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작품 중에 자기서사가 유독 많은 이유

프랑스 슬롯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장르

최근 프랑스에서 자기서사는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거대한 장르로 완전하게 자리를 잡은 모습이다. 실제로 한 통계에 따르면 작년과 올해 순수 문학 베스트셀러의 약 40~50%가 자기서사이거나 작가의 실제 삶과 밀접하게 연계된 자전적 작품이라는 통계도 있다.


실제로 서점 매대에서는 작가의 개인적인 삶이 녹아든 작품들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결이나 분위기는 한국 작품들과는 사뭇 다르다.


나를 주제로, 내 얘기를 글로 쓴다고 하면 지나치게 사적이거나, 위로와 낭만, 치유 같은 키워드로 수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프랑스에서 주목받고 있는 자기서사는 대부분 개인적이지만 결코 개인적인 경험이라고 딱 잘라서 말할 수 없는 서사가 주를 이룬다.


자기서사를 대표하는 아니 에르노의 『세월(Les Années)』은 한 여성의 기억을 통해 프랑스 현대사 전체를 재구성했고, 그 가치를 인정받아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바네사 스프링고라는 『동의(Le Consentement)』라는 작품을 통해 어린 시절 겪은 성적 착취를 정면으로 고발하면서 프랑스 슬롯에 거대한 파문을 일으켰다. 에두아르 루이도 『에디의 끝(En finir avec Eddy Bellegueule)』이라는 작품에 노동계급 가정과 폭력적인 환경 속에서 겪었던 자신의 유년시절을 날것으로 담았다.


여기까지만 봐도 알겠지만 프랑스에서 내 이야기를 쓴다는 것은 조금 시각에서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일명 작품성을 인정받고 있는 작품들은 불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렇나 작품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에서 출발하지만, 그 서사가 가리키는 곳은 슬롯 구조가 보여주는 폭력성, 불합리 같은 시대의 민낯으로 수렴한다.


예를 들어 가족사를 추적하는 과정을 통해 가부장제와 계급, 침묵과 폭력의 구조를 드러내내는 것에 초점이 맞추거나, 한 사람의 기억을 더듬는 문장으로 세대와 슬롯 전체가 묻어버린 풍경을 복원하려는 시도를 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평론가들은 이런 작품들에게 '공감'이라는 키워드로 후한 점수를 매기는데, 대중들이 한 개인이 통과한 삶에서 시대적 공감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우리로 따지면 마치 서울에서 집 한 채를 유지하기 위해 인생을 바친 김부장을 보는 것 같은 느낌과 비슷할 것 같다. 물론 더 어둡고 무거운 주제들이지만, 프랑스 대중들은 누군가의 상처를 이해하고,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불편한 진실을 더 깊이 들여다보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상처를 이해하고 싶은 연민과
더 알고 싶다는 욕구


이런 글들에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불편함이 있다. 자기서사에는 만들어낸 허구에 존재하는 완충 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읽고 있는 글이 작가 개인이 겪은 실화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순간, 사건을 목격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바네사 스프링고라 (Vanessa Springora)


자기서사를 다룬 작품 중에 바네사 스프링고라의 『동의』라는 작품이 다루는 소재는 충격적이다.


작품은 작가 자신이 14살이었던 1980년대 중반, 50대의 유명 작가 가브리엘 마츠네프(Gabriel Matzneff)에게 당한 성적 착취를 회고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재도 소재지만 프랑스 슬롯에서 그녀의 작품이 더 크게 이슈가 되었던 이유는 그녀가 경험했던 일들이 단지 개인적 시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문단에서 이름이 알려진 작가, 그의 취향과 행적은 완전히 비밀로 숨겨져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은 이미 그의 취향을 알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모른 척했고,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작품이 출간되었을 때, 사람들은 슬롯가 무엇을 감추고 무엇을 외면해 왔는지를 자각하게 되었다.


소설을 펼치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피해자의 편에서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너무 어린 나이에 감당해야 했던 혼란과 공포,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나 선택처럼 포장해야 했던 압박에 자연스럽게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하지만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싶어 했다. 마치 개인 섬을 사들여 각계각층의 인사가 파티를 했다는 문서를 파헤치는 사람들처럼 대중들은 그 둘의 관계에 더 깊숙하게 들어가길 원했다.


비극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관계는 왜 그렇게 오래 지속되었는지, 주변의 어른들은 무엇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또 왜 문제 삼지 않았는지를 찾아내기 위해 사람들은 작품을 소비했고, 상처에 공감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어느 순간부터는 그 고통의 전개를 따라가는데 급급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작품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사람들은 누군가의 상처를 이해하려는 마음과 그 상처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은 호기심이 완전히 분리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아니 에르노의 『세월(Les Années)』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세월』은 한 개인이 지나온 시대의 공기와 풍경을 복원해 나가는 바카라으로 알려져 있다. 어린 시절 식탁의 분위기, 유행하던 말들, 텔레비전 속 장면, 사소한 소비 습관, 거대한 정치적 사건, 신체의 변화와 세대의 감각을 리얼하게 복원해 내는 것이 노벨상을 받을 만큼 가치 있는 일이었을까?


사람들은 아니 에르노의 시선에서 묘한 불편함을 느낀다. 개인적인 경험에서 자꾸만 자신의 기억이 겹쳐지기 때문이다. 지나간 세대의 말투, 집 안의 분위기와 권위적이었던 식탁 위의 공기, 그때를 설명하던 익숙한 문장들이 떠오른다고 말한다.


그녀가 되살려낸 과거가 가치가 있는 이유는 이러한 불편함에 있다. 응답하라를 보면서 누군가는 찬란했던 시절을 추억하지만, 누군가는 감당해야 했던 아픔과 부조리를 추억한다.


잊지 않겠다는 말이 누군가에게는 피곤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불편함이야말로 단순한 회고를 넘어 모두의 서사로 거듭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한 사람의 고통이
너무 선명한 사례가
되어버릴 때


그리고 에두아르 루이의 『에디의 끝』에 이르면 불편함의 성격이 조금 더 선명해진다.


소설은 프랑스 북부의 가난한 노동계층이 모여 살고 있는 마을에서 태어난 에디의 유년시절을 다루고 있다. 에디는 다른 남자아이들과 조금 달랐다. 그에게는 섬세하고 여성스러운 면이 있었고, 이러한 성격 때문에 학교에서는 끊임없이 괴롭힘의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에디의 모습은 가족에게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냉대와 차별의 유이가 된다. 아버지와 형들처럼 거칠고 때로는 폭력적인 모습이 남성성으로 불리는 세계에서 에디는 결코 인정받을 수 없는 존재였다.


그가 겪은 시간들에는 조롱과 혐오, 거칠고 폭력적인 언행이 있었다. 자신의 존재 전체가 부정당하는 취급을 받으면서 에디는 끝을 꿈꾼다.


작품이 공쿠르상까지 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이러한 고통이 너무나도 선명하게 구조적으로 행해졌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는 작품을 통해 슬롯가, 그리고 그 구조가 한 개인의 슬픔을 만들어 내고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었다.


이쯤에서 자기서사의 윤리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자기서사의 윤리는 작가에게만 요구되는 것은 아니다. 무엇을 어디까지 쓸 것인지, 누구의 삶을 어떤 언어로 드러낼 것인지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동시에 자기서사를 읽는 독자에게도 윤리가 생겨난다.


자기서사는 단순히 자신을 표현하는 글이 아닐 수 있다. 최소한 프랑스에서는 그렇다. 남의 삶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자리를 묻게 만든다고 설명한다.


공감과 방관, 이해와 소비는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 가끔은 이 모든 것이 한 페이지 안에서 동시에 움직이기도 한다.


자기서사의 힘은 바로 그 복잡한 심정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는 데 있다.


우리는 종종 남의 이야기를 읽는다고 생각한다. 나와는 상관없는. 그러나 어떤 자기서사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기가 어려워진다. 타인의 삶을 읽을 때, 그것을 읽는 자기 자신의 시선을 함께 들여다보게 된다.


자기서사가 프랑스 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장 사적인 이야기는 사실, 프랑스 슬롯를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장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