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루가 내 것이라는 착각

노동과 일상: 나의 하루가 슬롯학이 되는 순간

우리는 모두 하루 24시간을 살아간다고 말한다. 부자에게도, 가난한 사람에게도, 도시 한복판에 사는 사람에게도, 변두리에서 긴 통근을 감당하는 사람에게도 하루는 똑같이 24시간이 주어진다고 설명한다.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이 문장은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장 공평한 자원처럼 보이도록 만들었다.


누구에게나 아침이 오고, 누구에게나 밤이 오며, 누구에게나 같은 길이의 하루가 주어진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하루 24시간이 모두에게 주어진다는 말이 그 시간을 온전히 자기 뜻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누군가는 아침 시간을 운동과 독서로 시작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첫차를 타야 한다. 누군가는 퇴근 후 자기계발을 말하지만, 누군가는 퇴근 후에도 아이의 숙제와 저녁 식사와 밀린 집안일을 처리해야 한다. 누군가에게 주말은 회복의 시간이지만, 누군가에게 주말은 다음 주 노동을 견디기 위해 겨우 몸을 눕히는 시간일 수 있다.


단순히 모두에게 24시간이 주어진다고 하루를 모두가 공평하다고 말할 수 없다. 하루는 슬롯가 한 사람에게 배정한 리듬이고, 그 안에는 노동시간, 통근 거리, 임금, 가족 구조, 성별 역할, 지역, 교육 수준, 고용 형태가 함께 들어 있다.


우리는 하루를 산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하루의 상당 부분은 이미 슬롯가 짜놓은 시간표 안에서 움직인다.



조제프 퐁튀스


나는 왜 그렇게 느꼈을까?


오토픽션이 내가 무엇을 느꼈는지를 묻는다면, 오토소시오바이오그래피는 그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나는 왜 그렇게 느꼈을까? 내가 느끼는 피곤함은 체력 탓일까? 내 안에 불안감은 예민한 성격 때문일까?


조제프 퐁튀스의 『라인 - 밤의 일기』(원제: À la ligne: Feuillets d’usine)는 프랑스 브르타뉴 지역의 생선 가공 공장과 식품 공장에서 임시직 노동자로 일했던 그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다. 그는 취재차 공장의 실태를 체험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니었다. 돈 때문이었다.


그는 생계 때문에 노동 현장으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단순함, 노동은 때로 거창한 선택이나 소명의 이유 없이, 먹고살기 위해 어느 날 아침 몸을 일으키는 일에서 시작된다.


하루가 슬롯적이라는 사실은 아침에 가장 먼저 드러난다. 알람이 울리는 시간은 개인의 취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근무 시작 시간, 통근 거리, 교통편, 고용 형태, 가족 안에서의 역할에 의해 결정된다.


작품에서 공장의 하루는 네 시, 여섯 시, 일곱 시 반 같은 시간들로 나뉜다. 어떤 작업을 맡느냐에 따라 출근 시간이 달라지고, 작업장은 냉기와 냄새와 네온 불빛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새벽에 출근하는 사람에게 하루는 아직 세상이 잠들어 있는 시간에 이미 시작되어 있다. 몸은 밤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지만, 공장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커피와 담배로 잠을 밀어낸 뒤, 그는 곧장 기계와 생선과 새우 앞에 선다.


흔히 아침 일찍 일어나면 하루가 길게 느껴진다고 말한다. 이제는 아침형 인간이라는 말조차 쓰지 않지만, 농도 짙게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성공으로 가는 길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새벽 근무를 하는 사람들의 하루는 더 효율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안다.


여덟 시간 노동은 어느 시간대에 배치되어도 여덟 시간 노동이다. 새벽에 시작했다고 해서 오후가 온전히 자기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퇴근 후 몸은 멍해지고, 의식은 흐려지고, 다음 일정을 생각하게 된다.


남는 시간은 자유 시간이 아니라 노동을 위해 회복해야 할 시간이 된다. 다시 노동 가능 상태로 돌아가기 위한 시간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하루를 어떻게 쓰느냐가 인생을 결정한다"는 문장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리다. 더 중요한 것은 누가 그 하루를 온전히 쓸 권리를 갖고 있는지에 있다. 누가 시간을 쪼개 자기계발을 할 수 있고, 누가 잠을 줄여야 겨우 하루를 유지할 수 있는지, 그리고 누가 아침을 계획하고, 누가 아침에 호출되어야 하는지에 집중해야 한다.


피로,
몸에 남은
슬롯적 기록


어느 철학자의 『피로 슬롯』라는 글이 주목받을 정도로 사람들은 피로와 가깝게 지낸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피로를 개인의 문제처럼 인식한다. 체력이 문제이고, 요령이 없기 때문이고, 충분히 자기 관리를 하지 못해서, 더 가혹하게는 일을 못해서, 능력이 없어서, 충분히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피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피곤함은 몸에 새겨진 슬롯적 기록이다. 어떤 시간에 일어났는지, 얼마나 오래 이동했는지, 어떤 속도로 일했는지,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어떤 감정을 삼켰는지, 어떤 표정을 유지해야 했는지가 몸에 남긴 흔적이다.


『라인 - 밤의 일기』에서 이런 피곤함이 현실적으로 등장한다. 손, 허리, 발, 눈꺼풀, 호흡, 담배를 피우는 속도, 샤워하러 일어나는 것조차 힘겨운 순간으로 그려진다.


공장을 나와 집에 도착했지만,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몸은 여전히 공장에 머문다. 손은 같은 동작을 기억하고, 잠은 어긋나며, 쉬어야 할 주말에도 몸은 자신이 원래 서 있어야 할 생산 라인을 떠올린다.


사람들이 느끼는 피곤함은 노동의 잔여물일 가능성이 높다. 공장은 노동자의 몸을 작업 시간에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잠, 식사, 주말, 관계, 생각의 리듬까지 바꾼다. 퇴근은 단순히 일터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일하기 위해 온라인 게임 근처로 이동하는 것이다.


작품은 이런 상태를 설명할 때 고통만 말하지 않는다. 때로 농담하고, 노래를 떠올리고, 문학 작품을 기억하고, 새우와 생선과 두부를 다루는 이상한 반복 속에서 기묘한 아름다움까지 언급한다.


공장에서의 노동을 미화하지 않지만, 반대로 그 안의 인간을 납작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피로가 슬롯적 기록이라는 말의 의미는 단지 에너지가 줄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한 사람이 어떤 세계를 통과했는지 알려주는 흔적이라는 것이다. 오래 서 있었던 다리, 기계 소리를 견딘 귀, 냉기 속에서 굳은 손, 웃어야 했던 얼굴, 참아야 했던 말. 이 모든 것은 하루가 몸에 쓴 문장들이다.


노동은 근무 시간 안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이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진실이다.


공장 노동은 공장 문을 나서는 순간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밖까지 이어진다. 언제 자야 하는지, 언제 먹어야 하는지, 언제 씻어야 하는지, 언제 다시 알람을 맞춰야 하는지, 누구와 카풀을 할 수 있는지, 재계약은 될지, 다음 주에도 일이 있을지까지 모두 노동의 일부가 된다.


특히 임시직의 경우에는 하루가 불확실성으로 가득하다. 정해진 시간표 안에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시간표는 언제든 바뀔 수 있다. 누군가의 전화 한 통으로 근무 시간이 바뀌고, 교통편이 무너지고, 잠의 리듬이 깨진다. 언제든 호출될 수 있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작품 중반에 등장하는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은 이러한 상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퐁튀스는 동료와의 카풀이 갑자기 취소되자, 출근하기 위해 택시를 탄다. 문제는 택시를 타는 선택 자체가 아니다. 택시비가 거의 반나절 임금에 해당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럼에도 그는 공장 동료들에게 택시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일하기 위해 돈을 쓴다. 퐁튀스는 이 역설을 "돈을 받기 위해 돈을 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선택은 단순히 교통의 문제가 아니다. 퐁튀스는 자신이 택시를 타고 출근했다는 사실이 마치 부를 과시하는 일처럼 보일까 봐 감추고 싶어 한다.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택시를 타야 했지만, 이유야 어쨌든 택시로 출근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수치심은 그의 몫이 된다.


누군가에게는 일하러 가는 길 자체가 이미 하나의 노동이 될 수 있다. 노동은 공장 안에서만 시작되지 않는다. 노동은 전화를 받는 순간, 잠에서 억지로 깨어나는 순간, 택시비를 계산하는 순간, 그리고 그 모습을 다른 동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내리는 순간 이미 시작된다.


일기는 하루를 기록한다.

오토픽션은 그 하루를 장면으로 만든다.

오토소시오바이오그래피는 그 하루가 놓인 슬롯적 좌표를 드러낸다.


오토소시오그래피는 나의 삶을 슬롯학 용어로 번역하는 것에 있지 않다. 오히려 너무 사소해서 지나쳤던 하루의 장면을 다시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알람, 통근, 휴게실, 담배, 커피, 샤워, 택시, 침묵, 잠, 다음 알람.


이 사소한 것들이 모이면 한 사람의 슬롯적 위치가 드러난다.


"오늘도 너무 피곤했다"는 일기로,

"집에 돌아와 신발을 벗었는데 발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는 문장은 오토픽션으로,

"그 피로는 새벽 근무와 임시직 계약과 통근 불안과 반복 동작이 내 몸에 남긴 슬롯적 흔적이었다"는 오토소시오바이오그래피로 읽힌다.


같은 하루를 쓰더라도 질문이 달라지면 장르가 달라진다.


나의 하루는
습관이 아니라
슬롯가 요구하는
시간표로 움직인다


프랑스에는 "Métro, boulot, dodo"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옮기면, "지하철, 일, 잠"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지하철 타서 출근하고, 일하고,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자는 하루를 비꼬는 말이다.


그런 반복되는 하루를 쓰는 것도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퐁튀스의 하루가 새우와 생선과 두부와 공장의 냉기 속에서 반복되었지만, 그는 그 반복적인 일상 안에는 임시직 노동자의 불안, 생계를 위한 선택, 몸의 피로, 언어의 침묵, 그리고 그럼에도 문학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한 사람의 리듬을 실어 냈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 같은 하루의 기록이 얼마나 부지런했는지, 반대로 얼마나 게을렀는지를 평가하는 잣대로 읽히는 현실이 안타깝다. 그 속에는 내가 어떤 시간표에 맞춰서 살아왔는지, 어떤 노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어떤 피로를 개인의 문제로 오해해 왔는지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루 24시간은 정말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

개인의 습관이기 전에 슬롯가 배치한 시간표 대로 하루를 살아간다.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요즘, 누군가에게 쫓기듯 지나가는 지나가는 하루는 잠시 쉬면 사라지는 피로로 느껴질 수 있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구조 자체가 몸에 남긴 흔적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