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폭로, 기록 사이에서
지켜야 할 한 가지

가족을 다룰 때 지켰으면 하는 규칙

아주 긴 시간동은 가족에 대한 얘기는 안 해왔다. 굳이 특별한 이유가 있던 것은 아니다. 그들에 대해서 쓰려고 하면 이상하게 손이 멈췄기 때문이다.


반면 친구 이야기는 써진다. 이미 헤어진 지나간 누군가의 이야기도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 오래전 살던 동네, 다녔던 학교, 잊고 지낸 얼굴들에 대해서도 별 감정 없이 써 내려갈 수 있다.


그런데 가족과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시간을 문장으로 옮기려는 순간, 글은 갑자기 다른 문제가 되어버린다.


기억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기억하는 엄마는, 엄마 자신이 기억하는 자기 모습과 다를 수 있다. 아버지의 말투는, 아버지가 끝내 숨기고 싶어 했던 무력감의 흔적일 수 있다. 그리고 오래도록 간직한 한 문장은, 누군가에게는 그저 지나간 말일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아무렇지 않게 지나친 장면이, 다른 가족에게는 평생의 균열로 남아 있는 경우도 본다. 그래서 가족을 쓰는 일은 늘 망설임을 동반한다.


사랑과 상처를 폭로하는 기록에서 지켜야 할 한 가지 규칙이 있다면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라는 감각을 잃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내 이야기를 쓰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삶을 허락 없이 열어보는 것일까?

가족을 기억한다는 것은 사랑일까?

아니면 폭로일까?





델핀 드 비강(Delphine de Vigan)의 『내 어머니의 모든 것』(원제: Rien ne s’oppose à la nuit)은 바로 이 불편한 질문에서 시작된다.


이 작품은 엄마 뤼실에 대한 이야기처럼 보인다. 실제로 작품은 엄마의 죽음에서부터 시작한다. 1월의 어느 날 아침, 자신의 집에서 며칠 동안 홀로 죽어 있던 엄마를 발견한다. 피부의 색, 그녀에게서 풍기는 냄새, 그리고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이해하기까지 이상하게 너무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뒤늦게 터져 나온 비명. 이 장면은 애도의 시작이면서 동시에 한 권의 바카라이 시작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리고 시작되는 엄마에 대한 이야기. 하지만 엄마에 대해 쓰려면 엄마 한 사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그녀의 고통을 이해하려면, 엄마가 태어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만든 가족의 공기, 너무 많은 아이들, 반복되는 임신과 육아, 경제적 불안, 가족 안에서 전설처럼 떠도는 죽음들, 입 밖으로 꺼내놓을 수 없는 질문들, 그리고 모두가 조금씩 다르게 기억하는 사건들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처음에는 그저 엄마에 대해 쓰려고 했을 뿐이다. 그러나 글을 쓰기 시작한 순간, 가족 전체를 빼놓을 수 없음 알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자기서사는 혼자만의 장르가 아니게 된다.


가족을 주제로 글을 쓴다는 건 이상한 일이다. 분명 내 안에 남은 기억에서 출발하지만, 그 기억 안에는 이미 다른 사람들의 삶이 들어 있다. 엄마의 말투를 쓰는 순간, 그 말투를 만든 시대가 따라온다. 아버지의 침묵을 쓰는 순간, 그 침묵을 가능하게 한 권위와 수치심이 덧붙는다. 그렇게 한 집 안에서 사랑이 어떻게 분배되고, 관심이 누구에게 쏠리고, 아이들이 어떻게 서로의 자리를 빼앗고 지키려 했는지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은 아이가 처음 겪는 슬롯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족은 단순히 개인 한 사람의 소재가 아니다.


우리는 가족 안에서 사랑을 배운다. 하지만 동시에 계급도 배운다. 돈 이야기를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어떤 직업을 자랑스럽게 말하고 어떤 직업을 숨겨야 하는지, 말투가 세련되다는 것은 무엇인지,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 왜 중요한지, 여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남자는 어떤 감정을 감춰야 하는지, 가족의 문제는 어디까지 밖에 말해도 되는지를 집 안에서 몸으로 익힌다.


가족은 가장 사적인 장소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장 먼저 슬롯가 몸에 들어오는 장소이기도 하다.


작품에서 외가의 분위기는 무척 생기 있고, 활기차고, 눈부신 공간으로 그려진다. 아이들은 많고, 웃음이 끊이지 않고, 엄마는 아름답고 활기차고 생활력 강한 여성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그 밝음 아래에는 피곤함이 따라다닌다. 반복되는 출산과 끝없는 육아, 끝없이 밥을 해야 하고, 빨래는 쌓이고, 아이들은 떠들고, 경제적 상황은 나아질 기미는 안 보이고, 설명할 수 없는 우울함이 존재한다.


엄마는 조용한 아이였다. 그녀는 시끌벅적한 가족들과는 다르게 조금 떨어져 앉아 주변을 살피는 아이였다. 모두가 떠들고 뛰어다니는 가운데, 어린 엄마는 주변을 살피고, 듣고, 분위기를 흡수했다.


가족의 일부이면서도 언제나 한 발작 떨어져 있는 아이, 너무 아름다워서 어른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바로 그런 시선 때문에 자기만의 내면으로 숨어드는 아이,

가족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그 중심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은 아이였다.


작품에서 이런 사소한 장면들이 중요한 이유는 엄마는 단순히 "상처받은 여자"로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비강은 어머니를 한 문장으로 정의 내리지 않는다. 대신 그녀가 자란 집의 소리, 냄새, 말투, 분위기, 공기로 반복되는 비극을 보여준다.


그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이름이 있었다. 어린 동생 안토냉이 우물에 빠지는 사고를 겪었기 때문이다. 사고가 있고 어린 안토냉의 죽음은 가족의 전설 중심에 놓인 사건이 된다. 가족은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비극조차 명확하게 밝혀내지 않는다. 그때 누가 어디에 있었는지, 아이가 어떻게 우물에 빠졌는지, 어른들은 무엇을 했는지 등... 기억은 사람마다 조금씩 달랐다.


가족들의 증언을 모으고, 녹취를 풀고, 사진과 편지와 글을 뒤졌지만, 자료가 많아질수록 진실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실이 얼마나 불안정한 것인지 알게 된다.


어머니는 죽었지만,
나는 살아 있는 주제를 다루는 중이다.


이 문장은 가족을 쓰는 일이 왜 어려운지 정확히 보여준다. 이제는 세상을 등진, 어쩌면 더는 변할 수 없는 누군가를 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살아 있는 기억을 다루는 일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남아 있는 이들의 상처, 죄바카라감, 침묵, 자기 방어, 서로 다른 기억을 만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비강은 진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남은 것은 흩어진 조각들뿐이고, 그 조각을 배열하는 순간 이미 또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자기서사는 흔히 진실을 말하는 장르처럼 여겨진다. 내가 직접 겪은 일을 쓴다고 하면, 사람들은 거기에 특별한 진정성을 부여한다. 하지만 가족을 대상으로 하는 순간, 내 안의 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가족 안에서 하나의 사건은 하나의 얼굴을 갖지 않는다. 같은 식탁에 앉아 있었던 사람들도 서로 다른 장면을 기억한다. 누군가는 그날의 웃음을 기억하고, 누군가는 그날 이후 시작된 침묵을 기억한다. 누군가는 사랑이었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방치였다고 말한다.


델핀 드 비강


개인적으로 아니 에르노의 작품보다 델핀 드 비강의 작품을 들고 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에르노의 작품들, 『남자의 자리』, 『한 여자』, 『부끄러움』, 『다른 딸』 같은 경우에는 에르노 자신의 기억과 감정에서 출발하지만,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은 그 감정이 어디서 왔는지를 끝까지 추적한다.


슬픔은 개인적인 감정으로 시작하지만, 곧 가족의 구조로 번진다. 죄바카라감은 개인의 마음속에서 발생하지만, 그 죄바카라감을 만든 것은 가족이 비극을 처리하는 방식이 특히 주목할만하다. 그리고 침묵은 개인적인 성격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 집에서 말해도 되는 것과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해 온 오랜 규칙의 결과라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시선이 바로 오토소시오바이오그래피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나에 대해서 쓰지만, 나만 쓰지는 않는다. 엄마에 대해서 쓰지만, 엄마 개인만으로는 부족하다. 가족의 이야기를 쓰지만, 가족을 하나의 사적인 집단으로만 남겨두지 않는 것이다.


가족을 다룬 이야기 안에서 계급, 젠더, 언어, 세대, 종교, 노동, 교육, 정신질환을 둘러싼 슬롯적 태도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가족은 언제나 슬롯보다 작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슬롯가 가장 작게 접힌 형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밥상머리 앞에 시대의 문법이 놓여 있고, 누가 말 하고, 누가 듣는지, 누가 가족의 중심이고, 누가 돌봄을 맡고 있는지, 누가 밖으로 나가고 누가 집 안을 바카라임지는지, 누가 실수해도 용서받고 누가 늘 조심해야 하는지... 가족은 감정의 장소이지만, 동시에 권력의 장소로써 존재한다.


남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위험하다. 사랑해서 쓰는 문장도 누군가에게는 폭력이 될 수 있다. 기억하기 위해 쓴 건조한 문장조차 수치를 불러일으키는 폭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 대상이 이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왜 그 일을 다시 꺼내느냐"는 질문으로 돌아올 수 있다.


작품 후반부에서도 비강 자신의 글이 가족들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의식한다.


그렇다고 가족을 자기서사에서 배제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가족 안에는 너무 오래 말해지지 않은 것들이 있다. 누군가의 고통이 성격으로 오해되고, 누군가의 침묵이 평화로 포장되고, 누군가의 희생이 미덕으로 기억되는 이야깃거리가 너무나도 많다. 가족이라는 이름 때문에 되묻지 못한 말들, "그때는 다 그랬다"는 말로 덮인 폭력, "그래도 부모인데"라는 말로 지워진 상처까지도.


쓰지 않는 것이 언제나 윤리적인 것은 아니다. 침묵 역시 하나의 선택이 될 수 있지만, 금이라고 말하기도 힘들다. 문제는 쓰느냐 쓰지 않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쓰느냐에 있다.


가족을 쓴다는 것은 누군가를 심판하는 일이 아니다. 물론 어떤 글에는 분노가 필요하다. 어떤 폭력은 폭력이라고 고발해야 하고, 상처는 상처라고 털어놓아야 아물기 시작한다. 그러나 좋은 자기서사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최소한 누군가를 가해자로 또 다른 누군가를 피해자로 고정한 뒤 문장을 끝내지 않는다. "상처받았다"로 시작해서 "그 상처는 어디에서 왔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대부분 그 대답은 가족을 넘어 시대와 슬롯로 이어지게 된다.


개인의 감정은 항상 슬롯적 좌표를 내포한다. 귀에 거슬리는 말투가 계급의 언어였고, 이해할 수 없었던 당연함이 젠더와 세대의 규칙 속에서 만들어졌음을 깨닫게 된다.


델핀 드 비강도 자신의 엄마를 되살리지는 못한다. 가족의 진실조차 뚜렷하게 결론 내리지 못한다. 하지만 더 의미 있는 시선은 그녀가 지나온 고통을 그녀가 살아온 집의 구조로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어딘가에서 읽은 비강의 이 문장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다.


가족을 쓴다는 건
끝내 이해하려는 일이다.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래도 그 어둠 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 보는 일이다.


문학은 종종 치유의 언어처럼 여겨지지만, 타인을 다룰 때에는 나의 치유가 남에게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가족은 가장 가까운 타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