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를 공부지 않았더라도 그림에 조그만 관심을 가지고 들여다보면 신문기사나 평론, 전시서문 등 많은 곳에서 인상주의 자연주의 하는 용어들을 접하게 된다. 그런 용어들은 대부분 특정 작가를 거론하던지 특정 그림을 이야기하는데 들어가는 부수적 설명에 필요한 하나의 자료적 흐름적 기술처럼 느껴진다.
하나의 작품을 설명하는데 이런 용어들이 오랫동안 사용되면서 정착되었기에 그것에 묶어보려는 시도는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굳이 수백 년 전의 역사적 흐름이나 과거의 것을 들춰서 지금의 작품을 설명하는 것은 무언가 어색하다. 일반 관람객에게는 너무 생소한 이론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특히 전시서문은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이해하고 생각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도라면 미술사적 흐름을 끌어 올 것이 아니라 작가의 작품 속에 드러나는 이야기나 분석적인 것을 현대적 관점에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더 의미 있을듯하다. 비교와 대비는 잘못하면 한쪽의 편중된 방향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미술사적 용어들은 대부분 작가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당대의 평론가나 언론 등에서 만든 것이 정착된 것이다. 그 용어가 일부는 작가를 비하하고 작품을 비웃는 용어로 사용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시의 시대적인 부분과. 평론가, 언론의 시각에서 바라본 고정관념의 결과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는 그런 비난과 조롱을 통해 작가가 더 좋은 작품을 만들고 후대에 인정받은 결과 이기도 할 것이다.
예술가의 새로운 시도와 출현은 환영이 아니라 왜 비난의 대상이 되었을까.
그것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생각의 한정성 때문일 것이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것의 경우 두려움과 불편함이 가져오는 반감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미 알고 있는 익숙한 것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한 반감이다. 또는 앞서가는 자에 대한 질투다. 그렇기에 어떤 객관적 평가가 아니라 당시 특정개인의 성향에 의해 비평과 비난의 대상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은 세상을 바꾸고 앞서가는 존재라고 하면서도 익숙함에 빠져있는 것을 거역하기는 힘든 것이다. 그 결과 지금에 와서는 명작이라고 평하는 작품들도 처음 등장했을 때에는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 전시조차 거부당하는 일도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도가 없으면 평범함으로 묶인다. 다른 것과 비슷하다거나 과거를 따라 했다는 비난이다. 결국 어느 것을 선택해도 비평이나 비난이 뒤따르는 게 예술이다.
인상주의나 야수파, 입체주의 등은 비난의 용어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슷한 부류의 작품이 나오고 그러면서 또 누군가는 그 작품들을 하나의 테두리 속으로 묵어 버렸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어느 유형의 작가와 작품일 것이다.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는 미술사의 한 흐름으로는 조금 아이러니한 사실이 아닐까.
인상주의라는 이름도 비난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1874년 파리에서 열린 전시에서 모네의 《인상, 해돋이》를 본 비평가 루이 르루아는 “이건 그림이 아니라 단지 인상에 불과하다”라고 비웃었다. 형태는 흐릿했고 붓질은 거칠었던 작품은 당시 사람들이 기대하던 정교한 역사화와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조롱의 단어였던 ‘인상(Impression)’은 오히려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이름이 되었다. 인상주의는 빛과 순간의 감각을 표현하며 현대미술의 문을 열었다.
야수파 또한 마찬가지다.
강렬한 원색과 거친 표현을 본 비평가들은 “야수 같다”라고 말했다. 자연의 색을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붉은 얼굴과 푸른 나무를 그리는 모습은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색채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고자 했다. 현실을 그대로 모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 감정을 화면 위에 드러낸 것이다. 조롱의 표현이었던 ‘야수(Fauves)’는 결국 미술사의 이름으로 남았다.
입체주의도 처음에는 이해받지 못했다.
피카소와 브라크의 그림은 사물을 조각난 형태로 표현했다.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그린 것인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비평가는 그것을 “입방체 같은 그림”이라고 비난했지만, 그 시도는 사물을 하나의 시점이 아니라 여러 시점에서 동시에 바라보는 새로운 사고의 출발이었다. 눈으로 보는 세계를 넘어, 생각으로 바라보는 세계가 열린 것이다. 고딕 건축도 한때는 야만적이라 불렸고, 바로크 양식은 지나치게 과장된 예술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사람들은 그 안에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예술은 시대의 기준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 기준 자체를 바꾸는 힘이 있다.
이러한 작품 흐름은 시대를 뛰어넘어 현대에서도 활용된다. 돌이켜보면 새로운 것은 언제나 기존 질서를 뒤흔들고 슬롯의 장벽에 부딪혀 오며 정착되어 왔다. 예술은 단순히 아름다운 그림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보여주고 바꾸어 놓는다. 그렇기에 새로운 예술은 늘 낯설고 어렵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낯섦 속에서 시대는 변화하고 사람들의 감성도 변화한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많은 예술도 처음에는 이해받지 못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낯설다고 외면하는 어떤 작품 역시, 언젠가는 새로운 시대를 상징하는 이름이 될지도 모른다. 예술의 흐름은 결국 낯선 것을 이해해 가며 새로움에 젖어드는 인간 삶의 맥락과 괘를 같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