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탕달, 프루스트, 슬리마니, 마티외가 그린 서로 다른 세계의 거리
스탕달이 마틸드를 처음 만난 건 1818년 이탈리아 밀라노에서였다. 당시 스탕달은 나폴레옹 군대에서 복무한 뒤 이탈리아에 머물면서 글을 쓰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자신답게 살아갈 수 있는 도시라고 여길 만큼 밀라노를 사랑했다.
첫눈에 반한 스탕달은 3년 동안 그녀를 쫓아다녔다. 그러나 마틸드는 그를 받아들이지도, 완전히 밀어내지도 않은 채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단호한 거절이었다면 차라리 포기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가갈 수 있을 듯하면서도 끝내 허락되지 않는 그 모호한 거리는 오래도록 이어졌고, 스탕달에게 더 깊은 상처를 남겼다.
하루는 마틸드가 기숙학교에 있는 아이들을 만나러 볼테라(Volterra)에 간다는 사실을 듣고, 스탕달은 무조건 그녀를 따라갔다. 하지만 스탕달은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평소에 입지 않는 옷을 입고 초록색 안경까지 썼다. 그러나 마틸드는 그를 알아보았고, 섬세하지 못하다는 식으로 불쾌감을 드러냈다.
하루는 마틸드가 기숙학교에 있는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 토스카나의 작은 도시 볼테라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었다. 밀라노에서 멀리 떨어진 도시였지만, 스탕달은 충동적으로 그녀의 뒤를 따라나섰다.
우연을 가장하기 위해 평소와 다른 옷을 입고 초록색 안경으로 얼굴까지 가렸지만, 마틸드는 곧바로 그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사적인 여정까지 뒤따라온 스탕달의 무례함에 불쾌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만 생각하는 사려 깊지 못한 남자가 되어 있었다.
결국 마틸드는 스탕달에게 더 이상 자신을 찾아오지 말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더는 희망을 품을 여지를 남기지 않는 거절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탕달은 리소르지멘토 운동에 연루되었다는 의심을 받아 오스트리아 당국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그는 1821년, 사랑과도 도시와도 제대로 작별하지 못한 채 쫓겨나듯 밀라노를 떠나야 했다.
밀라노를 떠난 뒤에도 마틸드를 향한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스탕달은 처음에는 자신의 고통을 소설로 옮기려 했지만, 끝내 실패했다. 감정은 아직 마틸드에게 너무 가까이 있었고, 상처는 허구 속에 감추기에는 지나치게 생생했다.
그는 결국 소설 대신 다른 길을 택했다. 사랑을 병처럼 관찰하고, 그 증상을 하나씩 분류하고, 마음이 움직이는 방식을 하나의 법칙처럼 설명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스탕달은 자신을 무너뜨린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연애론』을 썼다.
그렇게 그가 깨달은 것은 자신의 사랑이 마틸드의 세계에서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었다. 열정적인 마음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던 행동이 상대방에게는 곤란한 침범이 되었고, 진실한 감정이라고 믿었던 것은 상대방이 속한 슬롯에서 위험한 소문을 불러올 수 있는 위협이었다.
사랑은 개인에게서 시작되지만, 그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감정은 언제나 상대가 살아온 환경과 그 세계의 규칙을 통과해야 했다.
사랑이 어려운 이유는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없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품은 감정이 다른 사람의 세계 안에서 의도한 것과 전혀 다른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누군가를 새롭게 만난다는 것은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다. 상대방이 살아온 세계를 탐험하는 설렘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 보는 거리와 낯선 공기의 냄새, 사람들이 걷고 말하는 속도, 식탁에서 지켜야 하는 예절과 어디에서 멈추고 어느 순간 목소리를 낮춰야 하는지까지 알아가는 과정은 사적이지만, 언제나 슬롯적이다.
*
어느 날 스완은 오데트가 보고 싶어 하던 판화 한 장을 들고 나타났다.
그녀는 몸이 좋지 않은 듯 연보라색 실내복을 걸친 채 흐트러진 머리로, 스완의 곁에 서서 판화를 들여다보았다. 한쪽 다리를 가볍게 굽히고 몸을 기울이자, 풀어진 머리카락이 야윈 뺨을 따라 흘러내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스완은 문득 오래된 그림 속 여인을 떠올렸다.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에 보티첼리가 그려 넣은 제포라였다. 고개를 기울인 자세와 길게 이어지는 목선,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과 얼굴을 감싸는 머리카락이 그림 속 여인과 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전까지 오데트는 스완이 생각하는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도드라진 광대와 지쳐 보이는 눈, 연약한 피부는 그에게 매혹보다 망설임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제포라의 모습이 겹쳐지는 순간, 오데트의 얼굴을 이루던 선들은 전혀 다른 질서를 갖게 되었다. 야윈 뺨은 섬세한 윤곽이 되었고, 고개를 숙인 자세에는 오래된 그림의 고요함이 깃들었다.
스완은 이제 오데트를 바라보면서 동시에 보티첼리를 보았다. 그림 속 여인의 아름다움이 오데트에게 옮겨왔고, 오데트의 몸은 그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예술의 세계 안으로 들어갔다.
그날 이후 스완은 제포라의 그림을 자신의 바카라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는 그림을 오래 바라보면서 오데트의 눈과 목선, 풀어진 머리카락을 다시 찾아냈다.
얼마 뒤에는 오데트가 스완을 베르뒤랭 부인의 집으로 데려갔다. 그녀가 거의 매일 저녁을 보내는 곳이었다.
사람들은 그 모임을 '작은 모임'이라고 불렀다. 그 안에 들어가기 위해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베르뒤랭 부인이 사랑하는 것을 함께 사랑하고, 그녀가 지루하다고 말하는 사람을 함께 지루해해야 했다.
스완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반갑게 맞았다. 베르뒤랭 부인은 그에게 오데트 옆자리를 내주었고, 오데트는 자신에게 정해진 자리에 조금 몸을 옮겨 그가 앉을 공간을 만들었다.
방 안에서는 농담이 끊이지 않았다. 누군가 한마디를 던지면 사람들은 이미 여러 번 들었던 이야기에도 처음 듣는 것처럼 웃었다. 베르뒤랭 부인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웃음을 참는 시늉을 했고,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얼마나 유쾌한 사람인지 확인하듯 더 크게 웃었다.
스완도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지나치지 않을 만큼 다정했고, 누군가 말을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몸을 기울였다. 그의 태도에는 오랫동안 여러 살롱을 드나든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편안함이 있었다.
그날 저녁 젊은 피아니스트가 피아노 앞에 앉았다. 베르뒤랭 부인은 음악을 들으면 몸이 아플 만큼 감동한다며 연주를 말렸지만, 사람들의 계속된 요청에 마지못해 피아노 연주를 허락하는 표정을 지었다.
잠시 뒤 방 안에 뱅퇴유 소나타의 짧은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스완은 그 음악을 알고 있었다. 오래전 다른 장소에서 우연히 들은 뒤, 다시 찾지 못해 잊고 있던 선율이었다.
연주가 끝나자 그는 피아니스트에게 다가가 작곡가와 소나타에 관해 물었다. 그 짧은 선율이 작품 안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다른 부분에서는 어떻게 되풀이되는지 알고 싶어 했다.
그러나 베르뒤랭 부인은 그런 세세한 이야기는 이 집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그렇게 사소한 것을 따지거나 머리카락을 네 갈래로 가르듯 분석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웃었다.
스완도 따라 웃었지만, 조금 전까지 음악 안에서 발견했던 말할 수 없는 감각은 어느새 가벼운 농담 속에 묻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음악의 언어와 이 방에서 통용되는 언어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아직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날 밤 베르뒤랭 부인은 오데트에게 스완이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단순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며, 앞으로도 그런 친구라면 얼마든지 데려와도 된다고 했다.
스완은 그렇게 그들의 모임에 들어갔다.
그러나 어느 날 밤, 스완은 평소보다 늦게 베르뒤랭 부인의 집에 도착했다.
문을 지나 응접실로 들어섰을 때 피아노 연주는 이미 끝나 있었다. 익숙한 사람들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방 안에는 조금 전까지 이어진 웃음의 기운이 남아 있었다.
스완은 자연스럽게 피아노 옆 소파를 바라보았다.
오데트가 늘 앉아 있던 자리가 비어 있었다.
처음에는 다른 방에 갔으리라 생각했다. 누군가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거나, 거울 앞에서 머리를 고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방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오데트는 없었다.
그녀는 이미 돌아갔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스완은 가슴 한가운데가 갑자기 비어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불과 한 시간 전까지만 해도 오데트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에 차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언제나 같은 자리에 있었고, 밤이 끝나면 자신이 마차로 데려다줄 수 있었다. 그 확신이 있었기에 늦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오데트가 없는 방을 마주하자, 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깨달았다.
스완은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 물었다. 사람들은 오데트가 프레보에서 초콜릿을 마신 뒤 집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정확히 언제 떠났는지, 누구와 갔는지는 아무도 분명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한자리에 모여 오데트와 웃고 떠들던 사람들이었지만, 이제 그들이 건네는 정보는 모두 정확하지 않았다.
스완은 곧바로 집을 나섰다.
마차가 프레보를 향해 달리는 동안 그는 거리에 놓인 모든 장애물을 원망했다. 앞을 가로막는 마차도, 천천히 길을 건너는 사람도, 잠시 멈춰야 하는 순간도 견딜 수 없었다. 몇 분만 늦어도 오데트가 자리를 떠날 것 같았다.
프레보에도 그녀는 없었다.
스완은 대로에 있는 식당과 카페를 하나씩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자신이 몇 곳을 확인하는 동안 마부에게는 다른 장소를 살펴보게 했다. 불이 밝혀진 창문이 보일 때마다 마차를 세웠고, 문이 열릴 때마다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메종 도레에도, 토르토니에도, 카페 앙글레에도 오데트는 보이지 않았다.
밤은 깊어졌고, 대로의 불빛은 하나둘 꺼지고 있었다. 거리에는 사람들도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여자의 실루엣이 나타날 때마다 스완은 걸음을 늦췄다.
오데트가 갈 만한 곳을 떠올리기 위해 스완은 자신이 알고 있는 그녀의 생활을 하나씩 더듬기 시작했다. 그녀가 자주 가는 카페, 좋아하는 음식, 늦은 밤에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집으로 돌아갈 때 지나가는 거리까지 머릿속에 펼쳐놓았다.
그녀가 있을 법한 장소를 하나씩 확인할수록, 점점 더 알 수 없는 세계에 서 있는 듯했다. 자신이 모르는 시간과 만나지 못한 사람들,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한 장소들이 그녀의 삶 안에 존재하고 있었다.
마부가 이제는 돌아가는 편이 좋겠다고 말했지만 스완은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오늘 밤 반드시 그녀를 찾아야 했다. 자신이 오지 않은 것을 오데트가 섭섭해할 수 있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그 말은 더 이상 자신에게도 설득력이 없었다.
그는 오데트가 자신을 기다렸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스완은 계속해서 불 꺼져가는 대로를 걸었다. 그녀를 찾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때 맞은편에서 한 여자가 걸어왔다.
스완은 처음에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어둠 속에서 가까워진 여자가 고개를 들었을 때 비로소 그녀를 알아봤다. 그녀 역시 스완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오데트는 프레보에 자리가 없어 메종 도레로 갔다고 말했다. 스완도 그곳을 확인했지만, 그녀는 안쪽 깊숙한 자리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서로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오데트의 마차에 함께 올라탔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짓누르던 불안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녀가 바로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거리는 다시 평온해 보였다.
그날 밤 이후, 오데트의 부재는 단순한 빈자리가 아니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스완이 아직 들어가 보지 못한 삶이 그녀에게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그 뒤 베르뒤랭 부인의 살롱에 포르슈빌이 나타났다.
그는 오데트에게 관심을 보였고, 그 사실을 감추려 하지 않았다. 베르뒤랭 부인도 그를 반갑게 맞이하는 눈치였다.
포르슈빌은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어렵지 않게 찾아내는 사람이었다. 그 말이 돌아오는 방향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피아니스트가 뱅퇴유의 소나타를 연주하기 시작하자, 익숙한 선율이 대화들 틈으로 끼어들었다. 한때 오데트와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들렸던 음악이었다.
스완은 마음속으로 그 선율을 향해 말을 걸었다. 자신의 사랑을 알고 있는 오랜 친구라면, 저 포르슈빌 같은 사람에게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음악이 끝나자 방은 다시 사람들의 목소리로 채워졌다.
베르뒤랭 부인은 스완에게 자신의 취향에 대해 물었다. 스완은 그녀가 기대하는 만큼 쉽게 감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음악의 작은 차이를 짚어냈고, 사람에 대한 평가도 장점과 단점을 함께 이야기했다.
그것은 비난이라기보다 세심한 평가에 가까웠다. 그러나 그 방에서 필요한 대답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베르뒤랭 부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녀가 훌륭하다고 말한 사람은 모두에게 훌륭해야 했다. 그 판단에 작은 유보를 덧붙이는 것만으로도 스완은 그들과 같은 편이 아니라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었다.
반면 포르슈빌은 무엇을 칭찬하고 무엇을 우스워해야 하는지 빠르게 익숙해져 갔다. 베르뒤랭 부인이 웃으면 함께 웃었고, 그녀가 누군가를 칭찬하면 곧바로 칭찬을 늘어놓았다.
사람들이 몸을 돌리는 방향도 조금씩 달라졌다.
전에는 스완이 오데트 곁에 앉으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두 사람을 하나로 보았다. 피아니스트는 그들을 위해 소나타를 연주했고, 베르뒤랭 부인도 두 사람을 나란히 앉혔다.
그러나 이제 오데트는 포르슈빌의 농담에 웃었고, 베르뒤랭 부인은 그 웃음을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스완의 말이 방 안에 잠시 정적을 만들 때, 포르슈빌의 말은 사람들을 한쪽으로 모았다.
베르뒤랭 부인은 오데트와 포르슈빌이 함께 식사할 자리까지 마련하려 했다. 다만 스완에게는 알리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어느 날 모임이 끝나고 사람들이 현관으로 나왔다. 밖에는 마차들이 차례로 기다리고 있었다. 스완의 마차는 베르뒤랭 부부의 마차 뒤에 서 있었다. 그는 평소처럼 오데트를 자신의 마차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줄 생각이었다.
베르뒤랭 부인이 먼저 말을 꺼냈다.
'오데트, 우리가 데려다 드릴게요. 포르슈빌 씨 옆에 자리가 하나 남았어요.'
오데트는 곧바로 대답했다.
'네, 부인.'
스완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데트를 바라보며 자신이 데려다 주기로 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지만, 오데트는 베르뒤랭 부인이 함께 가자고 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오데트는 스완에게 짧은 인사를 하고 마차에 올라탔다. 포르슈빌 옆의 빈자리는 오데트를 위해 남겨진 자리였고, 스완이 서 있던 곳에는 더 이상 아무런 자리가 없었다.
마차 문이 닫히고 스완은 웃으려 했지만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얼마 전까지 오데트에게 다가가기 위해 들어갔던 세계가 이제는 그녀를 자신에게서 데려가고 있었다.
베르뒤랭 부부의 마차가 먼저 움직였다. 그 안에는 오데트와 포르슈빌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불빛이 흔들리고, 마차는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며칠 뒤 스완은 생트외베르트 후작 부인의 저녁 모임에 참석했다.
현관에는 마차가 길게 늘어서 있었고, 계단 위로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들과 밝은 드레스 차림의 여자들이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사람들이 서로의 이름을 확인하고, 익숙한 얼굴을 찾아 인사를 건네는 동안 스완은 망설임 없이 그들 사이를 지나갔다.
이곳에서 그는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오래 알고 지낸 사람들이 먼저 그를 불러 세웠고, 누군가는 자리를 비켜주었다. 게르망트 가문의 사람들은 그를 친근하게 맞이해 주었다. 게르망트 공작부인이 될 로므 공작부인은 멀리서 스완을 발견하자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스완의 이름을 다정하게 부르며 왜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느냐고 나무랐다.
베르뒤랭 부인의 집에서는 분위기를 망치던 스완의 말은, 이곳에서는 재치가 되었다. 그가 알고 있는 예술과 사람들, 오래된 귀족 가문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에게도 설명할 필요가 없었다.
스완은 다시 자신이 익숙한 세계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 그의 시선은 자꾸 방 안이 아닌 다른 곳으로 향했다.
오데트는 지금 베르뒤랭 부인의 집에 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자신이 앉던 자리에 포르슈빌이 대신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같은 농담에 웃고, 같은 음악을 들으면서, 자신이 모르는 약속을 정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스완은 자신의 이름이 이곳에서 얼마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지 알고 있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찾아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고, 누군가를 소개받는 일도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오데트가 있는 단 하나의 방에는 이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때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연주가 시작되었다. 무심히 흘려 들었지만 몇 마디가 흐른 뒤, 가느다란 선율 하나가 다른 소리들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뱅퇴유 소나타였다.
스완은 고개를 들었다. 베르뒤랭 부인의 집에서 처음 그 선율을 알아보았던 밤이 되살아났다. 오데트가 피아노 옆 소파에 앉아 자신을 위해 자리를 비켜주던 모습, 연주가 끝난 뒤 그녀와 나누었던 말, 매일 저녁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주던 길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한때 두 사람만을 위한 선율이었다. 베르뒤랭 부인의 집에 있던 사람들조차 그것을 스완과 오데트의 음악으로 기억했다.
그러나 지금 소나타는 오데트가 없는 방에서 연주되고 있었다. 음악은 같은 음으로 되돌아왔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스완은 음악을 들으며 자신이 오데트를 사랑한 것인지, 그 음악과 함께 만들어진 시간 전체를 사랑한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선율이 멀어졌다가 다시 돌아올 때마다 그는 잠시 오데트를 되찾은 듯했다. 그러나 음악이 앞으로 나아가면 그녀는 다시 멀어졌다. 손을 뻗으면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가, 다음 음이 이어지는 순간 이미 과거 속으로 물러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조용히 연주를 듣고 있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아름다운 음악이었지만, 스완에게는 한때 자신이 들어갈 수 있었던 세계의 문이 열렸다가 다시 닫히는 소리였다.
연주가 끝나자 방 안에 박수가 퍼졌다.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곡가와 연주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박수가 끝나자 누군가 스완에게 연주에 대한 감상을 물었다. 그는 익숙한 미소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 시각 어딘가에서는, 자신이 없는 베르뒤랭 부인의 저녁이 아무렇지 않게 계속되고 있었다.
*
그리고 여기 누군가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말이 더 이상 추상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작품이 있다.
마틸드는 전쟁이 한창이던 1944년 가을, 알자스의 작은 마을에 주둔한 모로코 병사 아민을 처음 만났다. 낯선 군복과 어두운 피부, 자신보다 한 뼘은 작아 보이는 남자였다.
아민은 그녀가 그동안 알고 지낸 남자들과 전혀 달랐다. 마틸드는 마을의 길을 안내해 주었고 친구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낯선 땅에서 지낼 수 있도록 도왔고, 두 사람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었다.
전쟁이 끝난 뒤 아민이 고향으로 돌아가자, 마틸드는 그와 결혼해 모로코로 향했다.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가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가족과 이웃이 정해놓은 삶, 알자스의 좁은 마을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평범한 미래로부터 달아나는 일이기도 했다.
아민은 아버지가 남긴 땅을 되찾아 농장을 만들고 싶었다. 도심에서는 조금 떨어진 곳에 돌과 잡초가 뒤덮인 척박한 땅이었다. 아민에게는 이 척박한 땅이 가족의 미래가 걸린 장소였다.
그의 아버지는 언젠가 그 땅에 포도와 곡식을 심고, 과일나무에 둘러싸인 집을 지어 여러 세대의 가족이 살아가기를 꿈꾸었다. 아민은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계획을 자신의 손으로 완성하고 싶었다. 마틸드 역시 그와 함께라면 그곳에서 두 사람만의 자유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마틸드가 농장을 처음 보러 갔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곳이 너무 멀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에게는 아직 자동차가 없었고, 도심에서 농장까지 이어지는 낡은 마차로 이동해야 했다. 나무 의자는 불편했고, 마차가 움직일 때마다 먼지 때문에 기침이 나왔다.
아민은 그 사실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창밖의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버지가 남긴 땅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언덕 어디에 집을 지을지, 어느 쪽에 과일나무를 심을지, 무엇을 재배해야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마틸드는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마부가 움직이지 않는 노새를 향해 채찍을 휘두를 때마다 그녀는 몸을 움찔했다.
그녀는 아민의 어깨에 기대었다. 하지만 아민은 그녀의 낭만이 이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처음 길가의 풍경은 마틸드에게 토스카나의 그림을 떠올리게 했다. 들판에는 꽃이 피어 있었고, 멀리 프랑스인 정착민들의 농장과 사이프러스 나무가 보였다. 어린 시절 피아노 교사의 집에 걸려 있던 판화처럼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그러나 마차가 언덕을 오르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꽃은 사라지고 커다란 흰 돌들이 비탈을 뒤덮었다. 몇 그루의 올리브나무만이 돌 사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아 있었다.
언덕 위에 서 있는 건물은 집이라기보다 작고 어두운 방들을 이어 붙인 움막처럼 보였다. 지붕에는 얇은 철판 한 장이 덮여 있었고, 벽에는 빗물이 흘러내린 길을 따라 초록빛 얼룩이 번져 있었다.
아민은 마틸드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설명했다. 벽을 고치고 창문을 내고, 땅을 일구고 나무를 심으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마틸드는 축축한 벽을 바라보았다. 아민이 보고 있는 집은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보는 과수원과 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눈앞의 돌밭 위에 미래를 세우고 있었지만, 마틸드는 아직 그곳에서 오늘 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이 같은 언덕에 서 있던 순간이었다. 한 사람은 자신에게 돌아온 땅을 보았고, 다른 한 사람은 돌아갈 곳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사실을 보았다.
모로코에 처음 도착했을 때만 해도 마틸드는 그 차이를 알지 못했다.
그녀는 이틀 동안 기차와 배, 비행기를 갈아타고 라바트에 도착했다. 비행기 안에서 울고 토하며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공항에는 아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다시 만난 그는 기억 속에서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다.
두 사람은 호텔 방에 들어간 뒤 이틀 동안 거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마틸드는 창문을 열어 새로운 도시를 바라보는 일보다 아민의 몸을 다시 만나는 일에 몰두했다. 모로코는 아직 하나의 나라라기보다 그에게서 나는 냄새와 피부의 온도에 취해 있었다.
그러나 며칠 뒤 아민은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농장에 살던 임차인이 계약이 끝나기 전까지 나갈 수 없다고 버티고 있었다. 앞으로 지낼 집도 구할 수 없었다. 그러니 몇 달 동안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살아야 한다고 했다.
마틸드는 웃었다. 아민과 같은 남자가 결혼하자마자 어머니의 집으로 들어가 살겠다고 말하는 상황이 우스웠다. 전쟁 중 알자스에서 만난 아민은 낯선 나라에서 홀로 살아가는 군인이었다. 마틸드는 그에게 마을의 길을 알려주고, 친구들을 소개하고, 카드놀이의 규칙을 가르쳐주었다. 그때 길을 알고 있던 사람은 그녀였다.
하지만 아민은 웃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바닥에 둔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는 다들 그렇게 해.'
그 말 뒤로 더 이상의 설명은 이어지지 않았다.
며칠 뒤 두 사람은 아민이 자란 동네를 찾았다. 그는 도시의 구조와 길을 설명했고, 마틸드는 그의 팔을 붙잡은 채 좁은 골목을 걸었다. 사람들과 짐을 실은 나귀, 소리를 지르는 상인들이 뒤엉킨 길에서 그녀는 한순간만 놓쳐도 영영 길을 잃을 것 같았다.
무거운 대문을 열자 아민의 가족이 기다리고 있었다. 비단 카프탄을 입고 금장신구를 두른 시어머니 무일랄라는 아들을 끌어안고 축복했다. 그리고 마틸드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시어머니가 건넨 환영의 말은 아민의 아홉 살짜리 여동생 셀마가 프랑스어로 옮겨주어야 했다.
마틸드는 환영받고 있었지만, 그 환대의 언어를 직접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집에서는 모든 사람이 서로의 생활 안에 들어와 있었다. 매트리스에는 빈대와 벌레가 있었고, 벽은 몸의 소리와 코 고는 소리를 막아주지 못했다. 셀마는 아무런 예고 없이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뛰어들었다. 복도에는 키프 냄새가 났고, 우물에서는 과거 노예였던 야스민이 집안일에 쓸 물을 끌어올렸다.
마틸드가 프랑스에서 떠올렸던 결혼에는 남편과 함께 꾸밀 집이 있었다. 그러나 이곳에서 그녀는 아민과 단둘이 사는 것이 아니라,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 오래된 비밀과 수치, 죽은 아버지의 기억까지 함께 살아야 했다.
처음에는 누구의 말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어 마틸드는 부엌에서 아랍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토마토, 기름, 물, 빵. 뜨겁다와 차갑다. 향신료의 이름을 익힌 뒤에는 가뭄과 비, 서리와 뜨거운 바람을 배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과 사랑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옥상에 숨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새로 배운 욕설을 소리쳐보기도 했다. 거리의 사람들은 위를 올려다보며 같은 욕설로 대답했다.
마틸드는 언어를 빠르게 익혔다. 사람들은 그녀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해 대화를 조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단어를 알아듣는 것과 그 말이 생겨난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라마단이 되자 그녀는 가족을 따라 금식했다. 해가 뜨기 전에 일어나 대추야자를 먹고 신 우유를 마셨다. 저녁이면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들던 여자들이 상을 차렸지만, 먼저 식탁에 앉는 사람은 남자들이었다.
아민의 어머니는 문턱에 서서 남자들이 빵을 떼고 수프를 먹기 시작하기를 기다렸다. 그제야 여자들은 부엌으로 돌아가 남은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마틸드는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 종일 음식을 만든 사람이 왜 마지막에 먹어야 하는지 물었다.
노예와 다를 바 없다고 소리쳤지만, 셀마는 창가에 앉아 그녀의 분노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았다.
마틸드는 자신이 옳다고 믿었다. 그녀의 시어머니가 평생 익혀온 질서 역시 그 안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부엌에 있었지만, 서로가 바라보는 삶의 모양은 달랐다.
마틸드는 프랑스에 있는 언니 이렌에게 편지를 썼다.
편지 속의 모로코는 실제로 자신이 살고 있는 곳과 달랐다. 그녀는 자신의 삶이 카렌 블릭센의 소설처럼 낭만적이라고 적었다. 낯선 풍습과 신비로운 골목을 묘사하고, 말 위에 당당히 올라탄 모험적인 여자로 자신을 꾸몄다.
방 밖에서는 가족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고, 매트리스에는 벌레가 기어 다녔다. 그러나 그런 것은 적지 않았다.
그녀는 이국적인 단어를 골라 편지에 넣었다. 정령과 약탈, 농부와 화려한 타일의 이름을 적었다. 언니와 아버지가 편지를 읽으며 지루한 프랑스의 삶 대신 이곳으로 떠난 자신을 부러워하기를 바랐다.
그녀는 조금씩 이곳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벌레를 신발로 밟아 죽이고, 농부들이 가져온 짐승을 직접 손질하는 법도 알게 되었다. 아이들을 키우고, 낡은 집에 식탁보와 들꽃을 놓고, 가진 것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도 집을 꾸몄다.
하지만 겨울이 오면 알자스가 그리웠다.
1953년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마틸드는 이번만큼은 예전과 같은 축제를 만들기로 했다. 직접 대림절 달력을 만들고, 붉은 장식과 유리 공으로 벽을 꾸몄다. 촛불을 켜고 커다란 칠면조에 속을 채웠다.
농장 한가운데에 알자스의 겨울을 옮겨놓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민도 무언가를 준비했다. 그는 한밤중에 일꾼 둘을 깨워 이웃의 땅으로 데려갔다. 세 사람은 어둠 속에서 어린 사이프러스 나무 한 그루를 베었다. 일꾼들은 농장의 주인이 왜 쓸모도 없는 나무가 필요한지 이해하지 못했다.
아민은 나무를 집 안으로 옮겼다. 나무는 천장에 닿을 만큼 컸고, 푸른 잎에서는 마틸드가 기억하는 겨울의 냄새가 났다.
그는 유럽인들이 다니는 상점에 들어가 산타클로스 옷도 샀다. 진흙 묻은 신발과 다림질하지 않은 셔츠 차림으로 매장에 들어온 아민을 점원들은 하인처럼 대했다. 프랑스어를 알아듣느냐고 물으며 비웃었지만, 그는 붉은 옷과 흰 수염을 사서 돌아왔다.
크리스마스 아침, 아민은 산타클로스로 변장하고 아이들 앞에 나타났다.
마틸드와 아민의 첫째 딸 아이샤는 산타클로스가 어떻게 이 먼 농장까지 찾아왔는지 놀라워했다. 그러나 곧 붉은 옷 아래로 드러난 아버지의 진흙 묻은 고무장화를 알아보았다. 셀림은 낯선 모습이 무서워 울음을 터뜨렸다.
아민은 어쩔 줄 몰라하다가 마틸드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웃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다시 산타클로스의 목소리를 냈다.
그는 마틸드에게 분홍색 실내화를 선물했다.
마틸드는 포장을 뜯은 뒤 한동안 선물을 바라보았다. 실내화는 너무 작았고, 그녀가 좋아할 만한 모양도 아니었다. 아민이 자신을 위해 모욕을 견디며 상점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아민 역시 그 실내화가 왜 마틸드를 슬프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마틸드는 고맙다고 말했다. 그리고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한 손에 실내화를 들고 그 밑창으로 자신의 이마를 때렸다.
아민에게 화가 났지만, 그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자신이 여전히 그에게서 완벽한 이해를 기대한다는 사실이었다.
잠시 뒤 그녀는 실내화를 내려놓고 식탁으로 돌아갔다. 눈물을 삼키기 위해 눈을 크게 뜬 채, 자신이 행복하다고 아민이 믿을 수 있도록 미소를 지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아민이 한밤중에 베어온 사이프러스가 서 있었다. 나무 아래에는 마틸드가 직접 만든 장식과 선물이 놓여 있었다.
두 사람은 한 집 안에 서로의 고향을 옮겨놓으려 했다.
그러나 나무에서는 알자스의 겨울이 아니라 모로코의 흙냄새가 났고, 아민이 고른 실내화는 마틸드의 발에 맞지 않았다.
*
물론 국경을 건너지 않고도 타인의 나라에 갈 수 있다.
엘렌과 크리스토프는 같은 지방에서 자랐다. 같은 학교와 거리, 같은 아이스링크와 노래를 기억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어른이 되는 동안 서로 다른 방향으로 멀어졌다.
그 거리는 엘렌이 열세 살이던 어느 토요일 오후부터 시작되었다.
같은 반의 샤를로트 브라사르가 생일 파티에 반 아이들을 모두 초대했다. 샤를로트의 아버지는 제지 공장의 간부였고, 가족은 얼마 전 다른 지역에서 에피날로 이사해 왔다.
초대장에는 선물을 가져오지 말라고 적혀 있었지만, 엘렌은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 없었다.
무엇을 가져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버지는 꽃을 사가라고 했다. 어머니는 초콜릿이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엘렌은 짜증을 냈다. 샤를로트의 생일이지 그 어머니의 생일이 아니었고, 초콜릿은 너무 성의 없어 보였다. 결국 가족은 값비싸지 않은 스카프를 골랐다.
파티가 시작되기도 전에 문제가 생겼다. 아버지는 오후에 다른 집의 수도관과 온수기를 고쳐주러 가야 했고, 엘렌이 원하는 시간까지 기다려줄 수 없었다. 그는 딸을 샤를로트의 집 앞에 내려놓고 곧바로 떠났다.
엘렌은 선물 꾸러미를 안고 고급 주택들이 늘어선 거리를 한동안 서성였다.
너무 일찍 초인종을 누르면 파티를 기다려온 티가 날 것 같았다. 창문과 잘 가꾼 정원, 높은 담장이 모두 자신을 바라보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느 집 이층에서는 어린아이가 창문에 이마를 대고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추위에 손과 발이 저려올 즈음에야 엘렌은 샤를로트의 집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연 샤를로트는 먼저 시간을 확인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벌써 왔어?'
그리고 엘렌은 선물을 내밀었다.
집 안으로 들어서자 가장 먼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사는 집보다 훨씬 높았다. 복도와 계단은 길게 이어졌고, 벽과 가구 위에는 액자들이 놓여 있었다. 사진 속 가족들은 스키장과 바닷가, 외국의 도시에서 웃고 있었다. 아이들이 자라나는 과정이 해마다 다른 휴가지의 풍경 속에 정리되어 있었다.
샤를로트의 방에는 엘렌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붙어 있었다.
짐 모리슨과 랭보, 뒤라스는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예이츠와 버지니아 울프의 얼굴 앞에서는 이름을 물어야 했다. 바카라장에는 잭 런던과 발자크, 콕토와 아나이스 닌이 나란히 꽂혀 있었다.
엘렌은 방 안의 물건들을 하나씩 들여다보았다. 검은색과 흰색의 초상사진들, 투우 포스터, 엘렌이 읽어본 적 없는 얇은 바카라들. 그 안에는 우울하고 세련된 삶이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 때문에 고통받고, 시를 쓰고, 어른들의 규칙을 비웃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는 세계였다.
그녀는 자신이 그곳에서 살게 된다면 틀림없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형편없는 선물을 가져왔어. 미안해.'
샤를로트는 웃었다. 그날 이후 엘렌은 샤를로트와 가까워졌다. 그녀의 바카라을 빌려 읽고, 옷과 말투를 따라 하고, 예전 친구들과 조금씩 멀어졌다. 샤를로트의 집에서 처음 보았던 것들을 하나씩 익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공부도 더 열심히 했다. 엘렌에게 성적은 좋은 학생이라는 증명이기 전에 이곳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수학 문제의 답을 찾아내고, 시험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고, 좋은 학교에 들어가면 자신에게 주어진 삶과 다른 곳으로 갈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녀는 결국 떠났다. 고향을 벗어나 대학과 경영대학원을 거쳤고, 파리에서 온라인 게임을 얻었다. 그리고 남편 필리프와 결혼하고 두 딸을 낳았다. 유행하는 전시와 식당을 알고, 어떤 여행지가 더 세련된 선택인지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옷과 향수, 커피와 와인을 고르는 데에도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열세 살의 엘렌이 샤를로트의 방에서 바라보았던 삶에 거의 도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마흔을 앞둔 엘렌의 하루는 새벽부터 분노와 함께 시작되었다.
아침 여섯 시 이 분.
알람이 울리자 그녀의 머릿속에는 그날 해야 할 일들이 순서도 없이 밀려들었다. 아이들을 깨우고, 우유를 데우고, 수영 준비물을 챙기게 해야 했다. 머리를 감는 시간과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주는 시간, 회사까지 운전하는 시간도 계산해야 했다.
남편 필리프는 침대에 엎드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엘렌은 그에게 아이들을 깨우라고 몇 번이나 말한 뒤 혼자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면서 이메일을 확인했고, 화장은 아이들을 내려준 뒤 차 안에서 하기로 했다. 부엌에서는 우유를 데우며 아침 회의를 떠올렸다. 오후에는 시청에서 중요한 발표가 예정되어 있었다.
필리프는 아침도 먹지 않고 먼저 집을 나섰다. 딸들의 가방과 양치질, 학교 준비는 다시 엘렌의 일이 되었다.
잠시 뒤 그녀는 차를 몰면서 그날의 일정을 되짚었다. 기업의 조직을 바꾸고, 불필요한 비용을 찾아내고, 누군가의 자리를 없애는 대신 다른 방식으로 효율을 높이는 일이 그녀의 직업이었다. 엘렌은 조직 안에서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고, 그 일을 얼마나 오래 하며, 어디까지 줄일 수 있는지를 숫자로 바꾸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자신의 하루에서 무엇을 줄여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그녀는 무언가를 빼앗긴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잠드는 시간도, 일어나는 시간도, 머리를 기르는 일조차 완전히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다. 그녀의 몸과 시간은 가족과 회사의 필요에 맞추어 움직였다.
파리에서 엘렌의 생활은 결국 무너져 내렸다. 쏟아지는 이메일과 끝없이 반복되는 회의를 견디지 못해 회사 화장실에 숨어 몇 시간씩 나오지 않았고, 노트북이 켜지는 소리만 들어도 눈물을 흘렸다.
의사는 번아웃이라고 말했다. 필리프는 온라인 게임을 정리했고, 두 사람은 아이들을 데리고 낭시로 내려왔다. 그러나 새로운 도시와 온라인 게임도 엘렌의 피로를 오래 밀어내지는 못했다.
엘렌은 여전히 바카라임 있는 직바카라을 맡고 있었고, 건축가가 설계한 집과 두 대의 차, 남편과 아이들이 있었다. 그러나 아침부터 턱을 굳게 다문 채 움직여야만 그 모든 것이 제자리에 머물렀다.
그 무렵 회사에 리종이 인턴으로 들어왔다. 리종의 이력서는 이상할 만큼 단순했다. 사진도 없었고, 자신의 장점이나 성실함을 설명하는 문장도 없었다. 딜로이트와 다르티, 바클레이스와 스코틀랜드의 어업장이 아무런 맥락 없이 한 문서에 적혀 있었다.
엘렌은 면접에서 딜로이트에서 일하다가 어떻게 다르티로 옮길 수 있었냐고 물었다.
리종은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둘 다 지하철 1호선에 있으니까요'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녀는 농담을 한 사람처럼 웃지도 않았다.
예술학교에서 쫓겨났고, 어머니가 이곳 남자를 만나 낭시로 왔다고도 거리낌 없이 말했다. 잘 적응하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별로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엘렌은 리종을 채용했다. 일주일 만에 리종은 사무실의 모든 사람과 친해졌다. 누가 누구를 싫어하는지, 어떤 회의가 쓸모없고 어느 냉장고 칸에 손대면 안 되는지도 금세 알아냈다. 복잡한 보고 체계와 끝없는 표를 처리하면서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다.
엘렌이 매일 몸을 굳히며 통과하는 공간을 리종은 비눗방울처럼 떠다녔다. 그녀는 어울리지 않는 경력을 설명하지 않았고, 자신이 이곳에 있을 자격이 있는지 확인하려 하지도 않았다. 실수해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엘렌은 그런 태도를 알고 있었다. 파리에서 만난 여자들도 그랬다. 어느 식당에 들어가든 가장 좋은 자리를 아는 듯했고,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도 말의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그들은 어디에 있어도 자신이 손님이라고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엘렌은 오래전 샤를로트의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누르지 못하고 서성였던 자신을 떠올리지는 않았다. 다만 리종을 바라볼 때마다 조금 부럽고, 조금 화가 났다.
그러던 어느 날 엘렌은 에피날의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크리스토프를 보았다. 그날 그녀는 인터넷에서 알게 된 남자와 첫 만남을 갖고 있었다. 처음부터 모든 것이 어긋났다. 남자는 자신의 몸과 계획에 관해 너무 오래 말했고, 엘렌은 주변에 아는 사람이 없는지 계속 살펴야만 했다.
식당은 묘지와 주차장 사이에 있었다. 인조 식물이 테이블 사이를 나누고 있었고, 높은 곳의 화면에는 식당 주인이 유명인들과 찍은 사진이 차례로 나타났다. 메뉴에는 피자와 새우 요리, 카르파초와 샐러드가 모두 들어 있었다.
엘렌은 가장 구석진 자리를 골랐다. 그곳에서도 주변 사람들을 계속 살폈다. 가족 모임을 나온 사람들, 외근 중인 영업사원들, 서로에게 할 말을 잃은 부부들. 그러다 식당 안쪽에 앉은 한 남자의 뒷모습에 시선이 멈췄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돌렸을 때 엘렌은 바로 알아보았다. 크리스토프였다. 고등학교 시절 아이스링크에서 가장 빠르게 달리던 남자. 빙판 위에서 급하게 멈춰 서며 얼음 가루를 일으키고, 여자아이들의 시선을 당연하다는 듯 받던 남자였다.
그는 이제 몸이 불어 있었고 머리숱도 줄어 있었다. 하지만 엘렌은 한순간에 열세 살과 열다섯 살의 자신으로 돌아갔다. 목이 막혀 더는 음식을 삼킬 수 없었다. 맞은편 남자가 말을 걸었지만 제대로 듣지 못했다. 크리스토프가 함께 온 여자와 같은 차에 타는지만 확인하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에도 잠들 수 없었다. 젖은 머리로 노트북 앞에 앉아 크리스토프의 이름을 검색했다. 오래된 하키 경기 기사와 빛바랜 단체사진이 나타났다. 화면 속의 크리스토프는 점처럼 작았지만 엘렌은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는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을 떠났다. 좋은 학위를 얻고, 파리에서 일하고, 다른 취향과 말투를 배웠다. 그러나 묘지 옆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크리스토프를 보는 순간, 그 모든 시간은 얇은 가림막처럼 무너졌다.
얼마 뒤 두 사람은 메시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과거를 이야기했다. 누가 누구를 좋아했는지, 그 시절 서로를 어떻게 기억했는지를 확인했다. 각자 살아온 삶도 조금씩 들려주었다. 처음에는 좋은 부분만 골라 말했다.
그러나 대화가 길어지면서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은 순간과 늙어가는 부모, 아이들, 끝난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엘렌이 만나자고 말했다.
낭시에서는 안 됐다. 아는 사람을 마주칠 수 없는 조용한 장소여야 했다. 크리스토프가 고른 곳은 에피날의 대성당 그늘에 있는 카스크 도르라는 작은 술집이었다.
크리스토프는 그곳을 잘 알고 있었다. 바닥에는 오래된 모자이크가 깔려 있었고, 테이블은 반들거리는 포마이카로 되어 있었다. 안쪽에는 커다란 커피 기계와 술병들이 놓여 있었으며, 맥주 한 잔은 아직 이 유로가 되지 않았다. 기름과 표백제 냄새가 희미하게 뒤섞여 있었다.
법원에서 일하는 사람들과 장날의 노점상, 낮부터 술을 마시는 노인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며칠씩 비어 있는 의자가 생기면 단골들은 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지 짐작했다.
크리스토프는 가장 안쪽 자리를 골랐다. 평소 영업 보고서를 쓰고 경비를 정리할 때 앉던 자리였다. 주인은 그가 무엇을 마시는지도 알고 있었다.
엘렌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크리스토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실내를 잠깐 둘러보았다. 테이블과 술병, 바에 기대어 있는 늙은 남자들과 크리스토프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아주 짧게 당황한 기색이 지나갔다.
그러나 곧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처음에는 시간이 많지 않다고 말했다. 맥주 한 잔만 마시고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대화가 이어졌고, 잔이 비자 한 잔을 더 주문했다.
엘렌은 술집 안의 사람들을 관찰했다. 주름진 얼굴과 낡은 재킷, 윤이 나는 테이블과 커다란 거울을 보고 있자니 오래된 네덜란드 그림 안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크리스토프가 오랫동안 머물러온 장소를 낯설고 흥미로운 풍경처럼 바라보았다.
크리스토프에게는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둘의 관계가 다시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여러 번 만났다. 처음에는 호텔에서 짧은 시간을 보냈고, 어느 날에는 크리스토프의 집에서 밤을 보냈다.
늦은 밤 크리스토프는 부엌에서 오믈렛을 만들었다. 그는 난방을 미리 켜두었고, 집은 낮은 소리를 내며 따뜻해지고 있었다. 엘렌이 낡은 슬리퍼를 신고 내려오자 식탁에는 구운 빵과 와인이 놓여 있었다.
엘렌은 버터를 바른 빵을 달걀노른자에 적셔 먹었다. 크리스토프는 큰 포크로 오믈렛을 잘라 급하게 입에 넣었다. 빵도 큼직하게 떼어먹었다. 손가락에 달걀이 묻자 혀로 닦았다.
엘렌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아무것도 아니야. 계속 먹어. 보고 있는 게 좋아.'
둘은 한동안 하키와 친구들, 곧 열릴 결혼식에 관해 이야기했다.
방 안에는 아이가 잠든 집에서만 느낄 수 있는 조용함이 있었다. 고양이가 크리스토프의 무릎 위로 올라왔고, 그는 한 손으로 고양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계속 여기에서 살았어?'
엘렌의 질문에 크리스토프는 집을 말하는 줄 알았다.
엘렌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 코르네쿠르 근처에서 생활했는지 다시 물었다.
크리스토프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엘렌은 잠시 망설였다.
'다른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크리스토프의 표정이 조금 굳었다.
'여기가 다른 데보다 나쁠 건 없잖아'
엘렌은 자신은 이곳을 떠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고 털어놓았다. 크리스토프는 그녀도 결국 돌아오지 않았느냐고 대답했다.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야.'
그 대답 뒤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엘렌은 정말로 다른 곳을 보고 싶지 않았느냐고 다시 물었다.
크리스토프는 식탁 위의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왜? 어디를 가도 다 똑같아.'
엘렌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장소는 운명이었다. 이곳에 머무르면 부모와 같은 말을 하고, 비슷한 집에서 비슷한 일생을 보내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학교와 학위와 직업을 이용해 가능한 한 멀리 갔다.
크리스토프에게 이곳은 벗어나야 할 장소가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와 아들, 친구들과 하키팀이 이곳에 있었다. 오래된 술집과 아이스링크, 어디에서 속도를 줄여야 하는지까지 알고 있는 도로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머문 삶을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크리스토프는 자리에서 일어나 접시를 치우기 시작했다. 엘렌은 그를 화나게 할 생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그가 몹시 마음에 들었고, 그래서 더욱 자신이 있는 쪽으로 데려오고 싶었다.
그녀는 싱크대 앞에 선 크리스토프에게 다가가 입을 맞췄다. 말은 거기에서 끝났다.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이해하는 편이 서로의 삶을 이해하는 것보다 쉬웠다.
얼마 뒤 엘렌은 크리스토프의 친구 그레그의 결혼식에 함께 참석했다. 그녀는 결혼식에 어울리는 드레스를 골랐고, 낯선 사람들 앞에서도 흐트러지지 않으려 했다. 크리스토프의 친구들과 가족들은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엘렌은 적당한 때에 웃고, 잔을 들고, 질문에 답했다.
그럭저럭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알지 못하는 농담과 오래된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누군가 이름을 말하면 여러 사람이 동시에 웃었고, 하키 경기와 술자리, 오래전 사고에 관한 이야기가 설명 없이 이어졌다. 엘렌은 웃을 때를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이상한 결혼식 게임이 이어졌다. 눈을 가린 남자들이 여자들의 종아리를 만져 이름을 맞히는 순서에 엘렌까지 불려 나갔다. 크리스토프의 친구 마르코가 그녀의 다리를 만지자마자 누구인지 알아맞히고 급히 손을 거두었다.
엘렌은 멀리 앉은 크리스토프와 눈이 마주쳤다. 둘은 웃었지만, 그 웃음에는 조금 전까지 없던 상처가 묻어 있었다.
식사가 끝나고 음악이 흘러나오자 결혼식 분위기는 다시 바뀌었다. 크리스토프가 엘렌에게 춤을 청했다. 두 사람은 색색의 조명과 연기 속으로 들어갔다. 엘렌이 한 바퀴 돌자 크리스토프는 허리를 붙잡았고, 그녀는 그의 키스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크리스토프는 곧 사라졌다. 그의 아버지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프는 화장실과 주차장, 어두운 들판을 돌아다니며 아버지를 찾았다. 다시 돌아온 뒤에는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춤을 추었다.
엘렌은 혼자서도 잘 지냈다. 다른 사람들과 춤을 추고 술을 마셨다. 화장실에 다녀온 뒤에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결혼식의 유치한 놀이와 소란을 견뎠고, 누구에게도 무례하지 않았다.
그녀는 크리스토프를 찾기 위해 춤추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갔다. 크리스토프는 셔츠가 땀에 젖은 채 맨발로 뛰고 있었다. 눈을 세게 감고, 음악이 몸 안에서 울리는 것처럼 주먹으로 허공을 두드렸다.
엘렌은 자신이 알던 크리스토프와 전혀 다른 사람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음악이 멈추자 사람들이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섰다. 그리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익숙한 전주가 흘러나왔다.
바람 소리와 느린 피아노, 과장된 현악기의 선율.
〈Les Lacs du Connemara〉였다.
엘렌도 그 노래를 알고 있었다.
경영대학원 시절 파티가 끝날 무렵이면 언제나 흘러나왔다. 학생들은 명문 학교의 전통을 흉내 내며 서로의 어깨를 잡고 뛰었다. 엘렌도 그 속에 섞여 노래를 불렀다. 파리에 처음 도착해 친구들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던 때에도 같은 노래가 흘렀다.
그러나 이곳에서 노래가 시작되자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사람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서로의 어깨를 붙잡았다. 노래를 싫어한다고 말하던 사람도 가사를 알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 아이들까지 같은 순간에 발을 굴렀다.
노래 속 아일랜드의 황무지와 호수는 이들에게 먼 나라의 풍경이 아니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월요일과 공장, 사무실과 병원, 작은 정원과 주말의 바비큐, 가족과 아이들에 관한 노래였다.
크리스토프도 사람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는 친구들의 어깨를 잡고 목청껏 노래를 불렀다. 마르코와 그레그, 오래된 하키 동료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젊은 시절부터 수없이 반복해 온 동작을 다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엘렌은 그들과 함께하지 못했다. 대학의 파티에서 들었던 노래와 같은 노래였지만, 지금 눈앞의 사람들은 전혀 다른 기억을 부르고 있었다. 엘렌에게 그 노래는 자신이 고향을 떠나 다른 사람이 되려고 애쓰던 시절을 데려왔다. 크리스토프에게는 한 번도 완전히 떠난 적 없는 삶 전체가 담겨 있었다.
사람들은 원을 만들고 뛰기 시작했다. 손뼉과 발소리가 음악을 덮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사람들까지 일어나 박자를 맞췄다. 누군가 의자를 밟고 테이블 위로 올라갔고, 다른 사람들이 뒤따랐다.
크리스토프와 마르코도 그 위로 올라갔다. 테이블의 얇은 다리가 흔들렸다. 하지만 누구도 멈추지 않았다. 노래가 가장 크게 치솟는 순간, 나사 하나가 빠져 테이블이 넘어졌다. 동시에 크리스토프의 몸이 앞으로 사라졌다. 접시와 잔, 흰 종이들이 한꺼번에 바닥으로 쏟아졌다.
음악이 멈추었다. 조명이 켜지자 사람들은 갑자기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젖은 셔츠와 흐트러진 머리, 술에 취한 얼굴들이 병원처럼 밝은 형광등 아래 드러났다.
마르코가 달려와 크리스토프를 일으켜 세웠다. 한 손으로 젖은 목을 받치고, 다른 손으로 사람들을 밀어냈다. 방 안에는 오래된 공장에서나 볼 수 있는 사고를 목격한 듯 침묵이 내려앉았다.
엘렌은 가까이 다가갔지만 그들 사이로 들어가지 못했다. 조금 전까지 크리스토프를 붙잡고 있던 사람들은 이제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몸을 만지고,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서로에게 소리쳤다.
크리스토프가 눈을 뜨자 사람들 사이에서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그의 이마에는 커다란 혹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엘렌은 쓰러진 크리스토프보다 그를 안고 있는 마르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을 둘러싼 얼굴들을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이상할 만큼 익숙했다.
엘렌은 오래전에 이들을 떠났다. 이곳의 말투와 농담, 지루함과 작은 만족을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다른 옷을 입고, 다른 일을 하고, 다른 종류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다시 그 한가운데 서 있었다. 크리스토프를 사랑한다고 해서 그들이 함께 지나온 시간까지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가사를 안다고 해서 같은 노래를 부르는 것도 아니었다.
누군가는 노래가 시작되면 자연스럽게 어깨동무를 했고, 누군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
형광등 아래에서 엘렌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여전히 크리스토프를 둘러싸고 있었고, 조금 전까지 모두가 함께 부르던 노래는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그렇게 서로 다른 세계의 문턱을 넘는 일이기도 하지만, 끝내 같은 노래를 듣고도 서로 다른 기억 속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 이번 글에서 다룬 작품들
미셸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스완의 사랑)
레일라 슬리마니의 『타인들의 나라』
니콜라 마티외의 『코네마라(Connema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