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의 해방감에 프라이빗 룸에서의 아늑함까지
아직은 무덥지 않고 청명(淸明)했던 초여름의 금요일 저녁, 퇴근 후 회사에서 가깝게 지내는 정인(情人)들과의 술자리가 강남역 근방에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편하게 느껴지는 사람들과의 모임이라서 그랬는지, 계획부터 종료 시까지의 모든 과정이 마치 "편안한 여행"과도 같았습니다. 모임을 계획할 때부터 무척이나 기대됐고, 일정을 공지할 때엔 기분 좋은 떨림이 있었으며, 술자리가 시작됐을 땐 그저 즐겁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귀가 후 그 자리를 돌아봤을 땐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행복했던 기억만 남아있었습니다.
좀 비싸면 어때, 이런 사람들과의 자리에는 기꺼이 지갑을 열리라, 뭐 이런 마인드로 참석 예정 인원들과의 사전 협의를 거쳐 비교적 고급진 고깃집을 예약했는데 결과적으론 만족도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고기의 양은 다소 아쉬웠지만 질은 상당히 좋았고, 특히 그날 첫 시작을 알렸던 한우 모둠구이는 제가 가져간 위스키(Whiskey)와도 아주 잘 어울렸습니다. 위스키는 다름 아닌 발렌타인(Ballantine's) 17년 산(産). 이런 술은 정인(情人)들과의 자리에서 특히 더 빛을 발하지요. 거기에 비싼 식당이라 그런지 콜키지(corkage)가 무료인 것은 덤이었습니다. 위스키는 줄곧 온 더락(On the rocks)으로 마셨지만, 첫 잔부터 마치 목이 불타 오르는 것 같은 아주 기분 좋은 느낌이었고요. 우리의 대화 또한 불판에 오른 고기처럼 노릇노릇하게 잘 익어갔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금요일 밤의 해방감에 프라이빗 룸(Private Room)이 주는 아늑함이 무척이나 좋았습니다. 그래서 그랬는지 5명이서 700ml 위스키 2병을 금세 해치웠네요. 물론, 그렇게 마시니 알딸딸하고 기분 좋은 취기(醉氣)가 좀 빨리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그럼 어떻습니까. 사람들도 술도 안주도 분위기도 모두 몹시 좋았거든요. 거기에 금요일 밤이라는 심리적인 안식처(安息處)까지. 돈은 이런 데에 써야 한다는 생각이 위스키 잔을 타고 제 마음속으로 확 들어오더군요. 안주(按酒)로는 한우 세트로 시작해서 그 식당의 시그니처 돈육 세트로 갈아탄 뒤 위스키에 곁들였는데요. 육류 주문은 아쉽게도 거기서 멈췄지만, 준비한 코스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린 장소를 옮기기 않은 채 주종(酒種)을 변경하여 시원한 소주를 시켰고, 안주로는 된장찌개를 주문한 뒤 밥을 말아 된장밥을 만들어서 바로 2차를 시작했습니다. 더 진솔하고 더 따뜻한 대화와 함께.
힘든 온라인 게임생활이지만, 회사에서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는 폭탄주를 연거푸 들이켜도 즐겁고 기분이 좋다는 걸 새삼스럽게 느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놓인 건 폭탄주가 아니라 나름 고급 위스키였으니, 어찌 즐겁지 아니했겠습니까. 게다가 이런 위로와 응원의 모임은 늘 제게 힘이 되지요. 그날 모인 멤버 중 한 명은 저와 아주 가까운 온라인 게임 후배였고, 또 한 명은 저의 오랜 협업 파트너이자 온라인 게임 동료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두 명은 이제 갓 결혼한 젊은 사내 커플이었는데요. 특히, 그 커플 중 한 명은 제가 늘 고마워하는, 작년까지 저와 같은 부서였던 女후배였지요. 그들은 이제 막 신혼 생활을 시작했는데 우리 같은 고연차(高年次)선배들을 위해 그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다니, 그들에게는 무척이나 고마울 따름이었습니다. 물론, 술자리에 겉으론 그들의 결혼 축하 모임이라는 타이틀을 달았지만, 우리가 그들을 축하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그들에게 위로를 받았던 자리였습니다. 젊은 직원들의 총기(聰氣) 있는 눈빛과 넘치는 에너지 덕분에, 그날 우린 왁자지껄 웃고 떠들고 반가워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네요.
사실, 남자들의 모임에는 상당히 묘한 이중성(二重性)도 있습니다. 겉으론 서로 웃으면서 대화를 나누지만, 속으로는 서로 견제하고 비교하고 때론 상대방을 무시하기도 하는 그런 측면도 간혹 있거든요. 물론, 여자들의 모임도 비슷한 측면이 있겠지만 남자들의 그것과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왜냐면, 남자들은 친한 사이일지라도 술이 들어가면 누가 더 잘났냐로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결국엔 알게 모르게 서열(序列)이라는 것이 생길 때도 있기 때문인데요. 그 평가의 잣대가 연봉일 수도 있고 학벌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누가 더 돈 많은 배우자를 만났는지, 아니면 누구의 아이들이 더 공부를 잘하는지 등등 여러 가지가 있겠죠. 그래서 우월의식(優越意識)을 갖고 있는 일부 남자들은 자신이 가진 강점을 은연중(隱然中)에 드러냅니다. 그러면서, 그런 것을 내세워 승패를 가리고자 하는 유치한 자(者)들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이게 참 쉽지 않죠. 술자리에서 편하고 부담 없는 대화가 오갈 것을 예상했는데, 난데없이 서열이 정해지거나, 혹은 질투가 생기거나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참 피곤해지죠. 저도 이제 나이를 적잖이 먹다 보니,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서열이 친구들 사이에서, 혹은 학교나 온라인 게임 동기들 사이에서 짙게 드러나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그래서 분위기가 그런 식으로 흘러갈 것 같으면 모임 자체를 나가지 않으려 이런저런 핑계를 대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온라인 게임에서 이렇게 마음이 맞는 정인(情人)들을 만나게 된 건 얼마나 큰 행운이었겠습니까. 그 자리에서만큼은 우린 서열도 질투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저는, 저보다도 그들이 잘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저는 조직 내에서 고전(苦戰)하더라도 다른 멤버들은 어떻게든 잘 나가야 한다는 그런 마음이 제 속엔 늘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순전히 이해관계가 동기가 되어 맺어진 온라인 게임 내의 수많은 관계에서 서로를 걱정하며 응원하는 이런 사람들을 만날 확률은? 아마도 지극히 낮은 수치가 아닐까요? 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온라인 게임 내 저의 상황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받고 싶어서, 저는 그렇게 앞장서서 "편안한 여행 같은 술자리"를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초여름의 푸른 기운이 가득했던, 그러나 아침저녁으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던 그날 강남역 주변의 느낌은 다른 때보다 유난히도 좋았습니다. 그날 밤, 우린 함께 술을 마시고 고민을 나누고 시간을 함께 보내고는 아쉽게 헤어져서 각자의 영역에서 주말을 보냈지요. 하지만 그날 제가 느꼈던 그 동료애(同僚愛)는 언제든 또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것은 결코 돌아오지 않을 제 온라인 게임생활 22년 차 초여름의 상큼한 기억일 테니까요.
(사진 1) 그날의 프라이빗 룸, 5인 좌석으로 세팅 완료
원래 6인 멤버였는데, 한 명이 개인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한 점은 살짝 아쉬웠습니다.
(사진 2) 그날의 촉매제(觸媒劑), 발렌타인 17년 산 위스키의 영롱한 모습
(참고 1) 대문 사진, "밤은 부드러워, 마셔" 도서 소개
제가 좋아하는 한은형 작가의 본격적인 술 에세이
'글이 된 술'을 함께 마셔 준 당신에게
(참고 2) 위스키 발렌타인 관련 칼럼 소개
걸작 위스키 발렌타인 17년 21년, 무엇을 마실 것인가 (매일경제 칼럼)
https://www.mk.co.kr/news/business/9233787
(참고 3) '발렌타인' 표기법
맞춤법 검사에서는 제가 쓴 '발렌타인'을 '밸런타인'으로 수정하라고 권고하네요. 하지만 어감상 그대로 두었습니다. 17년 산 정도의 등급은 그냥 '발렌타인'이라고 써야 제맛인 것 같았습니다.
(참고 4) '작가의 서랍' 속의 글
이 글은 모임 다음날인 6월 13일 토요일 낮에 초여름의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는 거실에서 썼던 글입니다. 아직 취기가 살짝 남은 몸을 리클라이너 기능이 있는 편안한 소파에 기댄 뒤 핸드폰을 열고 열심히 끄적여 봤는데요. 그걸 일주일 후인 오늘 살짝 다듬어 발행해 봅니다. 글을 '작가의 서랍' 속에 고이 넣어놨다가 일주일 만에 꺼내니 그날의 좋았던 기억이 다시금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참고 5) 날씨와 술
그런데, 그로부터 꼭 일주일이 지난 어제 오후 늦게부터 시작된 여름비가 토요일인 오늘까지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2026 북중미 월드컵 조별예선 첫 경기 승리 후의 맑고 쨍했던 지난 주말의 날씨와 월드컵 조별예선 두 번째 경기 패배 후의 흐리고 비 오는 이번 주말의 날씨가 우연히 대비되네요. 물론 날씨와 무관하게 날씨가 좋으면 좋다는 핑계로, 좋지 않으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술을 마셔댔겠지만, 그래도 싱그러운 초여름의 날씨를 만끽(滿喫)하며 기분 좋게 한 잔 했던 지난 주가 좋았습니다. 이제 어느덧 습(濕)한 무더위가 찾아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