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가 사라진 자리

『Le fabuleux piano』와 mémocide

1944년 11월 25일, 자크 에녹(Jacques Enoch)은 파리 쿠르셀(Courcelles)가 164번지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자크의 부모님은 1년 전에 바로 이 집에서 프랑스 경찰에게 체포되어 돌아오지 못했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창문의 덧문을 열자 방 안으로 빛이 들어왔다. 그러나 빛이 비춘 집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가구와 바카라, 벽에 걸려 있던 그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욕실의 선반과 거울, 벽난로를 둘러싼 장식까지 모두 뜯겨나간 뒤였다. 거실의 두꺼운 문짝마저 사라져 있었다. 그것을 떼어내기 위해 얼마나 거칠게 힘을 주었는지, 문이 있던 자리에는 억지로 뜯어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자크는 집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텅 비어있는 방들은 어두웠고, 조용했고, 바닥에는 먼지만 쌓여 있었다.


부모가 집에서 사라진 뒤에도 쿠르셀가 164번지는 파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문을 열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방들을 마주한 순간, 자크는 그들이 살아온 시간마저 누군가에 의해 통째로 걷혀나간 듯 느껴졌다.


그러다 거실에 들어선 자크의 시선이 바닥 한 곳에 멈췄다. 가구는 모두 사라졌지만, 그곳에는 무언가 무거운 것이 오랫동안 놓여 있었던 자국이 남아 있었다.


자크는 거실 한가운데에서 무릎을 굽혔다.


바닥에는 커다란 피아노의 다리가 오랫동안 눌러놓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두꺼운 동양식 카펫을 깔아 두었는데도 피아노의 무게는 마룻바닥에 희미한 홈을 남겨 놓았다.


자크는 그 자리에 손을 올렸다.


그러자 어린 시절의 자신이 떠올랐다. 거대한 에라르 앞에 앉아 건반을 하나씩 장난스럽게 두드리던 자신과, 그 모습을 보며 웃던 아버지였다.


이제 아무 소리도 남아 있지 않은 방에서 자크는 머릿속을 음악으로 채웠다. 그래야 조금은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소니아 드빌레르(Sonia Devillers)의 『전설의 피아노(Le Fabuleux Piano)』는 작가 자신의 가족이 잃어버린 피아노에서 시작해, 또 다른 가족이 빼앗긴 피아노를 따라가는 작품이다.


소설은 작가 드빌레르의 외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루마니아에서 피아니스트로 살았던 그녀는 1961년 가족과 함께 부쿠레슈티를 떠나면서 평생 연주해 온 그랜드피아노를 두고 와야 했다.


프랑스에 정착하고, 파리의 아파트에서는 다른 업라이트 피아노가 있었지만, 부쿠레슈티에 남겨두고 온 그랜드피아노는 외할머니가 떠나온 삶과 함께 오래도록 그 의미를 이어가고 있었다.


드빌레르는 그 피아노의 행방을 알고 싶었다. 하지만 피아노를 특정할 수 있는 어떤 정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피아노에는 제작사와 제작 연도를 확인할 수 있는 고유한 일련번호가 있다. 사람에게 주민등록번호가 있는 것처럼, 같은 모델로 만들어진 수많은 피아노 가운데 정확히 그 한 대만을 특정할 수 있는 숫자가 존재했다. 그 일련번호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피아노의 행방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가정에서 약탈된 피아노가 수없이 많고, 또 아직 이전 주인에게 돌아오지 않은 피아노를 전문적으로 추적하는 연구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드빌레르는 우연히 그 연구자가 올린 한 피아노의 수배 공고(avis de recherche)를 보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 에라르(Erard)사의 콘서트용 그랜드피아노를 찾고 있었다. 장미목으로 만들어진 아름다운 피아노로, 파리에서 악보와 음악 작품을 출판하던 에녹 가문이 소유하고 있었고, 1943년에 나치에게 빼앗겼다고 했다. 수배 공고의 끝에는 그 피아노를 특정하는 일련번호 하나가 적혀 있었다.


68037


그때부터 작품은 외할머니의 잃어버린 피아노를 찾는 대신, 68037이라는 숫자를 따라 에녹 가문의 과거로 들어간다.


소니아 드빌레르


작품은 피아노를 주문한 빌헬름 에녹(Wilhelm Enoch)에서 그의 아들 다니엘(Daniel), 그리고 다니엘의 아들 자크로 이어지는 세 세대의 시간을 복원하는 과정을 그린다. 오래된 장부와 사진, 편지와 수첩을 통해 이루어지는 여정은 현재의 조사 과정과 과거의 가족사를 오가며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사라진 피아노와 함께 그 주변에 있었던 인물들이 하나씩 모습을 드러내는 구조이다.


여정의 시작은 피아노가 만들어지기 한참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빌헬름 에녹(Wilhelm Enoch)은 독일에서 프랑스로 이주한 유대인이다.


아버지 카를(Carl)은 가족과 함께 파리로 이주한 뒤 한 악보 가게에서 판매원으로 일했다. 어린 빌헬름과 형제들도 인쇄소에서 넘어온 악보 묶음을 나르며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를은 자신의 악보 가게를 열었고, 1853년부터는 다른 출판사의 악보를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작곡가들의 작품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빌헬름은 아버지 곁에 남아 출판 사업을 함께 키워갔다. 이후 가업을 이어받은 그는 새로운 작곡가와 작품을 발굴하고, 그들의 음악을 출판하고 유통하며 에녹 출판사를 파리의 영향력 있는 음악출판사로 성장시켰다.


그렇게 아버지 곁에서 음악과 함께 성장한 빌헬름은 어느덧 자신이 오래 바라보던 피아노를 직접 고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1890년의 어느 비 오는 가을날, 쉰 살이 된 그는 파리의 에라르 매장을 찾았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진열된 피아노를 바라보던 소년이, 이제는 자신의 피아노를 선택하기 위해 같은 곳을 찾은 것이다.


그가 고른 것은 에라르의 거대한 콘서트용 그랜드피아노였다.


길이 2미터 48센티미터,

일곱 옥타브,

장미목으로 만든 외장,

모델 번호 2,

그리고 이 피아노에는 다른 무엇과도 구별할 수 있는 하나의 번호가 붙었다.


68037


피아노의 제작이 시작되자 빌헬름은 공장을 여러 번 찾아갔다. 어떤 목재가 사용되는지 살펴보았고, 장인들이 하나씩 부품을 만들고 조립하며 거대한 악기를 완성해 가는 과정을 직접 지켜보았다.


그 사이 68037이라는 숫자도 피아노 곳곳에 남겨졌다. 목재와 금속 부품, 완성된 뒤에는 쉽게 눈에 띄지 않을 자리에도 같은 번호가 새겨졌다. 수천 개의 부품으로 이루어진 악기 곳곳에 남겨진 숫자는 이 피아노가 다른 어떤 피아노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흔적이 되었다.


1892년 1월 12일, 마침내 피아노가 완성되었다.


공장의 기계 소리가 멎고 장인들이 모인 가운데 마지막 조율을 맡은 작업장 바카라임자가 외투를 갈아입고 완성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낮은음에서 시작한 소리가 중간 음을 지나 높은음까지 이어지며 공장 안을 채웠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빌헬름은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완성된 68037은 마차에 실려 에녹 출판사가 있던 파리 불바르 데 이탈리앵(Boulevard des Italiens)으로 옮겨졌다. 빌헬름은 그곳에 예술가와 중요한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한 방을 마련하고 피아노를 놓았다.


매주 수요일이면 에녹의 집에는 음악가들이 모였다. 가브리엘 포레와 카미유 생상스, 루이 디에메르 같은 음악가들이 피아노 앞에 앉았고, 가족과 손님들은 피아노 주변에서 음악을 들었다.


출판사를 통해 이어진 인연도 넓어졌다. 빌헬름은 젊은 모리스 라벨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의 첫 작품을 출판하면서, 라벨과의 오랜 관계를 시작했다.


1913년 빌헬름이 세상을 떠난 뒤 피아노는 아들 다니엘의 집으로 옮겨졌다. 파리 쿠르셀가 164번지의 거실에 놓인 거대한 에라르는 방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했다. 다니엘의 아내 안나는 그 앞에 앉아 연주했고, 두 아들 자크와 로베르도 어린 시절 그 피아노로 연습했다.


자크가 성인이 되어 출판사 일을 맡게 된 뒤에도 주변에는 음악과 예술가들이 끊이지 않았다.


68037은 그렇게 빌헬름이 선택한 한 대의 피아노에서 시작해, 다니엘의 집과 자크의 어린 시절까지 에녹 가족의 여러 시간을 함께 지나왔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 이어지던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프랑스의 유대인들은 조금씩 일상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갈 수 없는 장소가 생겨났고, 할 수 없는 일은 점점 늘어났다. 그들은 타고 다니던 자전거를 내놓아야 했고, 극장과 영화관, 식당과 카페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 외출할 때는 옷에 노란 별을 달아야 했다.


이러한 통제는 다니엘과 안나의 생활도 점점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다니엘은 자신을 평생 프랑스인으로 살아왔다고 믿었기에 노란 별을 달기를 거부했다. 하지만 별을 달지 않은 채 밖으로 나가면 언제든 경찰에게 붙잡힐 수 있었다. 통행과 이동까지 제한되면서 두 사람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는 점점 좁아졌다.


결국 다니엘과 안나는 쿠르셀가의 집에 숨어 지내다시피 했다. 이미 나이가 들고 병을 앓고 있던 다니엘에게 다른 도시의 이주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렇다고 집 안에 머무는 것이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도 아니었다.


1943년 10월 8일 아침, 네 명의 프랑스 경찰이 그들의 집을 찾아왔다. 체포는 소란스럽지 않게 이루어졌다. 다니엘과 안나는 외투와 모자를 챙기고 몇 가지 물건을 급하게 챙기고 집을 나섰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두 사람은 드랑시(Drancy) 수용소로 보내졌다.


두 사람은 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열차에 올랐고, 다니엘과 안나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사람이 사라진 뒤에는 집 안에 남아 있던 것들의 차례였다.


당시 나치는 체포되거나 피신한 유대인의 집을 조직적으로 비우고 있었다. 독일어로 Möbel Aktion, 프랑스어로 opération Meubles로 '가구 작전'이라고 불렸다.


사람이 떠난 집에 인부들이 들어가 안에 있는 것들을 하나씩 걷어냈다. 침대와 장롱, 식탁과 의자, 전등, 접시와 컵, 커튼과 바카라, 벽에 걸린 그림까지.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물건이나 별것 아닌 장식품도 남겨두지 않았다. 집은 지하실에서 다락까지 비워졌다.


피아노도 예외가 아니었다. 오히려 악기는 따로 분류되어 처리되었다.


유대인 음악가와 출판업자들이 음악계에서 밀려나는 동안, 그들이 소유했던 피아노를 비롯한 다른 악기들도 함께 압수되었고, 파리 곳곳에는 그렇게 빼앗은 악기들을 모아두는 장소가 생겨났다.


그곳에는 수백 킬로그램에 달하는 그랜드피아노들이 옆으로 눕혀진 채 빽빽하게 놓여 있었다. 그중 일부는 독일로 보내졌고, 일부는 군이나 기관에 배치되거나 권력을 가진 누군가의 손에 넘어갔다.


에녹 가족의 68037도 그 과정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전쟁이 끝났다. 하지만 사라진 사람들이 모두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빼앗긴 물건들도 모두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다.


자크는 부모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한편, 가족의 피아노도 찾기 시작했다.


1945년 봄, 신문에는 전쟁 중 빼앗겼던 피아노의 주인을 찾는다는 기사가 실렸다. 파리에만 2천 대가 넘는 피아노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자크는 곧바로 편지를 썼다. 자신이라면 수많은 피아노 사이에서도 가족의 피아노를 알아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손보지 않아 조금 흔들리던 페달.

오른쪽 뚜껑에 남은 작은 흠집.

어머니 안나의 취향에 맞춰 따로 만든 보면대.

키가 크지 않았던 아버지 다니엘에게 맞게 손본 의자.


피아노를 구별할 수 있는 특징을 하나씩 적어 내려가다 보니, 그 목록에는 자연스럽게 가족의 생활이 함께 따라 나왔다. 어머니를 위해 만든 보면대와 아버지에게 맞게 손본 의자, 오래 사용하면서 생긴 흠집과 흔들리는 페달까지, 자크가 기억하고 있던 것은 피아노의 외형만이 아니라 가족이 그 악기와 함께 살아온 방식이었다.


편지를 보낸 뒤에도 자크의 수색은 계속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피아노 가운데 68037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던 1945년 5월 31일, 그는 파리의 보관소에서 에라르 피아노 한 대를 받아 쿠르셀가의 집으로 가져왔다. 빌헬름이 주문했던 68037 같은 거대한 콘서트용 피아노보다 훨씬 작은 모델 33, 당시 흔히 '크라포(crapaud)'라고 불리던 그랜드피아노였다.


결국 68037은 돌아오지 못했다.

작품이 끝나는 순간까지도 피아노의 행방은 알려주지 않는다.






전쟁이 끝나고 약 50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이 벨로드롬 디베르 대규모 검거(벨 디브, La Rafle du Vélodrome d'Hiver) 사건에 대한 프랑스 국가의 바카라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리고 유대인 재산 약탈을 조사하는 마테올리 조사위원회(Mission Mattéoli)가 꾸려졌다.


조사에 참여한 연구자들에게 피해자와 그 가족들이 보낸 수많은 편지가 모여들었다. 프랑스 유대인들이 보내온 편지에는 값비싼 그림이나 은행 계좌만 쓰여 있는 것은 아니었다. 편지에는 빈 아파트, 사라진 가구, 비어버린 서재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는데, 그들이 거듭 호소한 것은 집 안에서 사라진 일상의 흔적이었다.


벨 디브 사건(La Rafle du Vélodrome d'Hiver)은 1942년 7월 15일 밤부터 16일 새벽까지, 나치 점령하의 파리에서 프랑스 경찰 약 9,000명이 대규모로 유대인을 체포한 사건이다. 12,884명의 프랑스 유대인들이 체포되었고, 그중에는 어린이 4,051 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파리의 실내 경기장인 벨로드롬 디베르에 며칠간 감금된 뒤 드랑시 수용소를 거쳐 아우슈비츠로 보내졌다. 그들 대부분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역사가 아네트 비비오르카(Annette Wieviorka)는 이 약탈을 설명하며 mémocide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기억을 뜻하는 mémoire에 살해를 뜻하는 -cide를 이어 붙인 단어, '기억의 말살'이다.


그녀가 주목한 것은 기억이 장소와 사물에 기대어 존재한다는 점이다.


누군가가 살았던 방, 앉았던 의자, 읽었던 바카라, 손때가 묻은 서랍과 창가에 놓여 있던 식탁 같은 것들은 그 사람을 다시 기억하게 만드는 매개가 된다.


그리고 이런 흔적까지 없애는 일이 결국 그 사람을 기억할 수 있는 기반 자체를 지우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유대인의 집을 비우는 일은 단순히 재산을 빼앗는 데서 끝나지 않았다. 사람이 돌아오더라도 자신이 살았던 방과 가족이 사용하던 물건, 그 안에서 이어지던 생활의 흔적까지 다시 찾을 수 없게 만드는 일이었다.


자크가 쿠르셀가 164번지의 문을 열었을 때 마주한 것도 바로 그런 빈자리였다.


부모는 없었고, 그들이 사용하던 물건도 사라져 있었다. 집 안에는 한 가족이 이곳에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보여줄 만한 것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집을 비운 사람들도 마룻바닥까지 가져가지는 못했다.


거실 바닥에는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던 피아노가 눌러놓은 희미한 홈이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