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에세이에 생기가 없는 이유

자기서사를 더 진짜처럼 만드는 네 가지 장치, 시점,생략,반복,톤

무엇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이들을 위해 가장 많이 인용되는 문장 중에 하나


나 자신이
바로
바카라의 소재이다


몽테뉴의 『수상록』 서문에 등장하는 이 문장은 '가장 좋은 글감은 작가 자기 자신'이라는 말로 해석되어 퍼져나갔다.


몽테뉴는 이 문장에 자기 자신의 생각과 경험, 흔들림과 모순까지도 글의 주제로 녹여냈다는 뜻을 담았다. 그리고 수상록, 에세이는 자기서사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 되었다.


자기서사는 글을 쓰는 사람과 작품 속 이야기의 주인공이 동일 인물인 작품을 의미한다. 에세이, 산문집을 포함해서, 자서전, 회고록, 오토픽션, 르포르타주 등 다양한 장르에서 '나'를 주인공으로 글을 쓴다.


자기서사라고 명명할 때는 글에 등장하는 '나'는 글을 쓴 실제 인물이자, 텍스트는 실제 경험을 기반으로 한다는 암묵적인 규칙을 내포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서사는 픽션과 다른 방식으로 읽힌다.


자기서사는 일기와는 다르다. 산문집이나 에세이를 써본 사람이라면 쉽게 이해하겠지만, 글에 진실성을 담기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론적으로 봐도 픽션보다 훨씬 더 복잡한 문제가 되기도 하는데, 글감의 진위와는 무관하세 서술의 방식에서 판가름 난다고 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진짜일까?


작가가 직접 겪었지만, 진짜 같지 않은 인상을 풍기는 순간 글은 공감할 수 없는 글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경험을 진짜 있었던 사건처럼 전달하는 것이 글의 승패를 좌우한다.


문학에서 진실 효과(effet de réel)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텍스트가 현실을 묘사한다고 느끼게 만드는 효과를 의미한다.


프랑스 문학 이론가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1968년 동명의 에세이 『진실 효과(L'effet de réel)』에서 처음 소개한 이 개념은 지금 읽고 있는 텍스트가 독자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현실에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인상을 주게 만들어내는 장치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 핵심에는 무엇을 더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것을 빼라고 설명한다. 줄거리 기능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 쓸모없는 디테일이 오히려 텍스트를 현실성 해친다고 설명한다.


자기서사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은 정보를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이다.


어떤 정보를 생략하고, 또 어떤 정보를 선택해서 어떻게 표현하는지가 독자로 하여금 텍스트가 진짜처럼 느끼게 만든다고 덧붙인다.


일반적으로 초점화(focalisation)라고 부르는 개념으로 글의 스타일을 결정한다. 누구의 시선으로, 어디까지, 어떤 방식으로 표현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익숙하게는 1인칭 시점, 2인칭 시점, 혹은 전지적 작가 시점 같은 방식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제라르 주네트


제라르 주네트가 정의하는
화자의 시점

화자 (Narrator)
→ 사건 바깥에 위치한 화자 (Outside the Action)
  → 전지적 화자 (Omniscient)
    → 논평적 (Editorial)
    → 중립적 (Neutral)

→ 사건 내부에 포함된 화자 (Part of the Action)
  → 인물 화자 (Character)
    → 고정 시점 (Fixed)
      → 주인공으로서의 ‘나’ (I as Protagonist)
      → 목격자로서의 ‘나’ (I as Witness)
    → 비고정 시점 (Non-Fixed)
      → 다중 시점 (Multiple)
      → 가변 시점 (Variable)
  → 작가-관찰자 (Author-observer)



프랑스 서사학자 제라르 주네트(Gérard Genette)는 초점화를 무제한 초점화, 내적 초점화, 그리고 외적 초점화라는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화자가 이야기 속 인물보다 많은 정보를 갖고 있을 경우에는 '무제한 초점화',

인물과 동일한 정보만 갖는 경우에는 '내적 초점화',

인물의 내면을 모르는 경우에는 '외적 초점화'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자기서사는 1인칭의 내적 초점화를 주로 사용한다.


일반적으로 내 이야기를 쓸 때 1인칭 내적 초점화 글이면 진실성이 자연스럽게 보장될 거라 착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1인칭 내적 초점화는 텍스트를 읽는 독자를 글 안으로 가까이 데려올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그 자체로 진실성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지나치게 개인적인 시선만 고집하면 글은 쉽게 자기 합리화로 흐르거나, 감정을 과잉 설명하는 독백이 되거나, 타인의 내면까지 단정하는 불신의 서사가 되어버리기 쉽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디디에 에리봉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는 자신의 삶을 직접 서술하지만 이러한 오류에 빠지지 않은 괜찮은 예이다.


자기 자신의 경험을 바라보는 시선의 거리를 유지하고, 설명하지 않는 공백을 만들고, 되풀이되어 돌아오는 감정으로, 차분하게 유지되는 톤으로 텍스트에 진실성을 부과했다.


작품은 아버지의 죽음 이후 오랫동안 떠나 있었던 고향 랭스로 가게 되면서 시작된다. 긴 시간 동안 왕래가 없었던 관계, 에리봉은 자신의 과거를 되짚으며 그 이유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겉으로 보면 한 남자가 가족과의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는 회고록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그 실체는 어린 시절과 가족사,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배경, 그리고 파리로 떠난 뒤 느꼈던 수치심과 거리감을 현재의 시선으로 분석해 나간다.


작품의 중요한 구조적 특징은 두 개의 시점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하나는 과거를 실제로 살아낸 '체험자로서의 나'이고, 다른 하나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과거를 돌아보며 의미를 해석하는 '서술자로서의 나'이다.


그리고 이 둘은 확연히 다른 위치에서 같은 사건을 서술한다.


'어린 시절의 나'는 왜 집안 분위기가 답답했는지, 왜 학교와 문화의 세계가 낯설고 두려웠는지, 왜 자신의 출신을 숨기고 싶었는지를 명확하게 설명하지 못한다. 반면 '지금의 나'는 그 감정들을 계급, 교육, 문화 자본, 수치심 같은 언어로 다시 읽어낸다.


이 두 시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 중에 하나가, 아버지의 죽음 뒤 어머니와 함께 옛날 사진들을 보는 장면이다.


과거의 그는 사진 속 세계를 자신의 일상으로 지내온 시선에서 서술한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사진 속 몸짓, 옷차림, 표정, 집안의 분위기를 보면서 가족사진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삶이 새겨진 흔적을 읽어낸다.


같은 장면을 두고도, 체험자 자아는 '사건 안에 있었던 사람'의 시점에서, 그리고 서술자 자아는 '그 장면의 의미를 해석하는 사람'의 눈으로 자신을 서술한다.


바로 이러한 특징이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회고록을 넘어 자기 분석의 텍스트로 만든다.


모든 걸 말하지 않았지만
더 진실한 텍스트가 되는 이유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흔한 회고록처럼 결정적인 화해 장면이나 감정적 폭발이 중심에 놓여있지 않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미 벌어진 단절의 결과, 뒤늦게 마주한 사진들, 그리고 그 이후에야 비로소 떠오르는 질문들이 서사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온 메인 서사에 '왜?'라는 설명이 따라오지 않는다.


작품에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그리고 왜 떠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빠져 있다. 그의 행동에 어떠한 정당성도 부여되지 않는다.


에리봉은 가족과의 관계에서 생긴 균열을 과도하게 장면 화하지 않은 대신 그 자리를 질문으로 대신한다.


그가 하고 싶었던 일은 상처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에리봉은 자신이 왜 계급과 연결된 수치심을 오랫동안 말할 수 없었는지를 이해하고 싶었다.


그리고 충분한 설명이 필요 없는, 혹은 설명할 수 없는 사실은 질문의 형태로 남겨두었다. 아버지와의 관계를 깨끗하게 설명하지 않았고, 자신은 아버지에 대해 거의 모른다는 뉘앙스를 유지했다.


그는 아버지가 무엇을 생각했는지, 세상을 어떻게 보았는지,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느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채워야 하는 부분을 억지로 채우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느낀 감정조차 하나의 명확한 결론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반복되는 감정.
수치심.


처음에는 자기 안에 있는 수치심을 개인적인 상처처럼 묘사한다.


"파리에 정착한 뒤, 나는 나와는 다른 슬롯 계층 출신의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종종 그들에게 내 출신 계급을 거짓말로 둘러대거나 진실을 고백하며 마음속으로 불편함을 느낄 때마다, 내 출신 환경에 대한 수치, 슬롯적 수치를 경험했다. 그런데 나는 왜 바카라이나 논문에서 이 문제를 다뤄볼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을까?"

『랭스로 되돌아가다』 중에서...


작품 초반부에서 보이는 수치심은 계급의 개념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순간 몸에서 먼저 올라오는 불편함, 가족의 말투와 습관을 부끄러워했던 기억, 그리고 아버지라는 존재를 피해 멀리 달아나고 싶었던 개인적 상처로 그려진다.


에리봉은 그 사적인 상처를 충분히 오래 응시한 뒤에야, 그것이 사실은 슬롯적 수치심이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글이 계속되면서 가족, 교육, 계급, 그리고 성정체성에 대한 문제와 엮여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시선의 전환은 대체로 '나는 왜 이 수치심을 오래 말하지 못했을까?' 하는 질문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가족과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자신이 더 쉽게 말해 온 것은 동성애와 관련된 수치심이었고, 정작 더 오래 침묵해 온 것은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슬롯적 수치심이었다고 고백한다.


그렇게 작품은 끝까지 수치심이라는 감정을 반복해서 등장시킨다.


자기서사에서 반복은 의미를 조직하는 핵심적인 장치로 사용된다. 특히 프랑스 문학에서는 기억을 작품의 형식으로 표현하는 방식에 익숙하기 때문에, 기억이 그렇듯 한 번 지나가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같은 자리로 돌아오되 돌아올 때마다 조금 다른 의미를 새롭게 내포한다는 특징을 보여준다는 방식을 글의 구성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마지막은 텍스트의 톤이다. 무엇을 말하느냐만이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에서 진실성이 결정되는데, 에리봉의 텍스트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절제된 톤은 자기서사의 진실 효과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만약 에리봉이 가족과의 균열이나 계급 수치심을 지나치게 감적적인 어조로 밀어붙였다면, 그의 고통을 이해하는 대신 감정적 연출로 의식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그러나 작품이 '여기서 슬퍼해해야 하고, 이 부분에서 화가 나야 한다'라고 직접적으로 요구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텍스트에 힘을 실을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실제로 그의 담담한 톤은 구체적인 문장 전략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판단어보다 관찰어를 선호한다. '그것은 잔인했다'보다 '그 이후 나는 어떤 말투를 피하기 시작했다'로 표현했다. 작가의 판단은 텍스트를 읽는 독자가 직접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빼앗지만, 관찰은 해석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자리를 남겨두게 된다.


더불어 '모른다'는 문장을 전략적으로 배치하고 있는데, '나는 아직도 그 이유를 정확히 설명할 수 없다'와 같은 문장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보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하면서 텍스트를 더 솔직하게 읽힐 수 있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