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엄마라는 가장 오래된 사랑

모성애와 돌봄의 의무 (사랑, 그리고 더, 아기, 얼어붙은 여자)

아이가 울기 시작하면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엄마에게 향한다. 아이가 왜 우는지, 어떻게 달래야 하는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듯한 시선이다. 그리고 아이의 울음으로 생겨난 소란은 어느새 엄마가 해결해야 할 문제가 된다.


우리는 이 자연스러움을 좀처럼 의심하지 않는다. 엄마라면 아이가 왜 우는지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아차릴 것이라고, 자신의 피로보다 아이의 불편함을 먼저 느낄 것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그것을 모성이라고 부른다.


아이를 향한 엄마의 사랑을 본능처럼 여기고, 때로는 신성한 감정인 것처럼 말한다. 그 사랑 앞에서 피곤함도, 원망도, 잠시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그런 감정을 품는 순간, 엄마는 아이를 충분히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닌지, 자신이 좋은 엄마가 아닌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


엘리자베트 바댕테르의 『사랑, 그리고 더(L’amour en plus)』는 바로 이러한 믿음을 흔드는 작품이다.


바댕테르는 모성애가 모든 여성의 몸속에 처음부터 새겨져 있는 본능이 아니라고 말한다. 모성애는 다른 사랑과 마찬가지로 생겨날 수도 있고, 생겨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점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시대가 바뀌고 가족의 형태가 달라지면서 슬롯가 아이와 여성을 바라보는 방식이 변할 때마다 어머니가 아이를 대하는 방식도 달라져왔다.


그럼에도 우리는 오랫동안 모성애라는 이미지를 엄마가 되는 순간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처럼 말해왔다.


여자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저절로 알아차리고, 아이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어주고, 하루 종일 아이 옆에 붙어있어야 하는 노동과 피로와 관심과 희생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기꺼이 견딜 수 있는 바카라임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바댕테르가 보여주는 역사는 전혀 다른 방향을 가리킨다.


1780년 파리에서는 한 해 약 2만 1천 명의 아이가 태어났지만, 그중 어머니가 직접 젖을 먹인 아이는 1천 명 남짓에 불과했다. 또, 다른 1천 명 정도는 집에서 생활하는 유모의 젖을 먹었고, 나머지 1만 9천 명은 파리 근교나 그보다 더 먼 지방의 유모에게 보내졌다.


형편이 나은 집의 아이들은 비교적 가까운 곳으로 갔지만, 그렇지 못한 부모들은 더 먼 곳에 있는 유모에게 아이를 맡길 수밖에 없었다. 어떤 아이들은 엄마의 얼굴을 알아보기도 전에 집을 떠나야 했다. 그중 많은 수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런데 이 통계가 기록된 1780년은 프랑스 슬롯에서 어머니의 역할을 둘러싼 새로운 담론이 이미 퍼지기 시작한 뒤였다.


18세기 후반에 들어서자 수많은 바카라과 의학서, 교육론은 어머니가 직접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곁에서 돌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1762년 루소가 『에밀』을 출간하면서 이러한 주장은 더욱 강력한 힘을 얻었다.


변화의 중심에는 아이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이 있었다. 그전까지 가족은 아버지와 남편의 권위를 중심으로 유지되는 질서였다. 아이는 아버지에게 복종해야 하는 작고 어리숙한 존재로 여겨졌다.


그러나 18세기 후반부터 아이의 생존이 슬롯와 국가적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아이는 살아남아야 할 생명이자 교육되어야 할 인간이었고, 장차 국가의 인구와 부를 이루게 될 구성원으로 간주되기 시작했다.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관심은 곧 여성에게로 향했다. 아이를 먹이고 건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슬롯적 과제는 여성이 직접 아이를 돌보는 것이 좋다는 논리로 이어졌다. 철학자와 의사, 행정가와 성직자들은 엄마가 직접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양육해야 한다고 반복해서 설명했다.


그 과정에서 이전에는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았던 '좋은 어머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좋은 엄마는 아이를 낳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직접 젖을 먹이고, 아이를 돌보고, 건강을 바카라임지고, 독립된 개인으로 양육하는 모든 과정을 바카라임졌다. 그 과정에서 희생은 정당화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주장이 등장했다고 해서 현실이 곧바로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루소가 1762년 『에밀』을 통해 새로운 어머니의 모습을 제시했지만, 여성들의 생활 방식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직접 아이를 돌보는 일이 하나의 관습으로 자리 잡기까지는 수십 년이 필요했고, 기존의 양육 방식이 상당 부분 달라지는 데에는 거의 한 세기가 걸렸다.


변화의 속도는 계층에 따라서도 달랐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여성들을 중심으로 아이를 곁에 두고 직접 젖을 먹이는 이들이 조금씩 늘어났다. 여기에 슬롯적으로 엄마가 아이를 직접 돌보는 모습은 사랑과 헌신의 모습으로 칭송되었다.


하지만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했던 여성들에게는 아이를 직접 양육하겠다는 선택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아이를 돌보기 위해 일을 멈추면 가족 전체의 생존이 위태로워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 중반까지도 도시 노동계층과 서민층에서는 아이를 시골의 유모에게 보내는 관습이 남아 있었다. 1907년에도 약 8만 명, 대도시에서 태어난 신생아의 30~40퍼센트가 여전히 시골에 맡겨졌다.


한편 여성에게 요구되는 양육의 바카라임은 더욱 넓어졌다. 이제 여성은 아이를 낳고 젖을 먹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아이의 성격과 습관을 살피고, 도덕과 종교를 가르치고, 올바른 슬롯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해야 하는 바카라임까지 져야 했다.


'엄마는 원래 헌신적인 존재'라는 믿음은 슬롯적 바카라임과 자부심을 안겨주기도 했다. 아이를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 가족뿐 아니라 슬롯의 운명까지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은 모성애를 더욱 자극했다.


이때부터 모성은 사랑의 이름을 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하나의 과제가 되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그 사랑은 행동으로 증명되어야 했다. 어머니는 아이 곁에 있어야 했고, 자신의 시간을 내주어야 했고, 피로와 불편을 참고 견뎌야 했다. 무엇보다 그 모든 일을 힘들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해내야 했다.


엄마가 아이를 사랑한다는 말은 어느새 엄마라면 아이를 위해 자신을 뒤로 미뤄야 한다는 말로 바뀌었다. 사랑은 감정이었지만, 그 감정은 슬롯의 언어 속에서 의무로 번역되었다.


*


또 다른 작품, 마리 다리외세크의 『아기(Le Bébé)』는 그렇게 하나의 규범이 된 모성이 실제 여성의 몸과 하루에 어떤 모습으로 도착하는지를 보여준다.


바댕테르가 모성애를 본능으로 만들어온 역사를 거슬러 올라갔다면, 다리외세크는 한 여자가 직접 아기를 낳고 돌보는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그녀가 경험한 모성은 추상적인 사랑이나 숭고한 헌신의 모습과는 달랐다. 수유와 잠, 기저귀와 울음으로 잘게 나뉘는 구체적인 시간표로 짜인 하루였다.


아기가 태어난 뒤 그녀의 하루는 아주 작은 단위로 쪼개졌다. 젖을 먹이고, 기저귀를 갈고, 다시 잠들게 하는 데 한두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에 한두 시간 잠을 자고 나면 같은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낮과 밤의 구분도 흐려졌다.


아기가 잠들면 그녀의 삶은 잠시 다시 시작되었다. 그러나 아기가 깨어 있는 동안에는 하루의 중심이 온통 아기 쪽으로 기울어졌다.


그래서 그녀는 아기가 잘 때 글을 썼다.


이 짧은 문장 안에는 출산 이후 글 쓰는 여성에게 주어진 시간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글을 쓰는 시간은 더 이상 온전히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아기의 잠에 기대어 잠시 생겨나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아기가 잠결에 몸을 움직이기만 해도 노트를 펼쳐둔 채 곧바로 일어나 아이에게 향했다.


다리외세크는 더 노골적으로 아기가 자신의 글쓰기를 방해한다고 적었다. 아기가 젖을 먹기 때문에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일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모성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사랑만이 아니었다. 먹이고, 안고, 젖을 물리고, 다시 잠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여성의 몸과 생활은 아기의 몸에 맞추어 끊임없이 적응해야 했다.


그녀를 지치게 하는 것이 아기뿐인 것은 아니었다. 아기를 먹이고 재운 뒤에도 집은 그대로였다. 청소와 장보기, 요리와 식탁 차리기, 식기세척기 비우기, 빨래 널기와 시트 정리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리외세크는 자신을 지치게 하는 것은 아기 자체가 아니라 끝없이 이어지는 살림이라고 했다.


아기를 돌보는 일과 집안일은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 아이가 잠든 시간은 밀려 있던 다른 일을 처리하는 시간이 되었다.


그녀의 시선이 흥미로운 것은 모성을 아름답게만 쓰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어느 순간 그녀는 자신이 아기에게 행사하는 힘이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아기는 너무 작고 연약해서, 자신의 생존을 전적으로 자신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자신이 안아주지 않으면 아기는 움직일 수 없었고, 먹여주지 않으면 먹을 수 없었다. 울어도 누군가 반응해 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 절대적인 의존 앞에서 그녀는 보호본능만을 생각하지 않았다. 아기를 유기하는 일 또한 놀라울 만큼 간단할 수 있다는 섬뜩한 감각을 함께 느꼈다.


그녀는 슈퍼마켓이나 해변에 아기를 두고 오는 꿈을 꾸기도 했다. 빈 유모차를 발견한 뒤 그대로 달아나기도 했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이제 자신에게 가장 금지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도망치는 것, 사라지는 것, 아무도 자신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리외세크는 이런 상상을 곧바로 죄바카라감이나 모성의 결함으로 몰아가지 않았다. 아기의 냄새와 체온, 젖을 먹고 난 뒤의 얼굴, 잠든 아기를 바라보는 순간만큼은 무엇보다 강렬한 경험이었다.


아기가 잠에서 깨어 울기 시작하면, 그녀는 달려가 품에 안아주었다. 아이는 마지막 흐느낌을 토해낸 뒤 조금씩 진정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를 구해냈다는 성취감을 느꼈다. 그녀는 어쩌면 이 감정이 모성애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끌어안고 싶은 마음은 서로 반대편에 있지 않았다. 피로와 권태가 사라진 자리에만 사랑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다.


아기를 두고 사라지고 싶은 상상과,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을 수 있다는 감정이 같은 사람 안에 함께 존재했다.


*


아니 에르노는 그 의무가 한 여자의 삶을 어떻게 얼어붙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에르노는 처음부터 임신이 여성을 더 완전하게 만든다는 식의 말을 믿지 않았다. 영광스러운 임신도, 아이를 품은 몸에 숭고함이 느껴진다는 말도 그녀에게는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녀는 몸이 변하고 아이가 움직이는 것을 느꼈지만, 그것이 곧바로 모성의 기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임신한 몸을 낯설게 바라보았고, 그 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어딘가 우스꽝스럽고 불편하게 느꼈다.


그녀에게 임신은 상실로 먼저 다가왔다. 예정했던 아프리카 여행은 불가능해졌고, 시험은 조금씩 나중으로 밀려났다. 아이를 누가 돌볼 것인지, 돈은 얼마나 들 것인지 같은 걱정이 먼저 밀려왔다. 그래서 그녀는 출산을 기다리기보다, 오히려 임신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되었다.


그녀는 아직 여자일 뿐, 어머니는 아닌 마지막 시간을 붙잡고 싶어졌다. 출산 이후의 삶은 여섯 번의 수유, 여섯 번의 기저귀 갈기, 그리고 아기의 울음으로 예고되었다.


출산을 준비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하루는 불안을 달래기 위해 아기용품을 사러 갔다. 작은 옷, 턱받이, 딸랑이, 미키와 도널드가 그려진 식기들, 유모차와 아기 의자 같은 물건들이 있었다.


그녀는 그곳에서 설렘보다 비현실감과 퇴행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 작고 화려한 아기용품의 가운데에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는 것 같았다.


결혼보다도 더 강력하게, 아이의 세계가 이제 자신들의 삶을 물건과 시간표와 바카라임으로 바꿔놓을 것을 알고 있었다.


출산 장면 역시 감동적으로 미화되지 않는다. 그녀는 아팠고, 웅크린 짐승 같았고, 어둠 속에 있고 싶었다.


여섯 시간 동안 고통의 파도가 반복되었고, 그녀는 두 마리 말이 자신의 골반을 끝없이 찢는 것 같았다. 그녀는 생명이 탄생하는 기쁨, 엄마가 되는 숭고한 순간, 고통마저 사랑으로 승화되는 경험 같이 찢기는 몸의 고통을 숭고하고 시적인 출산의 언어로 바꾸는 말들을 거부했다.


출산 뒤에도 모성은 그 어떤 충만한 사랑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아이는 태어났고, 그녀는 병실에서 아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갓 세상에 나온 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순간에도 모성이 내 안으로 들어왔다는 식의 감동은 없었다.


오히려 조용한 불안감이 밀려왔다. 아이가 숨을 잘 쉬는지 확인하고, 아이가 이유 없이 죽음을 맞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동시에 부드러운 피부, 노래 같은 옹알이, 처음 웃는 순간 같은 기쁨도 있었다. 에르노는 완벽한 순간들이라고 부르지만, 그 기쁨이 다른 삶의 기쁨들과 대립하지는 않았다.


그녀에게 모성은 절대적이고 유일한 행복이 아니라, 여러 행복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리고 결국 남는 것은 육아였다. 주변 사람들은 그것을 귀엽고 가벼운 말처럼 아기 돌보기라고 불렀지만, 그녀에게는 그 말이 믿기 어려울 만큼 너무 거대하게 느껴졌다.


실제 하루는 여섯 번의 기저귀 갈기와 여섯 번의 젖병으로 리듬이 정해졌다. 모유 수유도 예상했던 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그녀는 슬롯보장 수첩의 가장 좋은 젖은 모유이고, 당신은 그것을 아이에게 빚지고 있다는 명령에 따르려 하지만, 잇몸이 젖을 물어뜯는 순간에 대한 두려움을 끝내 넘지 못했다. 그리고 젖은 열흘 만에 말라버렸다.


아이가 태어난 뒤 자기 시간과 남편의 시간이 완전히 달라졌다. 남편은 낮, 저녁, 토요일과 일요일에 여전히 느슨한 시간을 되찾았다. 『르몽드』를 읽고, 음악을 듣고, 수표바카라을 확인하고, 심지어 지루해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에게 남은 것은 온통 잡다한 일들로 꽉 찬 시간이었다. 빨래를 세탁소에 가져갈 것, 셔츠 단추를 달 것, 소아과 예약, 설탕이 떨어졌다는 사실 같은 일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녀는 이 반복을 시시포스와 비교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시포스가 바위를 밀어 올리는 장면은 적어도 산과 하늘을 배경으로 한 남자의 웅장한 이미지라도 있었다. 부엌에서 1년에 365번 팬에 버터를 넣는 일은 아름답지도, 멋있지도 않았다. 그녀는 아무도 놀라지 않는 반복 속에서 소모되고 있다는 감각에 빠졌다.


그녀는 아이가 낮잠을 자는 동안 오전 한 시간을 비워, 하루의 큰 틈처럼 느껴지는 개인 시간을 얻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그 시간은 언제나 위협받았다. 그 결정적인 시간조차 아들의 낮잠이 결정해 주었다.


낮잠 시간은 엄마에게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먼저 아이의 숨소리를 확인했다. 규칙적인 숨소리와, 침묵을 확인한 뒤부터 아주 깨지기 쉬운 그녀만의 시간이 열렸다.


그녀만의 시간은 자동차 경적소리, 초인종, 계단에서의 대화 소리에도 깨질 수 있었다. 그녀는 아기 침대 주변을 솜으로 감싸고 싶을 만큼 간절했다. 그녀는 그 두 시간 동안 사범 시험 준비를 했다. 하지만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면 매번 다시 얼어붙는 것만 같았다.


모성이 일상의 습관처럼 굳어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당시 고작 스물여덟 살이었고, 둘째까지 키우고 있었다.


그녀는 프랑스어를 세 학급에서 가르쳤고, 장을 보고, 식사를 준비하고, 고장 난 지퍼를 다시 달고, 아이들 신발을 사야 했다. 주변에서는 그녀에게 집안일을 도와주는 사람이 있으니 특권층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그렇다면 남자는 모두 특권층이 아니냐고 받아쳤다.


그녀는 더 이상 예전처럼 연구나 교육 활동에 열정적인 교사가 되기 어렵다고 느꼈다. 남자들이나 미혼 여성들에게나 가능한 일이라고 말했다.


고등학교는 채점과 수업 준비로 엄마의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기 때문에, 결국 여성 교사들이 모든 것을 양립하기 위해 도망치듯 조금 더 쉬운 중학교 쪽으로 가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커리어를 쌓는 일은 남자들에게 맡겨두자는 식이 되기도 했다.


남편은 이미 잘 나가고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모성은 여자의 직업적 야망을 조용히 접게 만드는 가장 현실적 유일한 조건처럼 느껴졌다.


부부는 같은 침대에서 자고, 같은 신문을 읽고, 같은 정치 연설을 같은 위치에서 들었다. 차를 바꾸거나, 다른 아파트를 구하거나, 아이들이 자라면 여행을 가자는 계획도 함께 세웠다. 남편의 결혼은 서로에게 완전한 자유를 제한한다는 말에 둘은 동의하며 기뻐하기도 했다.


겉으로 보면 둘은 비슷했다. 둘은 같은 집에 살았고, 같은 신문을 읽었고, 같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었다. 남편에게 결혼은 추상적인 제한일 수 있었지만, 그녀에게 결혼은 매일의 돌봄과 집안일, 커리어에 대한 제한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 차이를 더 이상 차이라고 느끼지 않게 되는 순간, 불평등은 모성이라는 이름 아래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에르노는 어느 날 갑자기 절망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모든 것이 너무 평범했다. 커피 가는 소리, 냄비 소리, 장보기, 아이 신발, 채점, 식사, 부부의 공통 계획까지 그 반복 속에서 한 여자는 조금씩 굳어져 갔다.


겨울의 어느 날 안시에서 에르노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천천히 걷고 있었다. 역 앞 광장에 있는 분수에는 물이 흐르지 않았고, 유모차 속 아이는 비둘기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런데 이때 그녀는 자신이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건물 외벽, 생프랑수아 학교의 철문, 영화관 같은 것들을 바라보는 시선만 남은 것 같았다.


*


레일라 슬리마니의 『달콤한 노래』의 미리암은 처음부터 아이에게 무관심한 엄마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에는 아이에게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못했다.


첫째 밀라는 약하고 예민한 아기였다. 끊임없이 울었고, 좀처럼 살이 붙지 않았으며, 엄마의 젖도 아빠가 준비한 젖병도 거부했다.


미리암은 아기침대 위로 몸을 숙인 채 바깥 세계가 존재한다는 사실마저 잊어버렸다. 그 시절 그녀의 관심은 밀라의 몸무게를 몇 그램이라도 늘리는 일에 온통 쏠려 있었다. 그 작고 울기 잘하는 아이가 조금이라도 더 먹고, 조금이라도 더 자라는 것이 하루의 유일한 목표였다.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밀라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고, 아이를 위험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뿐이라고 믿었다.


둘째 아담의 임신도 처음에는 그 믿음의 연장선에 있었다.


미리암은 두 번째 임신을 우연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미리 계획한 일이었다. 아담은 집 안의 부드러운 세계를 떠나지 않아도 되는 구실이기도 했다.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도 되는 시간, 가족끼리만 머무는 폐쇄된 안온함을 그녀는 사랑했다.


폴의 눈에 그 시기의 미리암은 거의 동물적인 모성 안에서 충만해 보였다. 집은 세상과 분리된 고치 같았고, 네 사람은 그 안에서 어떤 위험으로부터도 보호받는 듯했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두 아이가 생기자 완벽하게 돌아가는 듯했던 가족의 일상은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장을 보고, 아이들을 씻기고, 병원에 데려가고, 집을 치우는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청구서는 쌓였고, 좁은 아파트는 점점 더 비좁아졌다.


미리암은 공원에 나가는 일조차 싫어하게 되었다. 겨울의 하루는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길었고, 밀라의 투정은 견디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아담의 첫 옹알이조차 더 이상 기쁨으로 들리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녀는 아이들이 자신을 산 채로 먹어치우고 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남편 폴을 질투했다. 저녁이면 문 뒤에서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아이들의 울음과 비좁은 아파트, 자신의 시간이라고는 한순간도 남지 않은 하루에 대해 한 시간씩 불만을 쏟아냈다.


가끔 폴이 녹음실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 미리암은 말했다.


당신은 운이 좋다고.


그러면 폴은 오히려 아이들이 자라는 모습을 매일 볼 수 있는 당신이 운이 좋은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둘 다 틀리지 않았지만, 누구의 말도 완전히 옳지는 않았다. 한 사람에게 아이는 놓쳐버린 시간이었고, 다른 사람에게 아이는 끝없이 남아 있는 시간이었다.


밤이 되면 두 사람의 차이는 더욱 선명해졌다. 폴은 하루 종일 일했기 때문에 쉴 자격이 있는 사람처럼 깊이 잠들었다. 하지만 미리암은 그 옆에서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변호사가 되기 위해 애썼던 시간과 시험에 합격했을 때의 기쁨, 처음 법복을 입고 건물 앞에서 사진을 찍던 순간을 떠올렸다. 사진 속의 미리암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에게 남은 이야기는 아이들의 장난과 슈퍼마켓에서 엿들은 낯선 사람들의 대화뿐이었다.


미리암은 그 사실을 부끄러워했다. 친구들의 저녁 초대를 거절하고, 전화도 받지 않기 시작했다. 누군가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었을 때, 집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고 대답하는 것이 두려웠다. 상대가 흥미를 잃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을 견딜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미리암은 공원 근처에서 법대 동기였던 파스칼을 우연히 만났다. 파스칼은 자신이 운영하는 법률사무소에 대해 이야기했다. 미리암은 그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계속 끼어드는 밀라를 조용히 시키기 위해 사탕이나 간식이 없는지 가방을 뒤졌다.


다음 날 파스칼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다시 법률 일을 시작할 생각이 있다면 함께 이야기해 보자는 내용이었다.


미리암은 기뻐서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자신이 잃어버렸다고 믿었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는 출구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일을 시작하려면 먼저 아이들을 맡길 사람을 찾아야 했다. 어린이집 자리를 구하기에는 이미 늦었고, 다른 선택지는 거의 없었다. 결국 미리암과 폴은 보모를 고용하기로 했다.


미리암이 다시 집 밖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이 맡고 있던 모성의 일부를 다른 여성에게 넘겨야 했다. 하지만 아이를 사랑해 줄 사람을 찾는 일에 다른 조건들이 따라오기 시작했다.


폴은 면접을 준비했다. 질문 목록을 만들고, 후보자마다 삼십 분씩 시간을 배정했다.


조건도 분명했다. 불법 체류자는 안 되고, 아이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 경찰이나 병원에 가기를 두려워할 사람이어서는 안 됐다. 너무 나이가 많아도 안 되고, 히잡을 써도 안 되고, 담배를 피워도 안 됐다.


무엇보다 활기차고 언제든 시간을 낼 수 있어야 했다. 새로 찾은 보모가 일을 잘해주어야 자신들도 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폴은 아이들에게 위험한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조건을 더 따지기 시작했다.


그 사랑이 차별의 언어를 아무렇지 않게 섞여 들어오게 만들었다. 국적과 체류 자격, 나이와 종교적 표시, 흡연 여부와 몸의 민첩함, 시간의 유연성까지 모두 평가의 대상이 되었다.


아이를 돌볼 사람은 따뜻해야 했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 많은 자기 삶을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됐다.


미리암의 친구 엠마는 보모에게 프랑스에서 함께 사는 자녀가 있으면 곤란하다고 조언했다. 자기 아이를 돌봐야 하면 늦게까지 남거나 추가로 아이를 봐주는 일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자녀가 있다면 차라리 본국에 있는 편이 낫다고 엠마는 말했다. 미리암은 그 말을 듣고 불편함을 느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이나 자신의 친구를 그런 식으로 평가했다면, 분명 차별이라고 분노했을 것이다. 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한 여성을 배제하는 일은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미리암 역시 편견으로부터 자유롭지는 않았다. 그녀는 마그레브 출신의 보모를 원하지 않았다. 같은 언어와 종교를 공유한다는 이유로 지나치게 가까워지고, 이민자끼리의 연대를 요구받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그들이 찾는 것은 단순히 아이를 돌볼 노동자가 아니었다. 자신들을 대신해 아이의 울음을 알아듣고, 집의 질서를 유지하며, 엄마처럼 헌신해 줄 또 하나의 모성이었다.


모성의 외주화였다.


모성처럼 헌신하기를 바라면서도, 그 여성 자신의 모성은 방해물처럼 취급되었다. 아이를 사랑하되 자기 아이 때문에 흔들리면 안 됐고, 가족처럼 가까워지되 자기 가족은 멀리 있어야 했다. 고용주의 집 안에 깊숙이 들어오되, 그 집을 방해할 만큼 분명한 자기 삶을 가져서는 안 됐다.


그러던 중 루이즈가 나타났다. 루이즈는 죽은 남편과 이미 성인이 된 딸에 대해 이야기했다. 언제든 일할 수 있었고, 이전에 돌보았던 아이들의 부모에게서 훌륭한 추천도 받았다.


미리암과 폴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녀에게 매혹되었다. 훗날 미리암은 그것을 첫눈에 반한 일처럼 이야기했다.


루이즈는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곧 집 안의 모든 것을 바꾸어놓았다. 그녀는 흩어진 물건을 정리하고, 누렇게 변한 커튼을 빨고, 떨어진 단추를 달고, 아이들의 옷을 기웠다. 냉장고와 찬장을 정돈하고, 저녁 식사를 준비했으며, 아이들의 일정과 약을 작은 수첩에 꼼꼼히 적었다.


비좁고 숨 막히던 아파트가 루이즈의 손을 거치자 밝고 평온한 집으로 변했다.


루이즈를 고용한 뒤 미리암은 잃어버렸던 직업과 슬롯적 자리를 되찾기 시작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일찍 사무실에 도착했고, 누구보다 늦게까지 남았다. 파스칼이 건네는 일을 거절하지 않았고, 자신이 여전히 유능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려는 듯 모든 사건에 매달렸다.


그러나 일을 되찾는 만큼 아이들과의 시간은 줄어들었다. 일주일 내내 늦게 퇴근해 아이들이 잠든 뒤에야 집에 도착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그래서 그날 저녁만큼은 아이들과 온전히 함께 있고 싶었다. 큰 침대에 함께 들어가고, 평소에는 금지된 일을 허락하고, 이불속에서 버터와 초콜릿을 넣은 샌드위치를 먹고, 만화를 보다가 늦게 잠들 계획을 세웠다.


미리암은 아이들을 다시 자기 품 안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아이들의 피부와 냄새, 자신을 '엄마'라고 부르는 목소리를 되찾고 싶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은 루이즈와 함께 목욕하고 있었다. 아이들은 물에서 나와 벌거벗은 채 엄마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장면만 놓고 보면 그것은 오롯이 미리암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루이즈가 있었다. 루이즈는 조용히 욕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욕조를 닦고, 흩어진 장난감을 제자리에 놓고, 수건을 접고, 세탁기를 비웠다. 아이들의 침대를 준비한 뒤에는 부엌으로 가 냄비를 꺼냈다.


미리암은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했지만, 루이즈는 자신이 저녁을 준비하겠다고 대답했다. 피곤할 테니 쉬라고,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라고, 저녁은 자신이 준비하겠다고 말했다.


루이즈는 미리암에게서 아이들을 빼앗지 않았다. 오히려 아이들과 함께 있으라고 했다.


당신은 엄마의 시간을 누리라고, 그 시간을 대신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가능하려면 누군가는 욕조를 닦고, 수건을 개고, 세탁기를 비우고, 저녁을 준비해야 했다. 누군가는 아이들이 보낸 하루의 흔적을 정리하고, 부모가 아이들을 사랑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야 했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은 루이즈였다.


모성은 기묘하게 둘로 나뉘어 존재했다. 미리암은 아이들의 엄마였다. 그러나 아이들의 하루를 실제로 움직이는 사람은 루이즈였다. 미리암은 아이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나눌 시간을 마련해 주는 사람도 루이즈였다. 미리암은 아이들을 품에 안았다. 그러나 그 품이 비워질 수 있도록 집을 정리하는 손은 따로 있었다.


루이즈는 아이들의 엄마 역할만 대신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미리암까지 돌보기 시작했다.


미리암은 아이들을 맡기는 사람이었지만, 점점 루이즈에게 보살핌을 받는 사람이 되어갔다. 피곤할 때면 루이즈가 준비한 음식을 먹었고, 깨끗하게 정돈된 집과 새로 간 침대 시트 속에서 휴식을 취했다.


미리암은 미안해하면서도 안도했다.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루이즈의 손길을 끝내 거절하지는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조금씩 더 많은 일을 루이즈에게 넘겼다. 루이즈는 점점 보이지 않으면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가 되었다. 미리암은 늦는다는 연락조차 하지 않게 되었고, 아이들도 엄마가 언제 돌아오는지 묻지 않게 되었다.


루이즈는 어둠 속에서 무대를 옮기는 사람처럼 가족의 뒤편을 움직였다. 소파를 옮기고, 벽을 세우고, 흔들리는 장면을 붙들었다. 그녀의 손이 없으면 가족이라는 마법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었다.


문제는 그 마법을 유지하는 사람에게도 자기 삶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미리암과 폴은 루이즈를 가족처럼 여겼다. 그러나 그녀가 가족 밖에서 어떤 집으로 돌아가는지, 주말을 어떻게 보내는지,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잃었는지는 거의 알지 못했다.


그들은 루이즈를 필요로 했지만, 루이즈라는 사람 전체를 필요로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아이들을 사랑하고 집을 지키며, 부모가 자신들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대신 떠받치는 존재였다.


결국 모성은 저절로 솟아나는 본능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과 몸, 때로는 다른 여성의 삶까지 요구하며 만들어지는 사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