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걷는 백두대간
이른 새벽 내설악(內雪嶽)의 초입은
5월의 마지막날 답지 않게
짙은 어둠이 깔려있는 모습이었습니다.
십이선녀탕(十二仙女湯) 입구를 알리는 표지판을 지나
설악(雪嶽)의 깊은 정취를 느낄 무렵
이윽고 버스는 미시령옛길을 따라
미시령(彌矢嶺)에 도착했습니다.
백두대간(白頭大幹) 북설악 구간 산행의 시작,
모성(母性)의 내설악과 부성(父性)의 외설악.
그 경계인 설악(雪嶽) 주능선(主稜線)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깊은숨을 내쉬며
그날 저는 그렇게 설악(雪嶽)의 품에 안겼습니다.
때로는 어머니처럼 그리고 때로는 아버지처럼
내딛는 발걸음마다 격려와 용기를 주는
설악(雪嶽)의 주능선.
희미하게 고도를 낮춰가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어둡기만 한 주변을 헤치고 나니
저는 어느덧,
연속암봉의 너덜지대를 넘고 있었습니다.
세찬 바람에 중심조차 잡기 힘들었지만
백두대간을 품기 위해 위로 위로 발걸음을 옮기며,
때로는 암릉(巖陵)을 지나기도 했습니다.
이성부 詩人은,
정신의 먹이를 찾아 산에 오른다 했는데,
자유과 고독과 야성을 찾아가려는 詩人의 詩에서처럼
저 또한, 「내가 걷는 백두대간 」의 의미를
마음속으로 조용히 되새겨보았습니다.
하지만 걸어도 걸어도 수도 없이 나오는 너덜지대.
올라보면 까마득한 봉우리,
그리고 여명(黎明)이 밝아오는 하늘 한 조각.
저 멀리 보이는 영랑호와 청초호의 물길에서도
또 아련히 펼쳐지는 푸른 바다에서도
해돋이의 도시 속초(束草)까지 이어지는
설악(雪嶽)의 희망찬 기운이
투영(投影)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얼마동안을 올랐을까.
또 몇 차례의 너덜지대를 지나
드디어 황철봉(黃鐵峰)에 다다랐습니다.
새벽안개가 더욱 짙게 드리운 황철봉에서는
그제야 설악(雪嶽)의 아름다운 능선이
그 매혹적인 자태를 드러냈네요.
일찍부터 시작되는 山에서의 아침,
아침이 밝을 무렵 우리는 다시 너덜지대를 지나
저항령(低項嶺)을 넘고 있었습니다.
마등령(馬等領 혹은 麻等領)까지 이어지는 주능선
그리고 저 멀리 보이는 울산바위.
더욱 선명하게 다가오는 포근한 속초의 풍경,
그리고 바로 앞까지 쫓아온
설악의 꽃 공룡능선(恐龍稜線)
우리는 마등령에서 희운각(喜雲閣) 대피소까지의
공룡능선길만 다음 숙제로 남겨둔 채
오세암(五歲庵)과 백담사(百潭寺)를 지나
용대리(龍垈里)로 하산했습니다.
미시령에서 마등령까지
한계령에서 대청, 중청을 지나 희운각대피소까지
그 중간에 공룡능선이라는
설악의 거대능선(巨大稜線)이 빠지긴 했지만
그래도 미시령에서 한계령까지 이어지는 산줄기
그 아름다운 백두대간 길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수도 없이 오르내렸던
그 너덜지대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요.
그날 저는,
그 어느 때보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 같은
희열(喜悅)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그 이유는,
설악(雪嶽) 주능선을 종주(縱走)하며
비로소 설악(雪嶽)을 품었고,
또 설악(雪嶽) 주능선을 종주(縱走)하며
비로소 山을 알게 되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느 날 山이 나에게로 왔다는
이성부 詩人의 표현을 인용하면
그날 드디어 설악산(雪嶽山)이
저에게로 왔던 것 같습니다.
『Bonus, 山과 樂』
마등령 정상에서 먹었던
흰쌀밥과 멸치, 오이지, 북어조림, 무말랭이
그리고 홀짝홀짝 마셨던
소주 두 잔과 안주로 준비한 족발 등
우리는 도시락(樂)을 가져갔을 뿐이지만
설악산(雪嶽山)은 우리에게
도시락(樂) 이상의 낙(樂)을 주었습니다.
山에서 "먹는 즐거움"을
어찌 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덧붙임)
사실, 미시령 - 저항령 - 마등령 구간은
입산(入山) 금지구간(禁止區間)으로,
백두대간(白頭大幹) 북설악 구간 산행을
위해서는, 사전에 국립공원 관리소로부터
반드시 입산 허가(許可)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구간은 설악산 특유의
암봉미(巖巖美)를 만끽할 수 있는,
백두대간 전 구간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그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그래서 이 구간은 소위 "악마(惡魔)의 구간"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註)
「내가 걷는 백두대간」이라는 부제는
이성부 詩人의 詩集 『지리산』에 수록된
백두대간 연작시(連作詩)에서 그대로 가져왔기에,
山과 文學에 대해서 생각하게 해 주신 이성부 詩人께
참으로 고마운 마음을 표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사진 1)
이른 새벽 설악산 백두대간 산행 중 만난 일출(日出)
(사진 2)
백두대간(白頭大幹) 북설악 구간의 하이라이트,
무시무시한 그 너덜지대!
(참고)
이전 글에서 언급했던, 설악의 추억
그 여름 추억, 포근한 설악(雪嶽)
https://fishingproductfr.com/@freejazz/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