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의 해방감

byfreejazz


가을날 한가했던 토요일 오후

대학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오랜만에 정기전(定期戰)의 분위기도 느껴볼 겸

둘이서 간단하게 맥주나 한 잔 하자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네, 그러시죠." 하고 바로 나간다 했죠.

약속 장소는 가을이면 늘 붉은 플래카드가

촘촘하게 걸려 있는 그곳, 안암동 로터리.


그런데, 장소가 또 그쪽이라

제가 주종(酒種) 선택에 고집을 부렸습니다.

그래서 결국 안암에서 길을 건너

제기시장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학창 시절 단골술집이었던 고모집에 가서

맥주 대신 막걸리를 마셨죠.

안주는 고추튀김과 두부김치.

계속되던 야근 탓에 몸은 축 처져있었지만

오랜만에 추억의 장소에 오니

막걸리가 술술 잘 넘어가더군요.

그러다 보니 둘만의 이야기가 제법 길어졌고

저도 모르게 많이 취했습니다.

그래도 마음의 고향 같은 동네에서

토요일 저녁의 해방감을 느끼게 되어

오랜만에 꽤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사실 다소 무겁고 슬픈 현실 속의 단면이

그날 주고받은 대화의 주(主)된 소재였습니다.

하지만 과거와 현재가 묘하게 공존(共存)하는

그곳 제기동에서는

막걸리 몇 잔에 취하는 사이

잠시 잊고 있었던 과거의 제가 되살아났습니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현실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도 오랜 세월의 풍파(風波)를 겪다 보니,

알게 모르게 참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대학생 때와 달라진 건 이루 나열할 수조차 없죠.

음... 대표적인 게 뭐가 있을까요.


일간지는,

"한겨레" 신문 대신

"한국경제"나 "매일경제" 신문을 읽는다는 것.


대중음악은,

김광석과 Bob Dylan 대신

I.O.I와 Taylor Swift를 듣는다는 것.


도서는,

기형도의 시집 대신

아무튼 시리즈 같은 에세이를 읽는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이념이나 의리 같은 추상적인 개념은 다 내던지고

부동산 시세 같은 현실세계의 숫자를 본다는 것.


뭐 이런 것들이겠네요.


하지만 대체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제기시장도 고모집도 막걸리도 안주거리도

모두 다 그대로였고

술에 취해 약해지는 제 모습조차

변함없이 그대로였거든요.


게다가 정기전의 시끌벅적한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소리치며 젊음의 열기(熱氣)를 뿜어내는

대학생들의 모습도 그대로였고요.

토요일 저녁의 해방감 역시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그대로였습니다.


집에 오는 늦은 밤,

하늘에 막 떠오른 하현달을 보며,

변하지 않고 그대로 있을 것 같은

옛 것들을 떠올렸습니다.

비록 다음날인 일요일과

임시공휴일로 지정된 월요일엔

회사 일에 파묻혀 이틀을 쏜살같이 보냈지만,

그래도 10월 첫 주의 연휴 첫날은

기분 좋은 해방감을 느끼며 시작했습니다.




(참고)

대문사진은 그날 늦은 오후에 집을 나서며

바라본 가을 하늘이 너무 예뻐서

제가 핸드폰으로 직접 찍은 사진입니다.




#. 가을날의 웃픈 기억 하나 추가


언젠가 男中, 男高, 高大는 지상 최고의 비극이라는

문구가 걸린 플래카드가 (아래 사진 참조)

제가 좋아하는 신촌에 걸린 적이 있었습니다.

가을의 정기전 행사는 항상 양교(兩校)가 번갈아가며

장소를 선정했기에, 가을엔 신촌에도 자주 갔었는데요.

사실, 신촌은 제가 항상 동경(憧憬)하던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잊을만하면 가끔 그 '지상 최고의 비극' 문구가

제 기억에서 소환된다는 게 다소 흠이라면 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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