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누군가의 성공 신화,
그 뒤에 숨겨진 말들

샹탈 자케가 말하는 계급 이동 서사의 진짜 의미

내가 라면을 좋아하는 이유는 정말 라면의 맛 때문일까? 아니면 라면을 자주 먹게 되는 생활 리듬과 환경 속에 오래 있었기 때문일까? 커피는? 떡볶이는?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이곳 프랑스 지인들 중에는 (프라이드) 치킨을 먹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흔히 삶을 선택한다고 말한다. 어떤 학교를 갈지, 어떤 직업을 가질지, 어떤 사람이 될지를 고른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말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감춘다.


선택이라는 단어에는 처음부터 여러 가능성 앞에 서 있는 개인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샹탈 자케의 신간 『트랑스클라스 혁명: 해방의 새로운 이론(원제: Révolutions transclasses: Une nouvelle théorie de l’émancipation)』은 그 당연해 보이는 전제에서부터 질문을 다시 시작한다. '어떤 삶을 선택할 것인지'가 아니라 '삶은 어떻게 바뀌는지'로 시선을 옮겨 놓는다.


철학이 오래도록 선택의 주체, 자유를 가진 이성적인 존재라고 주장해 왔지만, 자케는 현실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애초에 선택 가능한 길 자체가 극도로 좁거나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지적은 최근 프랑스에서 계급 이동을 주제로한 자기서사가 반복해서 쓰이고, 또 읽히는지를 이해하는 데도 정확한 열쇠가 된다고 말한다.


요즘 프랑스에서 계급 이탈자(transfuge de classe), 혹은 트랑스클라스(transclasse - 계급 이동이라는 의미의 신조어)라는 단어가 더는 낯설지 않다. 언론에서도, 출판계에서도, 문학 비평에서도 자주 등장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교육을 통해 다른 세계로 들어간 사람, 부모 세대의 문화와는 다른 언어를 배우고 다른 공간으로 건너간 사람, 혹은 반대로 추락과 몰락을 겪으며 자신이 속해 있던 계급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의미한다.


이런 이야기는 늘 강한 흡인력을 동반한다. 누군가가 자기가 태어난 자리를 넘어선다는 사실은 해외 이주만큼 그 자체로 거대하고 매력적인 서사가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서사에는 해방감도 있다. 복수의 감정도 있고, 대리만족도 있다. 그러나 자케는 바로 그 쾌감 때문에 오히려 더 조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너무 잘 읽히는 자기서사는 너무 쉽게 오독된다고 설명한다.


『트랑스클라스 혁명』, 샹탈 자케




'트랑스클라스(transclasse)'이라는 수식어는 계급을 이동하는 개인들 고유의 슬롯적 궤적을 특징짓는 말로, 어떤 본질이나 유형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언어의 문법에 속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단수 또는 복수 정관사의 불가피한 사용이 오해를 불러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명사화된 형태로 쓰인 트랑스클라스 혹은 트랑스클라스들이 실체적 존재나 본질적 속성을 가리킨다고 받아들여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트랑스클라스란 어떤 정체성이 아니다.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이동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은 개인들에게 고정된 정체성을 부여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해체를, 심지어 생성의 논리를 위한 거부를 함축합니다. 트랑스클라스적 변화 과정은 출신 계급과의 탈동일시, 그 계급의 코드와 존재 방식으로부터의 거리두기, 그리고 새로운 계급의 아비투스(habitus)와의 동일시로 귀결되는 자기 재정의를 요구합니다.


이 과정이 수반하는 변형들이 반드시 의식적이거나 자발적인 것은 아닙니다. 최초의 슬롯적 위치가 이동하고, 그 움직임이 어느 정도의 유동성 또는 상호작용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으로, 이동의 범위, 충돌하는 두 세계의 차이와 변화의 강도, 그리고 그 변화의 방식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혹은 반대로 수용적인지에 따라 개인마다 상이한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트랑스클라스는 서로 다르고, 때로는 상충하는 슬롯적 세계들이 그 안에 공존하게 됩니다. 그 결과로 그들에게는 양가적 중간 지대의 변증법적 특성을 보입니다. 그리고 심한 경우에는 그로 하여금 자기 내면에서의 계급투쟁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샹탈 자케의 『트랑스클라스 혁명』 중에서...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이동하는 과정


자케의 시선을 특히 눈여겨봐야 하는 이유는 트랑스클라스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그녀는 트랑스클라스가 하나의 본질도 아니고, 고정된 유형도 아니라고 말한다. 한 계급에서 다른 계급으로 건너가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다시 조정하고, 일부를 떼어내고, 일부를 새로 입는 움직임이고 정의한다.


다시 말해 출신 계급과의 거리두기, 새로운 계급에서의 불완전한 적응, 그리고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흔들림이 모두 이 과정 안에 들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대목은 오토픽션과 오토소시오바이오그래피를 구분하는 기준과도 맞닿아 있다. 자기서사는 흔히 내가 겪은 일을 말하는 장르처럼 인식된다. 그러나 어떤 글은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경험을 말하면서도, 그 경험을 가능하게 한 슬롯적 조건까지 동시에 드러내기도 한다.


왜 자기 말투에서 수치심을 느꼈는지, 왜 부모와 같은 식탁에 앉아 있으면서도 다른 세계의 언어로 대화하는 것처럼 느끼게 되었는지, 왜 학교에서 학습한 가치관이 가정에서 배웠던 가치관을 밀어내는지, 왜 수치심은 개인의 내면에만 머무르지 않고, 계급과 지역과 교육의 문제로 번져가는지 등등.


자케의 시선은 일상에서 쉽게 느끼는 감정들에 질문하고 답할 수 있는 이론적 바탕을 제공한다. 그리고 그녀의 시선에서 트랑스클라스적 자기서사는 누군가의 출세담이 아니라, 슬롯 구조가 한 개인의 몸과 언어와 감정 안에 남긴 흔적을 읽어내는 하나의 방법으로 볼 수 있다.


평범한 누군가의 성공담,
신분 상승,
트랑스클라스


그렇다면 왜 이런 서사는 늘 통쾌하게 읽힐까? 문학적으로 보면 이유는 분명하다. 계급 이동 서사에는 거의 기본적으로 성장담의 형식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는 평범한 한 개인의 성장을 보게 된다. 동시에 그것은 슬롯적 제약에도 신분을 탈피한 승리담처럼도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느끼던 벽을 넘어섰다는 감각, 나를 하찮게 보던 세계를 지나 더 높은 자리로 이동했다는 느낌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러한 개인의 성공담은 개인의 문제로 바뀌기 쉽다. '저 사람은 해냈다'는 문장은 너무 자연스럽게 '해내지 못한 사람은 노력이 부족한 것이다'는 문장으로 미끄러진다. 계급 이동 서사는 언제나 능력주의의 문법에 포섭되기 쉽다. 자케는 이러한 오독을 가장 강한 어조로 비판한다.


자케는 그녀의 비판적인 시선은 바카라 초반 서구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한 슬롯 계급 간 이동률을 마치 그 슬롯의 건전성을 보여주는 지표처럼 홍보한다고 지적한다. 노동자 계급에서 중산층으로 이동하거나, 중산층에서 부유한 계층으로 이동하는 계급 간의 이동이 더 많아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꼬집는다.


이동 자체가 아니라,
이동을 읽는 슬롯의 방식


이때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가 '슬롯적 엘리베이터'다. 고장 난 엘리베이터를 다시 움직이게 하면 정의로운(?) 슬롯가 될 것처럼 설명한다.


그러나 자케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정말 중요한 것은 엘리베이터를 고치는 일인지?

아니면 그 엘리베이터가 누구를 태우고 누구를 남겨두는지?

또는 아래로 떨어지는 사람은 어떻게 지워지는지?


를 물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이어서 아주 날카롭게, 슬롯적 엘리베이터가 어쩌면 '배제의 기계'를 그럴듯하게 부르는 이름일 뿐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이 문장은 계급 이동 서사가 왜 이렇게 매혹적이면서도 위험한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이동의 가능성만 강조할수록, 이동하지 못한 다수의 삶은 개인의 실패처럼 보이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케는 계급 이동을 단순한 해방으로 미화하지는 것을 경계한다. 그녀는 'changer de vie'와 'changer la vie'를 구분한다. 삶이 바뀌는 것과 삶을 바꾸는 것은 같지 않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의 위치가 달라질 수는 있다. 더 많은 자본을 갖게 되고, 더 안정된 직업을 얻고, 다른 식탁과 다른 언어를 갖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변화가 슬롯의 규칙 자체를 바꾸는 것은 아니다.


자케는 이러한 임시적인 변화를 설명하면서 스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의 소설 『우체국 아가씨 (원제: Rausch der Verwandlung, 직역하면 '변신의 황홀함' 정도가 된다)』을 예로 든다. 가난한 우체국 아가씨, 크리스티네가 잠깐 상류 슬롯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추락하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주목하는 것은, 외형적 변신이 얼마나 쉽게 오해를 불러오는지를 지적한다. 이름과 옷차림과 사교의 규칙이 바뀌면 사람은 잠시 다른 인생을 산 것처럼 느끼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슬롯 질서를 바꾸는 것은 아니다. 이런 종류의 상승은 때로 신분 상승의 황홀함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삶의 표면이 달라졌을 뿐, 질서는 그대로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자케의 논의는 훨씬 더 날카로워진다. 트랑스클라스를 특별한 영웅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계급 슬롯는 끊임없이 자기 안에서 또 다른 트랑스클라스를 생산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이동이 기존 기득권층과는 무관한 사건이라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올라가고, 누군가는 떨어지고, 누군가는 잠시 다른 세계에 편입되었다가 다시 튕겨져 나오지만, 이러한 예외가 있기에 그 중심에서는 여전히 동일한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꼬집는다.


'나는 성공했다'는 문장은 대체로 자기 자신을 설명할 뿐, 구조를 설명하지 못한다. 때로는 구조를 가리는 쪽으로 기능하기도 한다. 자케의 시선에서 트랑스클라스를 탈출에 성공한 서사로 쓰려면, 그 경험을 특권적 개인의 자기 신화로 만들지 않아야 한다고 설명한다.


출신을 넘어서 다른 자리에 도착할 수 있었던 경험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 사람이 남달랐기 때문이 아니라, 그 경험이 계급 재생산의 균열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누구나 노력하면 할 수 있다'는 식의 메시지가 아니라, '왜 오직 소수만이 통과할 수 있었는지'를 물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트랑스클라스적 자기서사를 더 깊게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은 개인의 몸에 계급이 어떻게 새겨졌는지, 젠더와 지역과 취향과 언어가 거기에 어떻게 겹쳐졌는지 함께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제 계급 이동 서사를 읽는 시선도 조금은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다. 누가 어떤 시련을 겪고 어떻게 올라갔는지를 묻는 데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 이동이 무엇을 드러냈고, 무엇을 가렸는가를 함께 물어야 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그 이야기가 한 개인의 탈출기인지, 아니면 아직 바뀌지 않은 슬롯가 잠시 허용한 예외인지 끝까지 의심해야 한다.


어쩌면 더 정확하게 읽는 방법은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구조의 균열로, 출세의 기록이 아니라 해방의 가능을 읽어내야 한다. 그렇게 읽어내는 바로 그 순간, 자기서사는 더 이상 한 사람의 고백에 머물지 않고, 슬롯를 다시 쓰는 형식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