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평한 글쓰기, 아니 에르노 『남자의 자리』
요즘은 감정적인 글이 너무 많다.
우울, 허무, 번아웃, 이별 혹은 이혼, 심지어는 투병까지 글감이 된다. 그리고 이런 누군가의 상처와 고백은 예전보다 훨씬 더 쉽고 빠르게 도착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람들은 누군가의 슬픔을 보고, 또 자기의 상처를 꺼내 보인다. 아픈 일을 아프다고 말하고, 견딜 수 없었던 시간은 견딜 수 없었다고 털어놓는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글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피곤할 뿐이다.
이런 글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쉽게 반응하도록 만든다. 이해하고, 안타까워하고, 때로는 함께 울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쉬움 때문에, 어떤 감정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반대로 가장 아픈 문장은 이상할 만큼 건조하다. 감정을 크게 밀어 올리지도 않고, 지금 당장 슬퍼하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장면을 낮은 목소리로 놓아둘 뿐인데, 바카라을 덮은 뒤에야 뒤늦게 안에서 꿈틀거리는 감정이 번져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남들의 고백을
찾아다니면서도,
왜 가끔은
과잉된 감정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걸까?
요즘은 남의 상처마저 콘텐츠로 소비한다. 그들의 슬픔마저 찾아 읽게 된다.
또, 동시에 가끔은 그 과잉된 감정에서 피로를 느낀다. 그들의 글은 너무 뜨겁다.
우리가 가끔은 누군가의 아픔조차 무덤덤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아마도 너무 많은 문장들이 그들의 감정을 전달하려고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의 문장은 친절하다. 슬펐다고 말하고, 무너졌다고 말하고, 참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친절한 만큼 내가 느껴야 할 감정의 자리는 이미 정해져 있기 마련이다.
여기서 울어야 하고, 이쯤에서 공감해야 하고, 지금쯤 마음이 아파야 한다.
이런 식으로 감정의 경로를 미리 깔아 두는 서사들은 피로하다.
감정에 친절한 글은 자신의 보여주는 표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독자의 감정을 해설하는 데 더 가깝게 동작한다. 같은 맥락에서 봤을 때 아니 에르노의 『남자의 자리』는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작품이다.
작품 초반에 에르노는 아버지의 죽음을 다루면서도 익숙하게 기대하는 감정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계단 위쪽에서 어머니가 보였다. 그녀는 점심 식사 후에 방으로 가지고 올라간 듯한 냅킨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녀는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 끝났다.》 그 후 몇 분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 뒤로 멀리 무언가를 응시하던 아버지의 눈과 잇몸 위로 말려 올라간 그의 입술만이 떠오를 뿐이다. 어머니께 아버
지의 눈을 감겨드리라고 말했던 것 같다. 이모와 이모부도 침대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들은 시신이 굳기 전에 서둘러야 하니 아버지의 몸을 닦고, 면도하는 것을 도와주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3년 전, 내 결혼식에 입었던 양복을 아버지에게 다시 입힐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모든 장면이 매우 덤덤하게 흘러갔다. 비명도, 오열도
없이. 다만 어머니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입을 비죽거렸을 뿐이다. 모든 행동은 혼란 없이 행해졌다. 차분하게 일상적인 말들을 주고받으며.
『남자의 자리』 중에서...
그녀는 시신을 닦고, 면도하고, 옷을 입히고, 장례를 준비하는 과정조차 '매우 덤덤하게' 흘러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흐름에는 비명이나 오열도 없었다고 덧붙인다.
아버지의 임종,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지는 과정을 간결하고 건조하게 표현한 이유는 감정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감정이 너무 커서, 그것을 직접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체는 작품 전체에 고루 퍼져 있다. 그녀만이 보여주는 건조한 톤은 차가움과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녀의 평평한 글쓰기(écriture plate)는 감정을 감추거나 지우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 감정의 해설을 걷어내는 기술이라고 해석한다.
그녀는 슬픔을 슬픔이라고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슬픔이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아 있는지를 보여준다. 누군가가 울었다고 쓰는 대신, 눈을 훔친 냅킨, 입혀 줄 양복, 장례 준비의 순서, 방 안에 남기 시작한 냄새로 대체하는 식이다. 그리고 에르노의 문장은 바로 그 지점에서 힘을 얻는다.
고백은
감정을 설명하는
일이 아니라,
감정이 생기게 만드는 문장을
놓는 일이다.
자기서사를 읽을 때 우리는 자꾸만 진심을 묻는다. 얼마나 솔직한지, 어디까지 숨기지 않았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실제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진심이라는 추상적인 말보다 훨씬 구체적인 차원에 있는 경우가 많다. 문장의 온도, 시선의 거리, 사물의 정확한 묘사처럼.
몇 번을 얘기하지만 오토픽션이 흥미로운 이유는 자기 경험을 쓴다고 해서 곧바로 강한 감정이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어떤 기억을 어떤 톤으로 놓는가에 따라, 같은 사건도 전혀 다른 무게를 갖게 된다.
『남자의 자리』 중간에서 에르노는 한때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려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곧 거부감이 찾아왔다고 털어놓는다. 그러고는 마침내 '소설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녀가 내놓은 이유도 분명했다. '물질적 필요에 굴복하는 삶'을 설명하려면 흥미진진한 것이나 감동적인 것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에르노는 아버지의 말과 제스처, 취향, 삶에 영향을 준 사건들처럼, 한 존재의 객관적인 표적들을 모아 단조로운 글로 만들어 냈다. 이것이 그녀에게 생각하는 가장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에르노는 평소 자신의 문체를 평평하다고 표현했다. 여기서 말하는 평평하다는 의미는 중립성과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감정의 절제하고 사실 중심적인 글쓰기를 뜻했다.
다시 말해, 수사적으로 풍부하고, 서정적으로 고양된, 일명 전통적인 의미에서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글쓰기와는 거리가 있다는 의미였다. 이런 표현 방식은 너무 쉽게 대상을 문학적으로 승화시키고, 사람들의 감정을 작가의 의도대로 유도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에는 아버지의 삶 위에 작가, 즉 자신의 미학을 덧칠하게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언어란
무엇일까?
그녀는 부르주아적인 세련된 문체로 노동자 계급 출신인 부모님의 삶을 묘사하는 것이 일종의 배신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그녀가 고른 언어는 계층 이동을 겪은 딸이 부모에게 소식을 전하던 실제적이고 절제된 언어였다.
다시 말해 아버지를 쓰는 데 가장 적절한 말은 그를 해석하거나 미화하는 말이 아니라, 그와 연결되어 있던 생활의 자리에서 나온 말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가장 단순하고 투명한 언어가 있는 그대로의 진실에 가깝다고 판단한 것이다.
건조하고, 꾸밈없고, 투명한 언어를 사용할 때 가장 중요한 부분은 관찰자의 시선을 유지하는 것이다.
쉽게 생각해도 있는 그대로의 아버지에 대한 글에 감정적으로 울부짖거나 그리워하는 식의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에르노는 감정을 경계했다. 자신이 보았던 것을 다시 배치하고, 들었던 말을 가능한 한 다른 말로 바꾸지 않고, 손짓과 습관과 사물의 배열을 그대로 나타내는 방식으로 한 사람의 세계를 드러내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화자의 시선이 감정에 압도되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거리가 있어야 텍스트를 읽는 독자가 그 안으로 들어갈 공간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 언급했던 감정적인 글로 돌아가보자. 어떤 작품 속 화자가 너무 많이 너무 많이 울고, 너무 많이 힘들어한다면, 그 글을 읽는 우리는 오히려 텍스트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다. 같이 슬퍼할 수는 있지만, 결국에는 누군가의 슬픔을 바라보는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한 발 물러서서 장면을 보여주면, 그 빈자리에 텍스트를 읽는 이의 감정을 앉혀 놓을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진다.
차양을 통과한 햇살이 장판 위로 들어오고, 방 안의 공기가 달라지고, 냄새가 나기 시작한 월요일. 이런 디테일은 얼핏 보면 아버지의 죽음과는 무관하고, 서사적으로 중요하지 않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작은 디테일은 사건을 설명하지 않았지만 죽음이라는 사건 뒤에 놓였을 때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고백이라면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 직접적이고 장황한 설명보다 사물을 정확히 놓아두는 편이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냅킨, 양복, 화병, 냄새, 지폐 뭉치, 의자 위에 남은 옷, 그리고 장판 위에 스며든 햇살처럼.
사망을 확인해 준 당직 의사에 대한 기억은 없다. 몇 시간 만에 아버지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변해 있었다. 오후가 끝날 무렵 방에 혼자 남겨졌다. 차양을 통과한 햇살이 장판 위로 슬며시 들어왔다. 그것은 더 이상 내 아버지가 아니었다. 퀭한 얼굴에 코만 보였다. 흐물흐물한 파란색 양복에 감싸인 그가 마치 누워 있는 한 마리의 새처럼 보였다. 눈을 커다랗게 부릅뜬 남자의 얼굴은 그가 숨을 거두자마자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 다시 그 얼굴조차도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남자의 자리』 중에서...
※ 인용은 1984Books 에서 출판된 번역본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