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서사, 오토픽션, 오토소시오바이오그래피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아니 에르노(Annie Ernaux)의 작품 중에 『저 불빛을 봐, 내 사랑(Regarde les lumières, mon amour)』라는 에세이가 있다.
이 작품은 2012년 11월부터 2013년 10월까지, 파리 근교 세르지(Cergy)의 트루아-퐁텐(Trois-Fontaines)이라는 쇼핑센터 안에 위치한 오샹(Auchan)이라는, 우리나라로 따지면 이마트 트레이드 같은 하이퍼마켓을 오가며 기록한 관찰 일지기 형식의 작품이다.
에르노는 이 거대한 소비 공간을 서로 다른 계층과 문화가 스치고, 감시와 규칙, 마케팅이 가장 노골적으로 작동하는 장소로 묘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가 어떻게 슬롯를 이루고 있는지 보여주었다.
그녀의 작품이 언제나 그랬듯이 개인적인 일상의 기록처럼 쓰여진 글에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슬롯적 풍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2월 18일 화요일 오후
쇼핑센터는 입구부터 인파로 북적였다.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뚫고 희미하게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 지붕 아래의 무빙워크를 타고 올라오면, 보석 목걸이처럼 장식된 화려한 조명들이 눈앞에 펼쳐졌다. 내 앞에는 유모차에 어린 딸을 태운 젊은 여성이 있었고, 그녀는 고개를 들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리고 아이에게 몸을 숙여 말했다. "저 불빛을 봐, 내 사랑"
오샹 백화점을 나서는 길에 나이 든 남자가 낡은 신발을 질질 끌면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등이 잔뜩 굽은 그는 지팡이에 의지해 비틀거리듯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그의 목덜미 밖에 보이지 않지만, 그의 손에는 낡은 장바구니가 들려있었고, 마치 낯선 땅의 위험을 무릅쓰고 먹이를 구해 돌아오는 사랑스러운 딱정벌레 같은 그의 모습이 나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 아니 에르노의 『저 불빛을 봐, 내 사랑』중에서...
그녀가 계산대를 지나 마트 밖으로 나오는 길에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지팡이를 짚고 걸어가는 등이 굽은 늙은 남자. 에르노는 그를 최대한 리얼하게 묘사했다.
이 짧은 관찰은 서로 다른 삶이 교차하는 가장 노골적인 장면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한 공간에서 누구는 환대받고, 또 다른 누구는 소외되었는지를 극명하게 대비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글에서 느껴지는 리얼함이란 사실을 많이 갖다 붙여서 생기는 것은 아니다. 목소리, 디테일, 그리고 적당한 거리감이 동시에 작동할 때 생기는, 이상할 만큼 단단한 현실감이 있다.
그리고 사람들, 최소한 프랑스 사람들은 요즘 잘 쓰여진 소설보다, 이런 기록 같은 글에 더 열광한다.
진짜가 아니라
진짜처럼 느껴져야 한다
우리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듣는다. 소설만이 아니다. 뉴스도 이야기이고, SNS에는 도파민을 자극하는 콘텐츠가 끊임없이 쏟아진다. 댓글창마저도 작은 서사들로 가득하다.
너무 많은 스토리 때문에 새로운 작품을 고를 때는 오히려 더 까다로운 기준을 요구하게 된다. 플롯이 촘촘한지, 완성도가 있는지, 현실적인지, 아니면 그런 것과 상관없이 재미라도 있는지부터 먼저 따져 묻는다.
한때는 허구가 주는 해방감에 열광하던 시절도 있었다. 현실에는 없는 영웅들이 존재하는 세계가 얼마나 리얼하게 구현되는가를 전 세계 사람들과 함께 기다리고는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그런 매끈한 허구 앞에서 피로감을 느낀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을 많이 본다. 그리고 그들의 관심은 점점 진짜 삶으로 옮겨가는 것을 느낀다.
누군가의 이야기, 누군가의 하루, 누군가의 목소리.
그리고 이제는 개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오토픽션(autofiction), 더 나아가 개인의 삶을 슬롯 구조로 해부하려는 오토소시오바이오그래피(autosociobiographie) 같은 흐름에 눈을 돌리고 있다.
자기 서사의 정점에 있는 작가 중에 가장 대표적인 한 사람이 아니 에르노이다. 그녀의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에 하나는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리얼함이 느껴지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녀의 글이 가지고 있는 목소리 때문이다.
그녀는 나 좀 봐 달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 얘기가 여기 있다는 식으로 말을 한다. 설명하려 들지 않고,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혹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얼마나 부당한 일이었는지를 증명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대신 이런 일도 있었다고 흔들리지 않는 톤으로 털어놓을 뿐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작은 디테일이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 쇼핑센터의 내부에 꾸며진 조명, 사람들로 가득한 입구의 분위기, 사람들의 동선, 사람들이 시선, 걷는 속도, 그리고 어디에서 더 오래 서 있고 어떤 곳은 그냥 지나치는지 보여준다.
이러한 작은 디테일들은 소설적 장치인 동시에 우리 일상 속 습관이 남긴 흔적이기도 하다. 이런 작은 습관들에 집중하는 순간 이야기는 현실이 된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자기 서사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관찰자로서의 거리감이 느껴진다. 어쩌면 이게 가장 어렵고, 가장 강력한 흡입력을 가진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거리감이 있는 글은 사람들의 눈을 붙잡되, 감정으로 몰아붙이지는 않는다. 이야기에 끌려가면서도 숨을 쉴 수 있는 틈은 항상 마련되어 있다.
에르노의 하이퍼마켓 장면은 하나의 사소한 마트 앞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멈추지 않는다. 마트 입구의 구조물, 분위기, 마트 안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풍경이 모여 그곳이 누구를 위한 공간인지 질문하게 만든다.
프랑스에서는 자기 서사를 더 이상 사적인 고백으로만 보지 않는다. 개인의 기록은 어느 순간부터 프랑스 슬롯가 가지고 있는 구조, 대부분의 경우 불합리의 기록에 집중하고 있다.
실제로 자기 서사가 최근 프랑스에서 다시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를 통과해 드러나는 슬롯가 들어있는 서사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마음속의 밤(La Nuit au cœur)』나 『콜호즈(Kolkhoze)』, 『심장(Cœur)』 같은 작품들도 다뤘지만, 이 외에 자기 서사를 모티브로 주목받은 작품들도 여럿 있다. 대부분은 계급, 교육, 젠더, 일부는 역사(가족사)에서부터 시작되는 작품들이다. 그리고 일부는 자신의 비극을 소재로 하기도 한다.
우리는
왜
남의 일상을
읽고 싶을까?
프랑스에서는 자신의 일상과 비교하거나 혹은 안심하기 위해서 다른 누군가의 삶을 읽는 일은 드물다. 오히려 그(녀)의 삶을 통해 자기 혼자만의 문제라고 믿어왔던 것들이 얼마나 집단적이고 구조적인 문제였는지 확인하려는 시도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동시에, 그 슬롯 속에서 내가 어디쯤에 서 있는지도 뒤늦게 가늠하게 된다. 비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름 붙이지 못했던 감각들을 언어로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흔히 에세이를 좋아한다는 이유가 단순히 취향의 차이는 아닐 수 있다. 에세이를 좋아한다면, 혹은 자기 서사를 쓰고 싶다면, 지금 당신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건 완벽한 플롯이 아니라,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문장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다음에서는 그 문장을 특히 강렬하게 표현할 수 있는 감정 중에 하나인 수치심을 다뤄볼 예정이다. 왜 어떤 고백은 불편한데도 끝까지 읽히는지, 그리고 그 불편함이 어떻게 슬롯를 보게 만드는지부터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