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자와 작가 사이의 틈에 대해서...
2023년 10월 3일,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쉰세 번째 되는 날, 앵발리드(Invalides) 명예의 정원에서 국가 추모식이 열렸다.
깃발, 제복, 견장, 그리고 훈장들.
공화국 근위대 오케스트라가 교향곡 주피터의 아다지오를 연주했고, 러시아적인 색채를 더하기 위해 차이콥스키의 세레나데가 이어졌다. 우리 이백여 명은 붉은 차단 줄로 구획된 흰 플라스틱 의자들 안에서, 광활한 포석 안뜰 한쪽 끝에 앉아 기다렸다. 가족, 가족의 지인들, 아카데미 회원들, 장관들, 육해공 삼군의 대표들, 그리고 레 코르 콩스티튀에(Les corps constitués, 프랑스 법으로 인정하고 있는 국가 핵심 기관을 의미함)의 최고 기관들을 대표하는 이들이었다.
한 시간 동안 햇살은 기분 좋은 따스함으로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그렇지만 태양이 지붕 너머로 사라지자 갑자기 무척 쌀쌀해졌다. 더 따뜻하게 입고 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아버지는 휠체어에 앉아 무릎 담요를 두르고 있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것들을 그가 정확히 어디까지 이해하는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어떤 순간에는 자신이 홀아비가 되었다는 사실을 잊은 듯 보였다. 하지만 어떤 순간에는 홀아비가 되었다는 사실이 다시 떠올랐는지 아버지는 소리 없이 울다가 다시 어머니의 부재 속으로 돌아갔다. 그날 오후는 아버지에게 길고 긴 명료함을 강요하는 시간이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오랫동안 프로토콜에, 의례적 엄숙함에, 대통령 귀빈석에서 바라보던 7월 14일 열병식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그리 낯선 자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인사를 건네러 오는 사람들에게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러나 다정하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북소리가 울렸다. 열두 명의 공화국 근위병으로 구성된 분열대가 왼쪽에서 입장했다. 앞의 두 명이 실물의 두 배 크기로 인화된 고인의 사진을 들고 있었다. 아카데미 복장을 한 어머니의 사진이었다.
엠마뉴엘 카레르(Emmanuel Carrère)의 『콜호즈(Kolkhoze)』의 시작...
프랑스와는 다르게 우리에게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이라는 수식어가 더 익숙하다. 자기서사라고 하면 대부분 에세이나 산문집을 떠올리는 정도이다. 어쨌든 이런, 진짜 있었던 일 혹은 누군가의 경험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순간 우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결국 '누군가의 이야기 아닌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특히 자기서사에서 '나'로 시작되는 수많은 문장들은 텍스트를 읽는 이로 하여금 즉각적인 친밀감을 느끼게 만들어준다. 삼인칭보다 가깝고, 설명보다 고백처럼 들릴 때도 많이 있다.
문학 작품이 아니라 누군가의 실제 인생을 들여다보는 일, 바로 그 지점에서 오토픽션, 즉 자기서사 문학은 가장 흥미로워진다.
쓰는 사람도 그렇고 자기서사를 읽는 사람도 글 속의 '나'는 현실의 작가이지만, 결코 완전히 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작가는 자기 경험을 그대로 옮기지 않는다. 선택하고, 생략하고, 강조하고, 순서를 바꾸고, 때로는 자신에게 불리한 장면조차 의도적으로 배치한다.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나'는 더 이상 생의 원본이 아니라, 텍스트 안에서 기능하는 하나의 인물이 된다.
1인칭이 곧 진실이 아니라, 1인칭 역시 하나의 서술 방식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문학에서 '나'는 언제나 만들어진다. 아주 조금만 다듬어도 이미 편집된 존재가 되고, 아무 설명 없이 침묵하는 부분이 생겨도 역시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인물이 된다. 텍스트가 보여주는 것은 작가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에게 내보낸 목소리인 것이다.
그 목소리를 흔히 페르소나(Persona)라고 부른다.
어렵게 들릴 수 있지만, 쉽게 작품 속의 캐릭터 혹은 등장인물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 깊이 들어가면 가면 혹은 외적 인격 같이 분석할 수 있지만 굳이 복잡한 이론까지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페르소나는 글 속에서 작가가 선택한 얼굴이다. 상처 입은 사람의 얼굴일 수도 있고, 냉정한 관찰자의 얼굴일 수도 있다. 가끔은 모든 것을 뒤늦게 이해하는 사람의 얼굴을 할 때도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얼굴이 결코 저절로 생겨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투도 선택이고, 거리감도 선택이며, 무엇을 기억하고 무엇을 흐리게 둘 것인지도 선택이다. 그 선택들의 총합이 바로 '나'라는 인물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서사에서 자기연출이 있다고 거짓된 말이라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어떤 진실은 연출된 형식을 통해서만 드러나기도 한다. 마치 출근 후 자아와 퇴근 후 자아가 다른 것처럼 우리는 일상에서조차 아무 가면 없이 자신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사실은 자기연출을 통해서만 전달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말할 때는 이미 말하는 방식이 생기고, 과거를 떠올릴 때는 이미 기억을 편집한다. 그리고 문학은 그 사실을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장르일 뿐이다.
덜 꾸며서 진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꾸미는지가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의미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조금 비틀어진 내'에 힘을 실어줄 수 있다.
작품 속에서 너무 투명한 화자는 매력이 없다. 너무 성실하게 모든 것을 설명하는 글은 오히려 종이처럼 평평하게 느껴지기 쉽다. 반대로 어딘가 계산된 듯하고, 어떤 대목에서는 주저하고, 어떤 순간에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확신이 없는 글이 이상하리만치 더 실제처럼 다가오는 경험을 하게 된다.
사람은 원래 자기 자신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인간의 말은 늘 부분적이고, 기억은 늘 뒤늦고, 해석은 늘 사후적이다.
에마뉘엘 카레르의 글이 자주 그런 인상을 남긴다.
그는 오래전부터 '나'를 전면에 내세우는 작가였지만, 그 '나'를 절대 투명한 고백의 주체로 두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자신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어디까지 말할 수 있고 어디서부터는 재구성일 수밖에 없는지를 서사의 핵심 장치로 삼아왔다.
최근작 『콜호즈』는 이런 특징이 특히 선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자신의 어머니의 삶을 따라가는 이 작품에서, 카레르는 실제 아카이브와 사적인 기억을 뒤섞으면서 진짜 같은 문장들을 남겼다.
이런 문장은
그녀가 창조했을까?
아니면 내가 나중에 덧댄 것일까?
나는 지금도 확신하지 못한다.
가족에 관한 기억을 쓰면서도, 그 기억이 얼마나 믿을 만한지 스스로 묻는다. 그리고 그 물음을 지우지 않고 텍스트 안에 그대로 남겨둔다.
흥미로운 부분은, 바로 그의 불완전함이 작품의 신뢰를 무너뜨리기보다 오히려 다른 종류의 신뢰를 만든다는 점이다.
그는 작품 속에서 모든 것을 아는 사람처럼 말하지 않는다. 자료를 뒤지고, 기억을 더듬고, 어떤 장면 앞에서는 망설이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자신이 어머니를 쓸 자격이 있는지조차 질문 속에 남겨둔다.
왜 그럴까?
완전히 믿을 수 없는 내 얘기가 오히려 더 진실하게 읽히는 이유는, 문학의 진실이 사실의 완벽한 복원과는 다른 층위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겪은 삶조차도 실체적인 진실에 다가갈 수 없다는 명제를 바탕으로 쓰인다. 작품에서 정확히 저 말이, 혹은 그 사건이, 그 행동이 실제로 일어났는지에만 집중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왜 지금 저 장면을 저 방식으로 떠올리고 있는가'에 더 집중한다.
실제로 진실은 때로 사건 자체보다, 사건을 말하는 방식에 더 많이 남는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불신뢰 화자(narrateur non fiable)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불신뢰 화자는 스스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화자를 의미한다. 어떤 기억을 과장하고, 어떤 사실은 얼버무리고, 자기감정을 뒤늦게야 알아차리고,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설명하려 하지만 끝내 그 의도가 다 가려지지 않는 작품 속 화자를 의미한다.
이런 화자는 독자를 피곤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더 깊이 끌어들이기도 한다. 말해진 내용만 읽는 것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의 틈을 읽게 되기 때문이다.
자기서사에서 이러한 불완전함은 틈은 특히 중요하다. 완벽하지 않은 모습에서 리얼리티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작가와 작품 속 화자가 완벽하게 일치해야 더 진실한 글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둘이 완전히 겹치지 않았을 때 훨씬 더 풍부한 작품이 만들어진다.
작가가 자기 자신을 하나의 인물처럼 다룰 때, 작품 속 '나'는 단순한 증언자가 아니라 관찰의 대상이 된다. 그 순간 텍스트는 고백에서 분석으로 넘어가게 되고, 나는 이런 사람이었다는 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나는 왜 이런 방식으로 말할 수밖에 없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 속 '나'는 언제나 두 층위가 함께 존재한다.
말하는 사람인 동시에 관찰당하는 사람이고, 경험하는 인물인 동시에 뒤늦게 해석하는 인물인 것이다.
이 두 층이 완전히 포개지지 않을 때, 텍스트에는 미세한 흔들림이 생기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흔들림이 독자로 하여금 이 목소리를 더 실제처럼 느끼게 만든다.
자기 삶의 주인공이면서도,
동시에 자기 삶을 끝내
다 알아차리지 못하는 존재
아니 에르노가 차갑고 평평한 문체를 통해 개인의 경험을 집단의 역사로 바꾸어 놓았다면, 카레르는 조금 더 흔들리고 조금 더 노출된 목소리로 자기 삶을 서사의 실험실에 올려놓는다.
방식은 다르지만 둘 다 같은 사실을 보여준다.
'나'를 있는 그대로 가져오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바로 그 불가능을 의식하는 순간 문학은 더 강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기서사의 진실은 사실 일치에 있지 않다.
이야기가 사실인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성의 정직함이다.
최소한 프랑스에서는 자신을 얼마나 정확히 재현했느냐보다, 자신을 어떤 거리에서 바라보고 어떤 방식으로 배열했느냐가 더 중요하게 읽힌다. 어떤 장면을 남기고, 어떤 장면을 지우고, 어디서 멈칫하고, 어디서 단정하는지, 그 선택들이야말로 텍스트의 윤리이자 미학이라고 정의한다.
결국 독자가 자기서사에서 읽는 것은 작가의 맨얼굴이 아니다.
독자가 읽는 것은 맨얼굴을 보여주려 하면서도 끝내 하나의 얼굴을 만들 수밖에 없는 인간의 방식이다. 조금 비틀어진 '나', 연출된 '나', 완전히 믿을 수 없는 '나'가 더 진실하게 읽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삶은 원본으로 오지 않는다. 언제나 구성된 형태로 온다.
그리고 좋은 자기서사는 그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