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려받고 싶지 않았던 것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물려받은 삶, 『Faire la peau』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여자가 말했다.


"엄마를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아."


서른 살이 되어서야 처음 입 밖으로 꺼낸 말이었다.


그전에도 몇 번이나 같은 결심을 한 적은 있었다.


그녀는 엄마와 크게 싸우고 집을 뛰쳐나온 날이면 친구들에게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는 말을 자주 했다. 연락을 끊은 채 몇 달을 보낸 적도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글을 써야 한다는 핑계로 가족 모임을 빼먹는 일도 잦아졌다. 글을 쓴다는 이유만큼은 엄마도 어쩌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매번 그 결심은 오래가지 못했다.


엄마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웠고, 생일이 돌아왔고, 크리스마스가 왔다. 무엇보다 주위 사람들은 늘 같은 말을 했다.


그래도 엄마잖아.






루이즈 슈느비에르와 그녀의 소설 『살갗을 벗기다(Faire la peau)』


루이즈 슈느비에르(Louise Chennevière)의 『살갗을 벗기다(Faire la peau)』는 제목부터 심상치 않다. 나름 고민해서 가칭 '살갗을 벗기다'라고 했지만, 그 속에는 더 잔인한 뉘앙스를 품고 있다.


프랑스어에는 faire la peau à quelqu’un이라는 관용적인 표현이 있다. 문자 그대로 옮기면 '누군가의 가죽을 만들다'에 가깝지만 실제로는 '누군가를 해치우다', 즉 '죽여버리다'라는 뜻으로 쓰인다.


제목 자체에서 두 층위의 의미가 포개져 누군가를 없애버린다는 관용적인 의미와, 피부라는 가장 바깥쪽의 층을 벗겨낸다는 표면적 이미지를 전달한다.


작품은 짧게 딸의 시선에서 바라본 모녀 관계를 거슬러가는 이야기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엄마와 딸의 관계와는 제법 다른 분위기의 작품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이 둘의 관계를 아름답게 포장할 생각이 없는 듯 보인다.

딸은 아주 오래전부터 엄마의 죽음을 기다려왔다고 말하면서 작품은 시작된다.


J’ai toujours attendu
la mort de ma mère.


그렇다고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 반대에 있는 듯 보인다.

따른 엄마를 미워하면서, 동시에 엄마를 잃을까 두려워한다. 만나기에 부담스럽지만 연락이 없으면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불안감에 휩싸이기를 반복한다.


딸은 어린 시절, 엄마가 힘들어하는 이유가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는 늘 일이 많았다. 늘 피곤했고, 돈 걱정을 했고, 자신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말을 했다.

때로는 죽어버릴 것처럼 말하기도 했다.


어린아이가 그런 말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엄마의 삶을 무겁게 만들고 있다는 감각만은 분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조차 말하기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돈이 필요해 전화를 걸었다가도 엄마의 반응이 조금이라도 불편해 보이면 금세 괜찮다고 둘러댔다.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 말로 상황을 모면했고, 아픈 날에도 가능하면 참는 쪽을 선택했다.


이런 습관은 집 밖에서도 이어졌다.

누군가와 단둘이 있으면 상대가 지루해하지 않는지 살폈고, 침묵이 길어지면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이 상대에게 짐이 될까 하는 두려움에 먼저 자리를 피하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그녀는 말이 없는 남자들과 사랑에 빠졌다. 상대가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 그 침묵 속에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을 집어넣었다.


엄마는 딸에게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주었다.


큰 집, 여행, 옷, 선물, 돈.


그러면서 그것을 위해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희생하고 있는지도 함께 이야기했다.


딸이 엄마에게 받은 것은 언제나 받은 것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그 뒤에는 항상 자신이 엄마에게 무언가를 빚지고 있다는 감각이 따라왔다.

그녀는 그녀를 따라다니는 부채감을 '무한의 빚'이라고 불렀다.


엄마는 아이를 먹이고 입히고 재웠다는 사실을 내세울 수 있었고, 자신이 얼마나 많은 것을 주었는지를 다시 꺼내 보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받은 것들은 어느 순간 사랑의 증거에서 갚아야 할 빚으로 모습을 바꾸기도 했다.


문제는 그 빚에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딸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그 셈법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자신에게 삶을 희생했다는 사실, 수많은 밥을 먹였다는 사실, 함께 휴가를 갔다는 사실, 선물을 주고 돈을 보탰다는 사실,

그 모든 것이 정말 딸이 언젠가 돌려주어야 할 빚이었을까?


딸이 서른이 되어 엄마에게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을 때도, 이 오래된 셈법은 사라지지 않았다.


계기는 오히려 사소했다.

엄마는 딸이 출연한 방송을 보고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는 바카라 이야기를 하러 나온 딸에게 조금 더 섹시한 옷을 입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이유도 간단했다. 남자아이처럼 보인다는 이유였다.


딸은 엄마가 자신의 바카라을 제대로 읽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바카라의 내용보다 그것을 쓴 성공한 딸이 엄마에게 더 중요하게 느껴진 순간을 수도 없이 겪어왔다.


그날도 처음에는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크리스마스에 가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이번에는 글을 써야 한다는 핑계도 붙이지 않았다.


뒤이어 엄마의 메시지가 쏟아졌다.

자신을 돌아보라는 말,
상담을 받아보라는 말,
네가 너무 예민하다는 말.


딸은 결국 조금 더 멀리 나아갔다.


더 이상 엄마를 보고 싶지 않아


아주 짧은 문장이었지만, 그 말을 하는 데 30년이나 걸린 것이다.

이 일이 있고 불과 몇 주 뒤에 엄마의 엄마가 돌아가셨다.


새해 첫날 딸은 바닷가로 향하는 기차 안에 있었다. 엄마와 연락하지 않은 지 약 2주가 지났을 때였고, 이번에는 정말 관계를 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조금씩 믿기 시작하던 때였다.


그때 휴대전화에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할머니가 병원에 있고 위독하다는 내용이었다.


딸에게 가장 먼저 든 감정은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피로였다.


엄마는 언제 파리로 돌아올 것인지 물었다. 필요하면 기차표를 바꿔주겠다고 했다.


조금 전까지 엄마의 딸이기를 포기하겠다고 했는데, 외할머니가 쓰러지는 순간 세 사람의 자리가 다시 정해져 버린 듯했다.


죽어가는 한 여자에게는 딸이 있었고, 그 딸에게도 다시 딸이 있었다.


외할머니.

엄마.

그리고 자신.


마치 오래전부터 그 자리에 서도록 정해져 있었던 것 같았다.


딸은 작은 몸부림으로 저항해 보았다. 바닷가에 더 머물고 싶었고, 사랑하는 사람과 보낼 시간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미워하는 엄마가 자신이 미워하는 엄마를 돌보는 일을 돕기 위해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싫었다.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자신이 사랑하지 않는 엄마를 돌보며 살아왔을까?'


얼마나 많은 딸들이 속으로는 도망치고 싶어 하면서도 그녀들의 엄마를 위해 밥을 차리고, 병원에 데려가고, 장례식의 꽃을 주문했을지에 슬픔이 몰려왔다.


그리고 며칠 동안 엄마는 죽은 자신의 엄마에게 입힐 옷을 사러 다녔다.

장례식에 어울리는 옷을 고르고, 꽃을 정하고,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다.

생전에 돈독했다고 말할 수 없었던 관계였지만 장례만큼은 제대로 치르려고 했다.


그리고 딸에게도 그 의무를 나누어주었다.


딸은 장례식에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크게 화를 냈다.

어떻게 네 할머니의 장례식에 오지 않을 수 있느냐고.

결국 딸은 가겠다고 대답했다.


성당 가장 앞 줄, 딸은 가족을 위해 준비된 자리에 앉고 싶지 않았다.

기도를 따라 하지 않았고, 성호도 긋지 않았다.

가능한 한 뒤쪽에 머물고 싶었다.


그렇게 아주 작은 방식으로 자신과 가족 사이에 거리를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묘지에서 엄마가 울고 있는 모습을 보자 다가가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속으로는 엄마여서 안은 것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자신의 엄마를 잃고, 울고 있는 한 여자였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함께 붙였다.

두 사람은 그렇게 잠시 서로의 역할에서 벗어나 엄마와 딸이 아니라, 죽음 앞에 서 있는 두 여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삼십 년 동안 몸에 익힌 관계가 단숨에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장례식장에서 딸은 세 여자를 바라보았다.


할머니와 엄마와 자기 자신.


생전 세 사람이 식당 테라스에 앉아 있는 모습만 본 사람이라면 평범한 가족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가장 나이 든 여자는 늘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의 딸은 자신이 처한 처지와 지금 자신이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지를 끊임없이 이야기했다. 손녀는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이 어떻게든 폭발하지 않게 누그러뜨리려 안전부절 했다.


하지만 같은 사람을 두고도 세 여자의 기억은 서로 달랐다.

엄마는 자신의 엄마를 괴물이라고 불렀다.

딸은 오랫동안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자신이 기억하는 할머니는 다정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목소리를 높이는 일도 거의 없었고, 작은 정원에서는 함께 산딸기를 따주었다. 손녀를 보며 늘 '나의 작은 태양'이라고 불러주기도 했다.

그래서 딸에게 외할머니와 괴물이라는 말은 좀처럼 하나로 겹쳐지지 않았다.


그러나 할머니가 죽고, 장례식장에 누워 있는 얼굴을 바라보면서 처음으로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게 되었다.

자신에게는 다정했던 이 여자가 엄마에게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알지 못했던 시간 속에서 엄마의 역시 이 여자 때문에 오래 아팠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리고 이 셋이 하나의 몸에 붙은 세 개의 머리 같이 느껴졌다. 그 순간 무엇인가가 할머니에게서 엄마에게로, 엄마에게서 자신에게로 흘러들어 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엄마는 자주 말했다.

너는 나와 같다고.

그러니 너도 많이 고통받을 거라고.


딸은 엄마의 말이 예언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자신이 이어받게 될 것이라는 의미 같았다.

딸은 그 사실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지만, 동시에 최선을 다해 거스르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다른 후보작 엠마 마르상트(Emma Marsantes)의 『내 원을 지우지 마(N’efface pas mes cercles)』에 따른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살갗을 벗기다』에서는 자신이 마주한 가족의 굴레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어떻게든 멀어지려는 딸을 보여주었다면, 이번에는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오히려 가족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미아(Mia)가 등장한다.


소설은 1980년 10월 8일에서 시작한다. 파리 서쪽 뇌이쉬르센(Neuilly-sur-Seine)의 부유한 아파트에서 한 여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녀의 이름은 엘사(Elsa), 바로 미아의 엄마였다.


엄마는 왜 죽음을 선택했을까?

미아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시간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그렇게 소설은 4대에 걸친 그녀의 가족이 겪어온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 안에는 한 가족의 사적인 비극만 있었는 것은 아니었다. 전쟁과 식민지, 가부장적인 가족 질서와 계급 갈등, 그리고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까지 한 세기의 역사가 가족의 삶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이야기 가운데 미아의 아버지 베르트랑(Bertrand)의 삶은 가족에게서 무언가를 물려받는다는 사실이 갖는 의미를 가장 잘 보여준다.


베르트랑은 브라타르(Bratard) 가문이었다. 브라타르 가문은 프랑스 서부 대서양 연안의 포르니크(Pornic)에는 '레 그랑 셴(Les Grands Chênes)'이라는 넓은 영지를 소유하고 있을 만큼 부유했다.


20세기 초, 그들에게는 여섯 딸과 막내아들이 있었다. 여섯 딸 끝에 태어난 유일한 아들의 이름은 베르트랑이었다.


그는 오랫동안 기다려온 남자 후계자였다. 하지만 어린 베르트랑은 다섯 살에 사고로 물에 빠져 죽고 만다.


한 아이의 죽음은 그 자리에서 끝나지 않았다.

남은 여섯 자매에게 새로운 의무를 안겨 주었다.

이들 중 누군가는 다시 가문을 이어받을 남자 후계자를 낳아야 했다.


말로 정해놓은 규칙은 아니었지만, 가족 안에 남은 암묵적인 명령과도 같았다.


그리고 여섯 자매 가운데 조제핀(Joséphine)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다. 가족은 그 아이에게 외삼촌의 이름을 그대로 물려주었다.


베르트랑.


한 아이가 죽은 자리에서 다른 아이가 같은 이름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이름만 물려받은 것이 아니었다. 새로운 베르트랑의 미래는 그가 자신의 삶을 선택해 보기도 전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좋은 학교에 진학하고,

사업가가 되는 되는 법을 배우고,

언젠가는 가업을 이어받아야 했다.


외할아버지는 손자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일찌감치 그려놓았다. 그렇게 베르트랑에게는 이름과 함께 그의 자리가 함께 주어졌다.


마르상트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 시대의 남자들이 물려받았던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1900년 무렵 남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이름만 받는 일은 아니었다. 가문의 이름을 이어받고, 그 이름에 걸맞게 성공하고, 자신에게 전달된 것을 다시 다음 세대로 전달해야 했다.


베르트랑이 물려받은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미 존재하지 않는 누군가의 이름 하나를 물려받은 것 이상으로 그는 그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까지 함께 상속받았다.


미아가 가족의 시간을 더 오래 거슬러 올라갈수록 이런 사람들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벼락에 맞아 죽은 증조부, 물에 빠져 죽은 아이, 병으로 젊은 남편을 잃은 사람, 전쟁에서 죽은 사람, 당시의 정신의학과 치료 때문에 삶이 훼손된 여자도 있었다.


그리고 죽은 사람 뒤에는 언제나 살아남은 사람이 있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그 이후의 삶을 계속 살아야 했다.






엄마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딸과 엄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들여다보는 딸.

이 둘은 정반대지만, 그 끝에서 마주한 것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가족 안에 존재하고 있던 것들,
누군가의 상처와 두려움,
이름과 그 이름에 걸맞은 역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빚과 바카라임까지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너무 많은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는 사실과 마주하게 된 것이다.


개인은 사라져도 이름은 이어진다.

역할이 남고, 말투와 습관은 다음 세대로 넘어간다.

그리고 위가 아래에 남긴 기대와 두려움까지.


누구는 가족에게서 멀어지면서 자신에게 붙어 있던 것을 짚어내고, 또 다른 누구는 가족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 자신에게 오기 전부터 존재했던 것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렇게 알아차리고서야 조금씩 어디까지가 자신에게서 시작된 것인지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슈느비에르의 딸은 엄마에게서 받은 것을 모두 부정하지 않는다. 장례식장에서 울고 있는 엄마를 결국 안아주고, 할머니가 남긴 유산도 받기로 한다.

마르상트의 미아 역시 과거를 지우기보다 오히려 더 오래 들여다보는 쪽을 선택한다.


우리는 흔히 부모가 어느 순간 안쓰러워 보이기 시작하면, 철이 든 것이라고 말한다.

치부까지 알고 있었다고 믿었던 부모가 사실은 자신보다 먼저 태어나 조금 더 오래 살아온 한 개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아버리는 순간, 우리는 그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조금은 이해하게 되고, 조금은 연민하게 되는 찰나,

우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조금 슬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