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과 계급, 자기서사의 윤리
대부분의 감정은 개인의 몫이지만 우리가 일반적으로 느끼는 수치심은 슬롯의 영역에 속한 감정이다.
사람들은 내 실수로, 내가 부족하기, 혹은 내 잘못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타인의 시선이 내 안으로 들어와 굳어진 감정이라는 것을 먼저 명확하게 밝힌다.
수치심은 누군가의 내면에서 스스로 자라나지 않는다. 내가 속한 세계와 다른 세계가 충돌하는 경계지점에서 발생한다.
주로 계급, 젠더, 지역, 언어 같은 슬롯적 조건에 의해 반응한다. 극단이 존재하긴 하지만, 대부분 이정도 범위에서 다루어진다.
2024년에 메디치상을 수상했지만 국내에 소개가 되지 않은 작품 중에 『잉글랜드의 안(Ann d'Angleterre)』이라는 소설이 있다. 이 작품에서는 수치심이 어디서 태어나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존재한다.
안은
갈색 교복을 입어서
자랑스러웠고,
올리비아가 떠준
스웨터를 입어서
창피했다.
학창 시절 안은 갈색 교복 입는 걸 좋아했다. 교복을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교복 위에 어머니 올리비아가 직접 짜준 스웨터를 입기는 죽기보다 싫었다.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같이 입었지만 하나는 자부심을, 또 다른 하나는 수치심을 불러일으켰다.
그 이유는 옷, 그 자체의 문제가 아니었다. 옷이 속한 세계가 문제였다.
교복은 안에게 제도권 교육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규칙과 정규 교육 과정 속에 있다는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졌다. 반면 손으로 뜬 스웨터는 출신 계급과 가난한 가정 형편을 상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수치심은 자신의 몸에 걸치고 있는 스웨터의 품질과 디자인, 혹은 새것인지 아니면 낡은 것인지와는 무관했다. 그 스웨터가 속한 세계를 바라보는 안의 시선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가끔은 그녀 자신이 스웨터의 자리를 대신하기도 했다.
작품에서 등장하는 가족은 영국 북동부 산업 도시에 살고 있는 노동자 출신이다. 아버지는 공장 기계공이었다. 안은 계급 상승을 꿈꾸면서 동시에 자신의 출신을 숨기고 싶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환경에서 생활했는지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한 가지 알아둘 점은 쉽게 이야기하는 아비투스는 단어 하나, 사소한 말투, 작은 습관에서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작은 행동에서부터 신경을 쓰는 경우가 많다.
내가 창피한 게 아니라,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들킬까 봐
창피한 거야
소설에서 수치심은 늘 타인의 시선과 함께 출현한다. 한 가지 독특한 점은 작품의 저자 줄리아 덱(Julia Deck)은 이러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신 옷에 새겨진 정체성, 말투로부터 알 수 있는 출신 지역, 그리고 습관이나 매너에서 느껴지는 계급의 분류표를 감추고 싶어 하는 안의 모습을 나열할 뿐이다.
수치심의 가장 잔인한 특징은 직업 말로 꺼냈을 때 더 부끄러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은 수치심을 보통 말로 풀어내지 못하고, 회피하고, 농담으로 덮고, 적당한 말로 덮어버린다.
그렇게 덮어버린다고 내 안의 수치심이 사라질까?
이 작품은 이제 나이가 들어버린 안이 뇌출혈로 신체 마비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시작한다. 그녀의 딸, 줄리아는 병원과 요양 시설을 오가면서 안을 간호하기로 결심한다.
줄리아는 안의 방을 둘러보던 중 그녀의 개인적인 자료들은 놀랍도록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래전에 구매한 문서 파쇄기를 구매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안은 오래된 영수증, 전기요금 고지서 같은 것들을 갈아 버리는 것을 좋아했다는 사실도.
그리고 줄리아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이미 고장나버린 기계가 안의 청소년 시절의 기록까지도 갉아먹어버린 것이었다.
안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기억, 어쩌면 수치스러워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지워버리려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중에는 줄리아의 이모 베티(Betty)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베티는 열세 살에 자신보다 훨씬 나이 많은 남자와 자전거를 타러 다니고는 했다. 하지만 열네 살이 되던 해에 베티는 임신을 했고 결국 낙태를 선택했다.
줄리아의 가족들은 이 이야기를 벽장 속 해골 중 하나라고 불렀다. 그리고는 침묵에 붙여졌다.
베티에 대한 과거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말할 수 없어서 지워졌고, 지워졌기 때문에 더 단단하게 굳어졌다.
줄리아는 이 침묵을 문장으로 옮기기로 결심한다.
감추고 싶었던 사실이 드러나는 순간 느껴지는 낯선 불편함과 이상한 안도감이 있다. 그저 불편했던 감정에 이름이 붙고, 해석 가능한 텍스트가 되고, 원인과 구조를 갖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위로를 받는다.
그럼에도 수치심을 정면으로 다룰 때에는 언제나 솔직함에 주의해야 한다. 작품에서도 그 경계선 위에 있는 경우도 자주 등장한다. 가장 용기 있는 부분 중에 하나는 줄리아가 안을 샤워시키면서 느꼈던 감정을 서술하는 장면이다.
안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로 병원에서 생활해야 했다. 신체 마비가 오는 바람에 입원 기간이 길어지고, 장기 입원을 해야만 했다. 줄리아는 병원에만 누워 있었던 안을 샤워시키기로 결심한다. 줄리아는 마비된 안의 팔에 방수 코트를 끼워 넣었고, 휠체어를 밀어 샤워실까지 데려갔다. 안은 싫다고 울부짖었지만 줄리아는 샤워를 빨리 끝내겠다고 말하면서 이렇게 자신의 속내를 이렇게 털어놓는다.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여기 있다는 것이,
어머니의 더러움이 너무 부끄러웠다.
줄리아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연민보다는 어머니의 더러움에 더 큰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그 고백은 사랑하는 게 죄가 아니라는 몹쓸 드라마 대사처럼 사람들을 불편하게 했다.
진정한 위로에는 늘 관음의 위험이 따른다. 정곡을 찔렀다, 정확하다, 통쾌하다, 사이다 조언이라고 말하지만 선을 넘고 넘지 않고는 순간에 결정된다.
우리는 왜 누군가의 수치심을 바라보면서, 해방감을 느끼게 되는 걸까? 어쩌면 동질감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나는 저 정도는 아니라는 안도감일 수도...
자기를 노출시키는 자기 서사가 유행할수록 수치심에 대한 질문은 중요해진다. 고백은 언제든 콘텐츠가 될 수 있고, 상처는 언제든 흥미로 소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쩌면 누군가의 삶을 흥밋거리로 소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개인적인 아픔까지도 서사화해서 바라본다.
진정한 위로와 관음은 어디서 갈라질까?
수 없이 많은 에세이를 쓰이고, 또 소비되는 요즘 자기서사를 읽는 이들에게 던져봐야 할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