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지는 순간은 늘
사소한 사건에서부터 시작한다

자기서사에서 나를 드러나는 방식

작년에 한국에서 유난히 자주 들리던 단어 가운데 하나가 '아비투스(Habitus)'였다. 많은 사람들은 이 단어를 대체로 좋은 취향, 세련된 태도, 상류층의 자연스러운 제스처나 품위 있어 보이는 행동 정도로 이해한다.


도리스 메르틴의 『아비투스 - 인간의 품격을 결정하는 7가지 자본』에서는 엘리트의 코드, 말하는 방식, 매너, 취향을 해독하고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설명한다. 반면 그녀보다 이전에 아비투스를 프랑스 대중들에게 알린 피에르 부르디외는 아비투스는 훨씬 더 단단하고 오래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아비투스는 단순한 예절이나 스타일이 아니라, 한 사람이 자라온 환경과 슬롯적 경험이 피부와 가치관 속에 남긴 지속적인 성향이라고 설명한다. 메르틴의 관심이 어떻게 위로 올라갈 것인지에 있다면, 부르디외의 질문은 오히려 왜 어떤 사람에게는 처음부터 자연스럽고, 어떤 사람에게는 끝내 어색한지에 집중한다.


이 차이는 생각보다 중요하다.


사람들은 식탁에서 포크와 나이프를 드는 방식, 대화에 끼어드는 타이밍, 와인이나 전시에 대해 말하는 태도를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맞다. 사람은 새로운 세계의 규칙을 익히며 살아간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없어지지 않는 불편한 감정들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내기 직전, 한 번 더 머릿속에서 검열하게 되는 버릇.

괜히 어깨가 굳고,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는 순간.

이미 규칙과 매너와 분위기에 익숙해졌음에도, 신체는 아직 그 세계의 시민이 되지 못한 것처럼 느껴지는 이질감.


부르디외의 아비투스는 바로 그런 데서 시작된다.


스위스에 있는 동네 레스토랑에 방문한 적이 있다. 파스타를 포함해서 캐주얼한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일반 동네 식당이었다. 독일어로 쓰인 메뉴판을 오래 들여다볼 수밖에 없었다. 가격 때문이 아니라, 무엇이 좋을지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적당한 메뉴를 골랐다. 치즈와 함께 나오는 어린잎채소 샐러드와 소시지와 함께 먹을 수 있는 감자 부침 요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함께 간 친구들과 수다를 한참 동안 떤 뒤에, 앞에 앉은 친구가 메뉴를 골랐으면 펼쳐져 있는 메뉴판을 닫으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있다. 모른다는 사실이 드러날까 봐, 낯설다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아 조용히 웃고만 있게 되는 순간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성격 문제라고 판단하기도 한다. 소심해서, 낯을 가려서, 센스가 없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어떤 위축은 실제로 성격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위축이 성격에서 오지는 않는다.


우리는 종종 슬롯적으로 학습된 불편함을 개인의 내면으로 잘못 번역한다. 말수가 적은 사람을 내성적이라고 부르고, 특정한 공간에서 유난히 작아지는 사람을 자신감이 부족하다고 해석한다.


하지만 어떤 침묵은 성격이 아니라 경험의 역사에서 온다. 어떤 망설임은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개인이 가진 언어가 시험받고 있다는 감각에서 생겨난다.


수치심도 그렇다. 수치심은 단순히 내가 부족하다는 감정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그보다는 내가 속한 세계와 다른 세계가 부딪히는 순간, 내 안에 남아 있던 기준들이 갑자기 낡아 보일 때 생기는 감정에 더 가깝다.


그리고 위축감은 그 수치심이 행동으로 번역된 형태라고 말한다. 자기 검열은 그 수치심이 언어로 옮겨간 결과이기 때문이다.


말하기 전에 스스로를 한 번 지우고, 취향을 드러내기 전에 그것이 충분히 세련되었는지 확인하고, 긴장을 풀기 전에 자신 스스로가 이 공간에 어울리는지를 먼저 확인하게 되는 순간들처럼.


가난, 성공, 신분 상승 같은 큰 단어보다 먼저 봐야 하는 것은 아주 사소한 장면들이다. 어떤 사람은 식탁에서 포크를 잘못 들지 않으려고 긴장한다. 어떤 사람은 사투리가 튀어나올까 봐 어색한 말투로 말을 한다. 바카라과 음악 이야기가 오가는 자리에서, 자신이 좋아해 온 것들이 갑자기 설명하기 민망한 취향처럼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취향마저 포장한다.


한 사람이 지나온
시간의 흔적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이슈에 유독 예민하다. 공식적인 계급은 사라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계급 문제를 다룬다.


그들에게 계급은 통장 잔고로만 보이는 문제가 아니다. 문장과 취향과 행동과 습관 속에도 남는다.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부끄러워하는지, 어떤 공간에서 자연스럽고 어떤 공간에서 긴장하는지 같은 것들로 한 사람이 지나온 시간과 세계의 흔적을 가름한다.


부르디외의 아비투스라는 개념이 프랑스 대중들에게 알려질 수 있었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시선을 꼬집었기 때문이다. 그는 취향을 단순한 개인의 선호로 보지 않고, 음악, 미술, 음식, 언어, 태도, 심지어 일상적인 제스처까지도 슬롯적 위치와 분리해서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비투스는 고급스러운 취향을 찾는 방법 같은 자기개발적 조언과는 다른 성격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떤 취향을 획득하는 방법이 아니라, 왜 어떤 취향은 누군가에게 처음부터 자연스럽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끝내 노력의 흔적을 지울 수 없는가를 설명한다.


그리고 자기서사는 이러한 아비투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자기서사는 단지 내가 겪었던 일, 그리고 내가 느꼈던 감정을 글로 표현하는 장르로만 단정 지을 수 없다. 개인감정이 어떤 슬롯적 좌표 위에서 발생했는지를 보여주는 장르가 되기 때문이다.


특히 계급 이동을 겪은 작가들의 글을 읽다 보면, 그 변화는 종종 지식의 증가보다 먼저 어색한 행동으로 드러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배웠는데도 편하지 않고, 알게 되었는데도 자연스럽지 않은 감각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이런 미세한 불일치가 자기서사의 긴장감을 만든다.


에두아르 루이


에두아르 루이(Edouard Louis)의 작품들이 주목을 받고 있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은 『에디의 끝』이지만, 계급 이동 이후의 말투와 행동, 취향의 변화를 더 직접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작품은 오히려 이후에 출간한 『변경:방법(원제: Changer: méthode)』쪽이다.


『에디의 끝』이 어린 시절의 폭력과 수치심, 모욕의 출발점을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바카라이라면, 『변경:방법』은 그 이후 작품 속 화자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다시 만들려고 했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변하려는 노력은 막연한 결심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하나의 방법이 된다.


이름, 얼굴, 몸가짐, 습관,
그리고 삶 바꾸기


파리에 도착한 뒤 그는 종이에 이름 바꾸기, 얼굴 바꾸기, 몸가짐 바꾸기, 습관 바꾸기, 삶 바꾸기 같은 항목을 적어두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것만 보아도 자기 자신을 하나의 프로젝트처럼 재구성하는 기록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이 작품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이러한 변화가 지식의 축적보다 먼저 신체적 훈련으로 그려진다는 점이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엘레나의 방에서 식사법을 배우는 순간이다. 엘레나는 빵 조각과 접시, 포크와 나이프를 가져와 그것을 어떻게 들고, 어떻게 입으로 가져가고, 식사가 끝난 뒤 수저를 어떤 모양으로 접시 위에 두는지까지 하나씩 보여준다.


작품 속 화자는 그 장면을 회상하며,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식사를 하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자신은 그때 새로운 몸가짐을 배우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그 장면이 자신에게 가르쳐준 것은 먹는 방식뿐만이 아니라, 걷는 방식, 옷 입는 방식, 말하는 방식까지 모두 과거의 흔적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고 적는다. 결국 계급 이동은 어떤 바카라을 읽게 되었는가의 중요한 것이 아니라, 포크를 쥔 손가락의 모양과 식탁에서 태도를 바꾸는 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 훈련은 곧바로 말투와 웃음까지 이어졌다. 프랑스 북부 지방 사투리를 지우기 위해 매일 단어를 반복해 발음하고, 대화 중에 무의식적으로 사투리가 튀어나오면 속으로는 자신을 모욕하기도 한다. 그리고 심지어 어떤 단어 하나를 제대로 발음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장면까지 기록한다.


웃음도 마찬가지다. 너무 크고 거칠게 웃는다는 말을 들은 뒤, 그는 거울 앞에 서서 더 작고 덜 과장된 새로운 웃음을 연습한다. 결국 그 인공적인 웃음이 자기 웃음이 되어버리지만, 그는 웃음 속에서 여전히 만들어진 흔적을 느낀다.


더 날카로운 순간은 수치심이 가족과 과거를 대하는 태도로 번지는 장면이다. 엘레나의 어머니가 가족의 직업을 묻자, 아버지가 공장 노동자였고 어머니는 노인 돌봄 일을 했다고 말하지 못한다. 대신 그는 자기 가족을 일부러 더 거칠고 추하게 과장해 묘사한다. 그 말을 하는 자신도 부끄러울 정도로.


자신도 그 과장된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렇게 해야만 새로운 세계에 제대로 설 수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결국 그는 과거의 이름 '에디' 대신 새로운 이름 '에두아르'라고 불리게 된다.




나는 거리를 걸었다. 길 위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파리의 거리에서 장바구니를 들고 오가던 저 사람들을 보며 부러워했고, 그들의 삶이 어떨지 상상하곤 했다. 하지만 이제 나도 저 사람들처럼 이 도시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른 누군가가 보기에는 처음부터 이곳의 일부였던 것처럼, 늘 이 도시에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누군가는 이번에는 나를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아파트로 돌아왔을 때, 나는 종이 한 장을 꺼내 앞으로의 삶을 위한 계획을 적었다.


이름 바꾸기(법원에 가기?), 얼굴 바꾸기, 피부 바꾸기(문신?), 읽기(다른 사람이 되기, 쓰기), 몸가짐 바꾸기, 습관 바꾸기, 삶 바꾸기(누군가가 되기).


다른 사람들도 다 그런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게는 이 변화의 과정을 시작하고 나서, 끊임없이 의식적으로 강박적이 일처럼 느껴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변화를 느리고 점진적인 과정처럼 설명한다. 행동의 몸가짐, 존재 방식과 삶의 방식이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만들어졌기 때문에 굳이 노력하거나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터득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삶의 초반에 알던 사람들과는 다른 종류의 사람들, 다르게 행동하는 이들들과 만나고 어울리면서, 그 새로운 자세와 새로운 개인들의 태도를, 자각하지도 못한 채, 자기 안에 내면화하면서 변화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모든 것을 바꾸고 싶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진행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하나의 결단의 결과이기를 바랐다. 내 의지에서 벗어나는 것이 더는 아무것도 없기를 바랐다.


『변경:방법』 중에서...




장면을 보여주는
오토픽션,
원인을 해석하는
오토소시오바이오그래피는


여기서 오토픽션과 오토소시오바이오그래피를 아주 짧게 구분해 볼 수 있다. 오토픽션(autofiction)은 내가 느낀 당혹감과 수치심의 장면을 서사로 만드는 방식이고, 오토소시오바이오그래피(autobiographie)는 그 당혹감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계급, 언어, 교육, 가족 같은 슬롯적 좌표로 해석하는 방식이다.


좋은 자기서사는 둘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너지를 얻는다. 장면만 있으면 고백에 머물기 쉽고, 분석만 있으면 살아 있는 문장이 사라지기 쉽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작아졌다'라는 문장과 '왜 나는 그 자리에서 작아질 수밖에 없었는지'가 한 텍스트 안에서 있어야 하는 것처럼.


에두아르 루이의 글은 바로 그 접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개인적인 수치심과 슬롯적 구조를 분리하지 않는다. 동성애 혐오, 남성성의 강요, 가난, 계급 이동의 욕망, 새로운 말투와 새로운 취향을 배우는 과정이 모두 하나의 경험으로 얽혀 있다.


그리고 어떤 수치심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슬롯적 감각일 수 있다.


대놓고 무시하지는 않았지만, 이상하게 혼자 작아졌던 순간들, 내 말이 너무 직설적인지, 너무 촌스러운지, 너무 부족해 보이는지 스스로 점검하느라 대화의 절반을 놓쳐버린 기억처럼.


이런 기억을 너무 빨리 개인의 문제로 봉합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가 흔히 개인적이라고 생각하는 감정들 가운데 일부는 사실 슬롯적 감각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슬롯가 개인 안으로 들어와 감정의 형태를 취한다. 그리고 수치심으로 위축되는 감각은 그 슬롯가 개인의 몸에 남긴 기억이다. 자기 검열은 그 기억이 언어 사용에 남는 방식인 것이다.


그래서 침묵은 단지 말할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 언어가 가치 없다고 배워온 시간의 결과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의 과장된 세련됨 역시 자연스러움의 증거가 아니라,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수정해 온 노력의 흔적일 수 있다.


아비투스라는 말을 한때 세련됨의 동의어처럼 받아들였다면, 자기서사는 그 단어를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려놓고 있다. 멋있어 보이는 라이프스타일의 이름이 아니라, 개인의 행동, 가치관, 말투, 입맛, 취향에 새겨진 슬롯적 역사의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어떤 취향은 취향이기 전에 생존의 기술이 되고, 어떤 말투는 단순한 화법이 아니라 경계 통과의 도구가 된다.


몸이 먼저 알고 있다


흔히 삶의 중요한 갈등은 거대한 사건에서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균열은 그보다 더 사소한 데서 먼저 나타난다.


말투, 취향, 몸의 습관.


무엇을 좋아하는지보다 더 깊은 곳에서, 어떻게 좋아하는지, 어디서 망설이는지, 어떤 자리를 자연스럽게 차지하고 어떤 자리 앞에서 스스로를 줄이는지가 한 사람의 슬롯적 좌표를 드러낸다.


그래서 자기서사를 읽는 것을, 그리고 한 번쯤은 써 보는 것도 추천한다. 더 이상 내가 어떤 상처를 입었는지만 포커스가 맞춰진 글이 아니라, 내가 왜 수치심을 느꼈는지, 왜 목소리를 낮추고 겸손하게 보이는 자아로, 반대로 어떤 자리에서는 과장되게 연출하게 되는지, 그리고 왜 ㅇㅇ척하는 모습을 원하지만 동시에 ㅇㅇ척하는 자신을 못 견뎌하는지 알아차리는지를 보여주는 글 말이다.


계급은 통장에만 남지 않는다. 그것은 문장과 취향과 습관에도 남는다.


그리고 좋은 자기서사는 바로 그 흔적들이 어떻게 한 사람의 감정이 되고, 그 감정이 다시 하나의 문장이 되는지를 끝까지 따라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