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불리는 노동

아니 에르노의 『얼어붙은 여자』와 돌봄의 불평등

한 여성이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 앞에는 유모차가 세워져 있고,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에르노는 그 순간을 이렇게 쓴다. "ça devait être la vie", 그것이 삶인 것 같았다고. 그녀는 스물여덟 살이었다.


이것이 삶인 것 같았다.


이 문장이 무서운 이유는 절망이나 분노가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체념도 없다. 그저 건조하다.


하루가 이렇게 생겼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삶이 되었다는 현실을 그녀는 아주 조용히 확인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에르노의 『얼어붙은 여자』는 바로 그 확인의 과정을 기록한다. 제목만 보면 차갑고 무감각한 여성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이 작품에서 "얼어붙는다"는 것은 감정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느끼고, 너무 많은 일을 감당하지만, 자기 삶을 다시 움직일 시간과 언어를 잃어버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겉으로만 보기에 특별히 비극적인 사건조차 없다. 어떠한 폭력도, 극적인 파국도, 누구나 알아볼 만한 악인도 없다. 너무 평범해서, 그래서 더 무겁게 느껴진다.


이 작품이 오토픽션과 오토소시오바이오그래피의 흐름 안에서 특별히 중요한 이유는 에르노가 과거에 느꼈던 개인의 피로가 단지 개인의 피로로 끝나지 않고, 젠더와 계급과 노동의 교차점에서 생산된 것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얼어붙은 여자』는 시작부터 흥미롭다. 에르노는 어린 시절 자신이 보았던 여성들을 떠올린다. 그녀가 자란 세계에는 흔히 상상하는 얌전하고, 조용하고, 집안을 아름답게 정돈하는 여성이 많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 속 여성들은 목소리가 컸고, 거칠었고, 가게와 공장과 들판을 오가며 일을 했다. 손은 거칠었고, 몸은 매끈하게 관리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집안일을 완벽하게 해내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특히 그녀의 어머니는 무척이나 강인한 여성이었다. 가정주부이전에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이었고, 장부를 보고, 손님을 상대하고, 돈을 계산하고, 세상과 부딪히는 사람이었다.


에르노에게 여성의 이미지는 어머니와 같았다. 여성이 약하고 보호받아야 하는 존재라는 감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에게 어머니는 힘이고, 움직임이고,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사람이었다.


더 흥미로운 것은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에르노가 어렸을 때 아버지가 집 안에 있었다. 가게 일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요리를 하고, 감자를 깎고, 아이를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어린 에르노에게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녀의 세계였다.


학교에서는 '아버지는 일하러 가고, 어머니는 집에서 청소하고 맛있는 식사를 준비한다'는 식의 문장을 배웠다. 하지만 그녀의 집은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는 집 안에 있었고, 어머니는 가게 한가운데 있었다. 집안일은 성별에 따라 단단하게 나뉘기보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분배되었다.


노동의 이유가
사랑?


학교에서 접하는 어머니상은 달랐다.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그 세계가 에르노에게는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점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부엌에서 감자를 으깨고, 설거지를 했다. 그리고 어머니는 요리를 잘하지 못했고, 먼지와 정리에 예민하지 않았다.


과거에는 자연스러웠던 모습들이 슬롯의 시선을 통과하면서 비정상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집안일을 하는 것은 실용적인 일이 아니라 우스운 일처럼 느껴졌고, 어머니가 가게일을 전담해서 하는 것이 여성답지 못하게 보였다.


사랑이라는 말은 이 시점부터 위험하게 변했다. 집안일은 노동이라고 불리지 않았다. 좋은 아내의 모습, 좋은 엄마의 역할,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감당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밥을 차리는 일은 정성이었고, 아이를 돌보는 일은 모성애였고, 집을 정돈하는 일은 여성의 기본 자질이었다.


문제는 돌봄이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었다. 사랑이라는 이름 때문에 돌봄이 노동이라는 사실이 지워진다는 시각이었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우리는 결혼을 한다. 에르노도 사랑을 했다. 그녀는 자신과 통한다고 느끼는 남자를 만났다. 두 사람은 함께 공부했고, 수다를 떨었고, 같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결혼을 낭만적인 종착지가 아니라 새로운 모험처럼 상상했다.


하지만 결혼 후에 벌어지는 변화는 갑작스럽지 않았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집안의 일은 그녀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을지, 장은 언제 볼지, 빨래는 어떻게 할지, 아이는 누가 챙길지. 이런 질문들이 그녀의 머릿속에 먼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결혼은 시간표의 재배치일까?


두 사람은 비슷한 수준의 교육을 받았고, 둘 다 일을 했다. 그런데 가정 내에서의 바카라임은 동등하게 나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결혼은 더 이상 감성적 이벤트가 아니었다. 시간표의 재배치가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녀는의 일상은 평범했다. 식사, 장보기, 아이, 집, 학교, 일, 그리고 피곤함. 하나하나는 너무 평범해서 스쳐 지나가버릴 만한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그 평범함이 계속 반복될 때, 누군가의 삶은 점점 다른 방향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공장 노동에는 출근 시간이 있고 퇴근 시간이 있다. 임금이 있고, 작업장이 있고, 노동의 강도를 설명할 말이 존재한다. 물론 그것만으로 힘겨움이 충분히 이해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일은 슬롯적으로 노동이라고 불린다.


하지만 집 안에서의 일은 다르다. 가사 노동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어떤 시간을 의미하는지 피부로 느끼는 사람은 드물다. 아이를 데리고 공원에 가고, 유치원 시간에 맞춰 데려오고, 집에 돌아와 설거지를 하고, 냉장고를 확인하고, 장을 보고, 저녁을 준비해도, 이 모든 시간을 '집에 있었다'는 말로 축소한다.


에르노는 설거지를 마치고 텔레비전 앞의 남편 곁에 앉고는 했다. 날이 좋으면 유모차를 밀고 공원에 나가 벤치에 앉아, 아이를 데리러 갈 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런 평화로운 시간이 삶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때 그녀는 고작 스물여덟 살이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기다림이었다. 아이가 크고, 시간이 지나고, 다음 일을 해야 하는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다. 돌봄의 시간은 기다림으로 흘렀다.


어쩌면 멈춰 있는 것처럼, 혹은 평화로운 일상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끊임없이 다음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문제 될 게 없어 보이지만, 문제는 집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기억하고, 조율하고, 바카라임지는 일이 누구에게 기본값으로 주어지는가였다. 누군가가 도와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도와달라 말하고, 지시하고, 확인하고, 다시 정리하는 사람은 여전히 따로 있었다. 누군가는 머릿속에 가족의 시간표를 넣고 살아야 했다.


에르노는 이러한 시간을 '얼어붙는다'라고 표현했다. 작품의 제목인 『얼어붙은 여자』도 단순한 비유가 아니었다. 한 개인의 감각이 서서히 굳어가는 과정을 가리켰다.


결혼 전에는 움직임 속에 있었다. 공부하고, 읽고, 여행하고, 카페에 앉고, 사람들을 만나고, 혼자 걷고, 자기 삶을 상상했다. 대학 시절의 자유는 작품 속에서 아주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밥이야 대충 때우고, 침대에서 바카라을 읽고, 즉흥적으로 여행을 떠나고, 밤새 이야기하고, 기분에 따라 행동했다.


하지만 결혼과 출산 이후, 그녀의 시간은 더 이상 그렇게 흐르지 않았다. 교사이지만, 마음껏 연구하고 준비하고 성장하는 교사가 되기 어려웠다. 끊임없이 아이와 가정을 병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남편과 함께 밥을 먹고, 같은 침대에서 자고, 같은 신문을 읽었지만, 차이는 보이지 않게 굳어졌다.


얼어붙는다는 느낌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는 무기력한 상태가 아니라, 기울어졌다는 사실을 알지만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했다. 알고 있지만 바꾸기 어려운 상태, 불평등을 말하려 해도, 그것이 너무 평범한 일상으로 포장되어 있어 분명한 언어가 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했다.


이미 슬롯적 노동을 다룬 편에서 이야기했지만 오토픽션이 '나는 이렇게 느꼈다'에서 끝이 난다면, 오토소시오바이오그래피는 '왜 나는 그런 감정을 느끼도록 배치되었는지'에 집중한다. 『얼어붙은 여자』는 이 두 관점을 하나의 문장 안에 동시에 담고 있다. 에르노는 자신의 결혼 생활을 쓰면서 동시에 한 시대의 성별 질서, 교육, 계급 상승의 욕망, 중산층 가정의 이상, 직업여성에게 요구된 이중 바카라임을 함께 드러냈다.


우리에게는 김지영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는 작품을 읽으면서 '남편의 무관심'에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물론 관계 안에는 수많은 불균형이 존재한다. 그러나 작품이 더 집요하게 보여주는 것은 개인의 무지보다 더 넓은 구조다.


같은 교육을 받고, 같은 침대에서 자고, 같은 신문을 읽어도, 집안에서 흘러가는 시간표는 한쪽 사람의 머릿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흔히 인생을 바꾸는 사건을 떠올릴 때 눈에 띄는 장면을 상상한다. 이별, 죽음, 실패, 사고, 그리고 결혼 같은 순간을 생각한다. 하지만 어떤 삶은 그런 큰 장면 없이 바뀐다. 장보기, 식사, 아이, 설거지, 온라인 게임, 유모차, 공원, 학교, 신발, 옷, 과제 같이 반복되는 단어들로 매일 조금씩, 아무도 사건이라고 부르지 않는 일들 속에서 바뀐다.


하루에 한 시간씩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하루 전체가 잘게 쪼개져 사라지는 형식이다. 집중하려는 순간 아이가 부르고, 바카라을 펼치려는 순간 밥때가 된다. 수업 준비를 해야 하지만 장을 봐야 한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이렇게 빼앗긴 시간은 계산하기 조차 어렵다. 그래서 더 쉽게 사라진다.


이 글을 읽고, 또 누군가는 '결혼은 역시 손해야'라고 자기 편향적 시선에 빠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자기 서사가 그렇게 단순한 논리로만 동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에르노가 보여주려 했던 것은 오히려 더 불편하고, 더 현실적인 진실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살아도 시간은 불평등하게 나뉠 수 있다. 같은 교육을 받아도 직업의 기회는 다르게 사용될 수 있다. 같은 집에 살아도 한 사람은 자기 일을 하고, 다른 한 사람은 모두의 일을 기억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따뜻하지만, 그 안에서 누가 시간을 내놓는지는 따로 물어야 한다는 문제의식이다.


그리고 동시에 돌봄이 사랑일 수 있음을 알지만, 동시에 한 사람의 삶을 구조적으로 묶어두는 노동이라는 사실과 함께.








참고로 당시 아니 에르노의 삶을 담은 영화가 있어 소개한다. 〈슈퍼 8 시절〉(원제: Les Années Super 8)은 아니 에르노가 글을 쓰고, 아들인 다비드가 연출을 맡아 어머니의 과거 기록을 함께 영화화한 작품이다.


2022년 프랑스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만들어졌는데, 1972년부터 1981년까지 남편 필리프 에르노가 촬영한 가족의 슈퍼 8mm 무성 필름 위에 에르노 자신의 글과 목소리를 덧입혔다.


당시 에르노 부부는 두 아들과 함께 아네시(Annecy)에서 살고 있었다. 남편은 시청에서 일했고, 에르노는 중학교에서 문학을 가르치고 있었다. 겉으로는 여행, 휴가, 아이들의 성장, 중산층 가족의 평온한 일상이 담긴 홈비디오처럼 보이지만, 에르노는 『얼어붙은 여자』에서처럼 과거 영상들을 통해서 1968년 이후 프랑스 슬롯의 계층 상승 욕망, 가족의 생활양식, 여성의 역할, 그리고 작가로서 자기 자신이 형성되어 가는 시간을 읽어냈다.


소설이 결혼과 돌봄 속에서 한 여성의 시간이 어떻게 굳어가는지를 문장으로 보여준다면, 〈슈퍼 8 시절〉은 그 시기의 실제 이미지들을 통해 행복해 보이는 가족의 일상 아래에 놓인 슬롯적 시간표와 작가의 내면적 거리를 조용히 드러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