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은 내가 처방받은 유일한 진통제다. 오전 8시, TV 플러그마저 뽑아둔 텅 빈 거실을 한 번 더 훑어보고서야 현관문을 나선다. 냉장고 모터 소리조차 허용하지 않는 무균실 같은 고요. 그것만이 나를 안심시킨다. 브라운관이 터질 듯 울려 퍼지던 야구 중계 소리와 그 위로 쏟아지던 매캐한 술 냄새와 아버지의 고함. 그 요란한 난동이 어머니를 기어이 하얀 병실에 가둬버린 이후로 생긴 버릇이다.
빳빳하게 칼 주름이 잡힌 슬랙스와 먼지 한 톨 없는 검은 코트로 무장한 채 상봉역 인파 속으로 섞여 든다. 내 시선은 무심히 앞사람의 구겨진 셔츠 깃이나 뒷굽이 닳은 구두를 훑고 지나간다. 타인의 옷깃이라도 스칠세라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출구를 빠져나올 때였다. 골목 모퉁이에서 희뿌연 담배 연기가 훅, 끼쳐왔다.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구긴 채 담배를 입에 문 남자를 노려보았다. 불쾌한 연기가 투명한 아침 공기를 어지럽히는 꼴을 지켜보던 중, 그 속에 섞인 알코올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순간, 꼿꼿하게 세웠던 척추가 미세하게 굳어지며 숨이 얕아졌다. 칼같이 다려진 내 검은 코트 자락 안쪽에서, 식은땀을 쥔 여덟 살 아이의 작은 손이 사시나무처럼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코트 깃을 더 높이 세웠다.
오전 8시 40분. 1평 남짓한 수술 상담실의 유리문을 밀고 들어섰다. 바카라상 위 차트들은 멸균된 수술 기구처럼 오차 없이 배열된 채 모서리와 완벽한 직각을 이루고 있다. 컴퓨터 전원을 켜며 가습기 수조에 아로마 오일 한 방울을 떨어뜨린다. 투명한 물 위로 옅은 막이 번지며 짙은 아로마향이 좁은 방안을 서서히 채워가고 있다. 출근길 내내 코끝을 맴돌던 매캐한 담배 연기와 비릿한 길거리의 냄새들도 그 향기 속으로 완벽하게 지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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