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카레와 응급실 사천 가지볶음

#01 <불볕더위엔 이거지~>

by이티ET


우리 집 담장 옆에 있던 공터는 늘 동네 아이들의 놀이터였죠. 어둑해져 하나둘씩 집으로 불러들여 갈 때마다 우리 중 누구도 한 번에 집에 간 적은 없었죠. 우리가 단번에 흩어진 날은 엄마에게 잡혀 끌려 가거나, ‘밥 먹어.’라는 말 대신 ‘카레 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뿐이었던걸요.


뿌연 흙먼지를 일으키던 놀이터는 그제야 공터가 됐죠. 온몸이 땀에 젖어 머리부터

목구멍, 발가락 끝까지 먼지가 들러붙은 채로 씻는 걸 미루며 티브이 앞에 앉아 카레

라이스를 기다렸죠.



티브이에서 방영되는 마징가제트를 보며 먹는 카레의 맛은 정말 최고였어요. 약간 자극적

인 향과 칼칼한 맛, 감자의 녹진함, 먹음직스러운 노란 빛깔, 어린 나의 모든 감각을 깨우는 카레란. 뒤집어썼던 먼지를 씻겨주는 상쾌한 맛이랄까? 그 시절 나는 카레를담은 소스 보트만 봐도 동화 속 세계로 날아가는 것 같았어요.


게다가 당신이 톡톡 하고 첨가한 후추 덕에 목구멍이 따끔거릴 듯 내려가는 알싸한 카레는 맛도 환상적이었죠. 요즘은 매운맛, 약간 매운맛 카레가 생겨났어요. 어린 저에게 카레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후추 톡톡 첨가한 당신은 카레의 선구자였던 거죠.



요리를 배워볼까 여러 번 고민도 했는데 결국은 포기했어요. 시판되는 가정간편식

이 워낙 잘 나오기도 하고 전문가가 만든 소스나 양념이 다양하고 맛있게 잘 나와 있

어서예요. 시간이 절약되니 삶의 질이 높아진다고 변명을 해 봐요. 가끔은 근사한 상을 못 차리는 아쉬움도 있지만 전문적이지 않을 바엔 표준화된 맛도 나쁘지 않거든요.


오늘처럼 일은 산더미처럼 쌓이는데 진척은 없고 상사는 계속 눈치를 주고 바깥 날씨는 숨도 못 쉴 만큼 무더운 그런 날엔 카레라이스 생각이 간절해요. 낮에도 카레가 당겼지만 너무 더워서 바깥에 나가기가 싫었거든요. 대신 사무실에서 샐러드와 요구르트만 배달시켜 먹었어요. 슬슬 허기가 졌지만 온종일 꼬였던 업무를 처리해야 했어요. 꼬였던 일을 간신히 퇴근 시간 전에 마치고 부리나케 퇴근했어요.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몇 년간은 더 해야 해요. 아이들이 곧 대학을 가니까요. 그리고 엄마니까요.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미쳐버릴 만큼 푹푹 찌는 이 더위에 퇴근길 전철 타는 건 너무 고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눈 딱 감고 내릴 때까지만 견뎌야 할 듯요. 올해는 유난히 더위가 힘드네요. 다행히 사무실이 곧바로 지하로 연결된 지하철역과 통해 있는 걸 감사하며 심호흡을 한 번 해요. 벌써 길게 늘어선 대기줄에 서서 꿈이었으면 좋겠다 싶은 시간이에요. 악몽을 꾸었나 싶었는데 어느새 집이 보이니 또 마음이 놓여요.



현관문 비번을 빛의 속도로 누르고 집에 들어서니 한 여름 비닐하우스처럼 후끈하

네요. 소파 위에 있던 리모컨으로 에어컨부터 켰어요. 핸드폰으로 어떻게 조작하는 방법이 있다는데 이런 것까지 신경 쓰는 건 피곤한 일이에요.


빨리 겨울이 왔으면.


자칼인지 표범인지, 호피인지 모를 에코백을 소파에 아무렇게나 던지고 입은 옷 그대로 손부터 씻고 냉장고를 열어요. 다행히 휴일에 준비해 둔 가지랑, 감자, 양파, 당근이 있어요. 파, 마늘 다져놓은 통도 함께 모두 꺼내 조리대 위에 올려놓고 정수기에서 얼음과 냉수를 한 잔 쭉 들이켜니 이제 저녁 준비할 준비가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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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에 인간미 풍기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소설도 쓰고. 꽁트도 씁니다. 사람 냄새 나는 글로 글을 위한 글이 아닌 삶을 쓰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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