때처럼 귀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그 사람은 네 아빠가 아니야.
아빠는 떠났어.


어린아이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단순한 문장이었다.


보리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는 떠났다.'


그에게는 이상하거나 어려운 말도 아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어쩌면 처음부터 자기 안에 있었던 사실처럼 분명했다.


그래서인지 보리스는 자신의 얼굴과 몸에서 어머니를 닮은 부분을 유심히 바라보곤 했다.


검은 곱슬머리와 어두운 눈, 햇볕을 받으면 금세 그을리는 피부와 짙은 눈썹. 얼굴의 윤곽과 입술, 웃을 때 드러나는 표정까지.


어머니를 닮았다는 사실은 보리스를 안심시켰다. 적어도 거울 속 자신의 얼굴에서 떠나버린 사람을 보고 있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몸의 모든 부분을 어머니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유난히 큰 키와 수염 사이로 비치는 옅은 붉은빛처럼, 어머니에게서는 찾을 수 없는 특징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그럴 때면 보리스는 한 번도 제대로 알지 못한 사람을 떠올렸다. 자신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무언가를 발견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것만큼은 떠나간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아버지가 없던 보리스의 어린 시절에는 '아빠'라고 부를 만한 사람들이 유난히 많았다. 어머니는 에이즈를 예방하고 환자를 지원하는 시민단체 AIDES에서 활동했는데, 그녀는 어린 보리스를 어디든 데리고 다녔다.


보리스는 유모차를 타고 회의에 갔고, 아기띠에 안긴 채 시위 현장에 나갔다. 총회가 열리는 날에도, 세계 에이즈의 날 행사에도,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는 날에도 보리스는 늘 그곳에 있었다.


자연스럽게 AIDES 사람들도 보리스를 함께 돌보았다. 학교가 끝날 때 데리러 갔고, 마약이 왜 위험성과, 깨끗한 주사기와 오염된 주사기는 어떻게 구분하는지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함께 디즈니랜드에 다녀온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보리스의 친아버지가 누구인지는 그들 대부분이 알지 못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관계가 거의 비밀스럽게 이어졌고, 어머니가 아이를 낳기로 결정하자 아버지는 AIDES를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사무실의 남자들은 알 수 없는 아버지의 자리를 하나의 놀이로 만들어버렸다.


이번 주에는 내가 아빠야


매주 한 사람이 보리스를 자신의 아들처럼 '입양'하고, 보리스의 어머니와 자신 사이에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를 지어냈다. 이번 주의 남자가 이야기를 하나 만들어내면, 다음 주에는 또 다른 사람이 다른 스토리로 보리스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렇게 한 명뿐이던 아버지의 자리에는 매주 다른 남자가 들어왔다. 시간이 흐르고 보리스는 당시를 돌아보며, 그들을 '게이 아빠'라고 불렀다.


많은 아빠들 가운데 보리스는 도미(Domi)라는 남자를 유난히 따랐다. 그에게 도미는 양아버지 같은 존재이자 언제나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어른이었다.


도미는 어머니와도 무척 가깝게 지내는 사이였다. 그래서 셋은 함께 휴가를 보냈고, 파리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고, 크고 작은 가족 행사에 함께 했다.


도미는 보리스를 어린아이로만 대하지 않았다. 아이도 어른도 아닌, 자신과 동등한 사람으로 대했다. 잔소리나 설교도 하지 않았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정답처럼 말하지도 않았다.


도미와 함께 있으면 평범한 대화도 금세 이야기로 바뀌었다.


보리스가 "도미는 뭐 하는 사람이야?"라고 물을 때마다 새로운 대답이 돌아왔다.


어떤 날에는 꽃집에서 일한다고 했다가, 다른 날에는 소방관이라고 대답했다. 군인이었다가, 판매원이 되기도 했고, 운전기사와 큰 배의 선장이라고도 했다. 때로는 살인자였다고, 성매매를 했다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 직업에 어울리는 이야기가 따라 나왔다.


이야기는 늘 그럴듯했다. 보리스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도미라면 정말 그 모든 삶을 살아봤을 것 거라고 믿었다.


열한 살이 되었을 무렵부터는 둘만의 수요일이 생겨났다.


보리스는 혼자 지하철을 타고 파리 시내로 나가 도미를 만났다.


둘에게는 정해진 순서가 있었다.


눈.

배.

그리고 피부.


그들은 가장 먼저 눈을 만족시키기 위해 퐁피두센터의 초현실주의 사진전 『이미지의 전복(La Subversion des images)』에 갔다.


보리스는 한 포토몽타주 앞에 멈춰 섰다. 가운데에는 르네 마그리트의 벌거벗은 여성이 있었고, 눈을 감은 초현실주의자들의 얼굴이 그녀 곁을 빙 둘러 배치되어 있었다.


도미는 말없이 보리스의 옆에 서 있었다. 무엇을 어떻게 보아야 한다고, 왜 이 작품이 좋은 지도 묻지 않았다. 그는 그저 보리스가 한 장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다음은 배를 만족시킬 차례였다. 도미는 보리스를 식당으로 데려가 한겨울인데도 로제 와인을 주문했고, 먹고 싶은 음식을 골라 주문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전채요리와 본요리, 디저트까지 다 먹지 못할 만큼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음식 옆에는 언제나 이야기가 있었다. 보리스는 성에 대해서 물었고, 자신의 미래와 꿈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도미에게라면 마음속에서 뒤엉켜 있던 것들을 그대로 꺼내놓을 수 있었다. 도미도 언제나 보리스의 얘기를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식당을 나오면 도미가 말하는 '두 번째 디저트'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쇼핑이었다.


보리스는 어머니가 정해준 스타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캠퍼 운동화와 패딩, 체크무늬 셔츠와 스카우트 반바지를 주로 사주었다.


하지만 도미와 함께 쇼핑을 할 때만큼은 보리스가 원하는 대로 고를 수 있었다.


보리스는 꽃무늬 셔츠를 집었다. 허리가 높고 몸에 붙는 바지를 입어보았고, 반짝이는 가죽 구두를 신어보고, 쿠바식 굽이 달린 부츠도 신어 보았다. 내친김에 턱시도 재킷도 걸쳐보았다.


쇼핑이 끝나면 도미는 보리스의 손에 직접 고른 옷들이 든 쇼핑백을 들려주었다.


헤어지기 전에는 언제나 볼에 입을 맞추고, 다음에 만날 날짜를 정했다.


그리고 보리스는 이 시간들을 돌아보며 '두 번째 피부를 스스로 골랐다'라고 회상했다.








개인적으로는 이 두 작품이 가족을 해체하는 방식이 무척 흥미로웠다.


한쪽에는 너무 많은 '우리'들 속에서 집도, 이름도, 기억도, 심지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느끼는지까지 알고 있다고 믿는 세계와 다른 한쪽에서는 처음부터 비어 있는 아버지의 자리를 스스로 채워낸 세계가 있었다.


한 사람은 그토록 단단한 '우리' 속에서 자신을 분리해 내고, 다른 한 사람은 여러 관계들 속에서 자신에게 남길 것들을 하나씩 골라갔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에서부터
만들어지는 걸까?


2026년 공쿠르상 후보작을 보면 유난히 가족을 다룬 작품들이 눈에 들어온다. 부모와 자식, 가족의 균열, 혈연과 계보를 다시 들여다보는 이야기들이다.


프랑스 문학에서 filiation(혈통, 계통), 그러니까 자신이 누구에게서 왔고 무엇을 물려받았는지를 묻는 시선은 아주 새롭지는 않다. 작년에도 가족사에 대한 작품이 공쿠르상의 주인공이 되었던 만큼 그 소재만큼은 식상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다만 최근 주목받고 있는 작품들을 보면 단순히 내가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딸인지를 확인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 듯하다. 무엇을 물려받았는지, 그들 이전 세대의 삶과 기억이 내 안에 무엇을 남겼는지, 그리고 그 가운데 무엇을 이어받고 무엇을 끊어낼 것인지를 묻는다.


과거에는 문화와 계급, 가족과 교육이 한 사람의 취향과 삶의 방식을 만들어낸다는 오래된 아비투스(habitus)적 시선이 지금의 '나'를 설명해 주었다면, 최근의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나를 만든 것들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때로는 벗어던져야 할 낡은 굴레가 되고, 때로는 다시 해석해야 할 과거가 된다. 그리고 혈연 밖에서 새롭게 만들어지는 관계에 집중되기도 한다.


여기에 가족 역시 예외는 아니다. 가족은 더 이상 '나'를 설명해 주는 안정된 답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했다.


지금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집안 출신인지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들에게서 온 것들로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는지,

그리고 이제, 그 가운데 무엇을 내 것으로 받아들였는지를 묻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