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서 우리를 발견하는 방식
개인의 일상을 아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글은 더 이상 혼자만의 것이 아니게 된다. 학교에서 느낀 수치심, 말투 때문에 생긴 거리감, 집에서 배운 침묵, 먹고사는 일 때문에 바뀐 하루의 리듬은 분명 개인의 경험이지만, 동시에 슬롯가 개인 안에 남긴 흔적이기도 하다.
우리가 겪은 은밀한 일들조차 완전히 개인적이지는 않다. 자기서사는 '나'를 쓰는 장르지만, 가장 강력한 자기서사는 결국 '우리'를 만들어낸다.
쉽게 누구누구의 에세이라고 이름 붙여지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나도 그런 적이 있는데' 같은 공감보다 조금 더 느리고, 조심스럽고, 깊다.
쉽게 에세이는 나의 일상을 어디까지 오픈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한다면, 자기서사는 어떻게 더 적나라하게 드러낼지를 고민한다.
누군가의 삶을 따라가는 여정은 개인적인 일상조차 혼자만의 선택으로 만들어진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게 만든다. 말투 안에 가족이 있고, 수치심 안에 학교가 있고, 불안 안에 슬롯의 시선이 들어 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순간 질문이 바뀐다.
왜 이런 감각이
되살아나는 걸까?
카우타르 하르치(Kaoutar Harchi)의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원제:Comme nous existons)은 아니 에르노와는 또 다른 방식으로 의미를 갖는다. 에르노의 계급론적 회고록과 같은 형식을 취하면서도, 거기에 인종과 이민이라는 층위가 더해져 있다.
그녀의 작품이 개인적으로 관심이 갔던 이유는 21세기 프랑스 슬롯가 외면하고 싶어 하는 그 질문 "누가 프랑스인인가?"라는 물음에 가장 뜨거운 답변을 내놓는 바카라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한 여성 작가의 성장기처럼 시작하지만, 한 가족의 이주사, 프랑스 슬롯에서 아랍계 이민자 가족이 겪는 불안, 학교라는 제도가 약속한 미래와 실제로 행한 상처, 그리고 인종화된 몸들이 서로를 알아보는 순간까지를 적나라하게 품고 있다.
제목조차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이다. 처음부터 작품은 '나'라고 말하지 않고 '우리'라고 시작한다. 하지만 그 '우리'는 아주 작고 구체적인 '나'의 장면들을 지나서야 겨우 만들어진다.
작품은 한 어린아이가 부엌 식탁에 앉아 숙제를 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아이는 여섯, 일곱 살 쯤 되었다. 부엌문틈 너머로 거실이 보였고, 거실에는 부모 하니아와 모하메드가 있었다.
두 사람은 오래된 결혼식 영상을 보고 있었다. 흑백도 아니고 완전히 선명하지도 않았다. 소리조차 지지직거리는 비디오테이프였다. 그 안에서 부모는 젊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아름답고, 가볍고, 웃고 있었다.
아이는 새삼스럽게 그 모습을 보고서야 깨닫는다. 부모에게도 자신이 태어나기 전의 시간이 있었다는 사실을. 또 자신이 모르는 기쁨이 있었다.
작품은 처음부터 혼자가 아니다. 아이는 자기 삶을 이야기하기 전에 젊은 시절 부모의 모습을 먼저 열어 놓는다. 부모는 언제나 부모였던 것이 아니다. 그들도 한때는 청춘이었고, 사랑했고, 자신들의 나라와 거리와 가족 안에서 웃었다.
그 기쁨 뒤에 뒤따라오는 시간은 고되다. 이주와 노동과 가난 속에서 흩어진다. 결혼식 영상 속 가족들은 곧 돈과 일자리를 찾아 프랑스, 벨기에, 스페인, 이탈리아로 흩어지게 된다. 한 가족의 결혼식 영상은 이주의 지도처럼 바뀌고 만다.
하르치의 문장은 자주 '나는 모른다'로 시작한다.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모른다. 외할머니의 삶을 거의 모른다. 어머니 하니아가 일곱 살에 프랑스에 왔다는 사실도 몇 조각의 이야기로만 알고 있다. 아버지 모하메드가 어떻게 프랑스로 오게 되었는지도 완전한 연대기도 모른다.
그 조각난 이야기들 속에서 어린 시절의 공간이 등장한다. 프랑스 동부의 S.라는 도시, 엘소(Elsau)라는 동네였다. 엘소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 남쪽에는 작은 주택과 정원이 있었고, 북쪽에는 대형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하니아와 모하메드는 북쪽에 살았지만, 그녀의 부모는 자신의 딸을 남쪽의 학교에 보내기 위해 애썼다. 부모는 서류를 모으고, 전화를 걸고, 이웃에게 묻고, 온갖 방법을 동원했다. 마치 북쪽 사람들의 작은 저항 같았다.
이민자 부모의 사랑은 따뜻한 말이나 포옹으로만 표현되지 않았다. 때로 사랑은 행정서류가 되었고, 학교 배정 신청이 되었고, 이른 아침의 전화가 되었고, 관공서 복도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되었다.
모하메드는 산바카라 중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내 딸은 마리퀴리 학교에 다녀요"라고 말했다. 그 말은 자랑이면서 동시에 해명이었다. 우리도 이곳에 있어도 된다는 의미였고, 남들과 같은 길을 걸을 자격이 있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학교는 부모가 기대한 두 번째 가족이 되어주지는 않았다. 아이는 사립 가톨릭 학교로 가는 버스 38번에 올랐다. 그 버스 안에서 흰 피부, 푸른 눈, 텔레비전 드라마 속 배우 같은 소녀들을 보았다.
그녀가 느꼈던 아름다움은 단순한 미적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가 존재하는 세계가 누구를 중심으로 만들어져 있는지를 보여주는 기준이었다. 어린아이는 그들을 보며 자신이 결코 저런 방식으로 아름다울 수 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리고 곧 그 감각은 폭력으로 바뀌고 말았다.
버스 안에서 몇몇 백인 소녀들이 하르치와 친구 카디자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일이 일어났다. 냄새가 난다고 말했고, 기름 같다고 말했고, 학교에서 잘라야 한다고 말했다. 두 아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언제나 따뜻한 공동체로 시작되지 않았다. 어떤 방식으로써 '우리'는 모욕을 통해 생겨났다. 누군가가 두 사람을 같은 방식으로 바라보고, 같은 방식으로 만지고, 같은 방식으로 낮출 때, 두 사람은 자신들이 같은 편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하르치와 카디자는 친구가 되기 전에 먼저 같은 시선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같은 화살에 맞게 된 것이다. 작품에서는 '우리는 같은 심장을 나누게 되었다'고 표현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상처가 만든 공동체로써 존재했다.
학교의 폭력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교사는 하르치의 필통에서 어머니가 넣어준 작은 코란을 발견했다. 하니아는 딸이 새로운 학교에서 보호받기를 바라며 그것을 넣어주었다.
그러나 교사는 그것을 열어보고 아이에게 물었다.
'너는 마녀니?'
교실은 웃음으로 가득 찼다. 아이는 진심으로 "아니요"라고 대답했다. 이 짧은 대답은 우스꽝스럽기보다 처참하게 느껴졌다. 더욱이 하르치는 자신을 변호할 언어를 아직 갖고 있지 않았다. 어머니의 보호는 교실 안에서 조롱거리가 되었고, 신성한 물건은 잡동사니 상자 속으로 던져졌다.
가장 노골적인 장면은 고등학교 시절에 나왔다. 한 교사가 하르치에게 바카라을 건네며 헌사를 남겼다.
나의 작은 아랍 소녀에게,
자신의 역사를 알아야 하므로...
겉으로는 친절처럼 보일 수도 있는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문장은 아이를 한 명의 학생으로 부르지 않았다. 한 개인으로도 부르지 않았다.
하르치는 '작은 아랍 소녀'가 되었다. 이후 교사는 그에게 학급 앞에서 자신의 출신, 문화, 종교, 모국어에 대해 말해보라고 요구했다. 그 순간 자신이 이국화 되어 전시되고 있다는 느낌이 올라왔다.
교사는 아마 자신의 행동이 폭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좋게 말하면 선의의 폭력이었던 것이다. 관심이라고 믿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 그 관심이 학생을 다수의 질서 앞에 세워놓고, '너는 우리와 다르다'고 선을 긋는 방식이 되었다.
남들과는 다르다는 시선, 내가 서 있는 이곳에 온전히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녀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하지만 하르치는 압델말렉 사야드(Abdelmalek Sayad)의 『이중 부재』(원제: La Double Absence)를 읽으면서 전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열일곱 살의 그녀는 도서관에서 우연히 사야드의 바카라을 발견했다. 이민자의 고통, 지배 관계, 집단적 거짓말, 말의 무게 같은 제목의 글을 읽으며 처음으로 자신과 부모의 삶을 설명해 주는 언어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더 이상 인정을 갈구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가 오래도록 느끼고 있었던 부끄러움, 불안, 분노, 죄바카라감, 배신감은 자신의 결함이 아니라, 지배와 이주와 계급과 인종화의 구조 속에서 생겨난 감정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작품에서 '우리'는 하르치 가족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처음에는 그녀의 가족에서 시작하지만, 이어서 등장하는 '우리'는 카디자와 하르치, 이후에는 엘소의 이웃들, 이민자 가족들, 아랍계와 흑인 청년들, 경찰 폭력 앞에서 자식을 걱정하는 어머니들로 확장한다.
집단적 1인칭은 같은 동네에 살던 아메드가 경찰의 폭력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 사건으로 생겨났다. 아메드의 어머니는 하르치의 집까지 찾아와 장례식에 와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처음에는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폭력이 자기 집 문턱을 넘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메드의 어머니가 던진 한 문장이 그 방어를 무너뜨렸다. 아메드는 엘소의 모든 주민의 아들이었다는 한 문장 때문이었다.
'우리'는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가능한 한 그 '우리'에 포함되지 않으려 했다. 폭력은 남의 일이어야 했고, 고통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기를 바랐고, 불행은 우리 집 문턱에서 멈춰 서길 바랐다. 그러나 어떤 사건은 그 방어선을 뚫고 들어왔다. 그때서야 느끼게 된다. 따로 떨어져 산다고 믿었을 뿐, 사실 같은 조건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
다음 날 하르치의 어머니는 거리로 나갔다. 그리고는 만나는 여성들에게 "그는 아이이고, 우리는 어머니다"라는 짧은 문장을 반복해서 내뱉었다.
『우리가 존재하는 방식』은 한 이민 가정의 생존기이면서 동시에 '우리'라는 말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관한 바카라이다. 상처받은 이들이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을 때, 부모의 불안이 슬롯적 언어를 얻게 되었을 때, 한 청년의 죽음이 동네 전체의 죽음으로 느껴질 때, 한 어머니의 슬픔이 다른 어머니들의 행진이 될 때, '나'는 더 이상 혼자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르치의 '우리'가 모든 차이를 지워버리는 말은 아니다. 하르치가 보여주는 '우리'는 매번 흔들리고, 갈라지고, 도망치고 싶어 하는 공동체다. 하지만 문학은 그 거리를 다시 보게 만든다. 하르치는 자기 부모의 두려움, 침묵, 자식을 보호하려는 과도한 욕망, 딸이 떠날 때 생기는 죄바카라감까지 그대로 보여주려 노력한다. 동시에 그 모든 감정이 어디에서 왔는지 꼬리표를 붙인다. 가난, 노동, 이주, 인종화, 학교, 경찰, 행정, 언론. 한 가족의 식탁 위에는 이 모든 것이 보이지 않게 놓여 있었다.
자기서사는 '나'를 크게 만들기 전에 '나'라고 믿었던 것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들어 함께 있었는지를 알아차리는 글쓰기다. 부모가 있고, 동네가 있고, 친구가 있고, 학교가 있고, 노동이 있고, 비극이 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한 개인이 지나온 세계가 함께 들어 있다.
집단적 1인칭은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내가 겪은 그 일이 나만의 일이 아니었다"는 감각이어야 한다.
가장 강력한 자기서사는 '우리'를 만들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