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자연과 인간의 형상화된 존재를 통해 드러난다. 단순히 살아 있음이 아니라 그 내재적인 근원을 드러내는 것이다. 많은 작가들이 생명을 그림 속의 주제로 다루었다. 결국 삶의 의미를 함축하는 일이자 삶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통해 존귀함을 드러내고 자연의 변화를 통해 생명의 순환 과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이것은 어쩌면 가장 순수하게 다가갈 수 있는 자연이라는 존재를 통해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을 나타내고자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가장 가까이 있되 가장 비유적인 표현방법이 될 수 있는 자연의 신비는 인간의 모습을 곧바로 드러낼 수 없는 이면의 것을 보게 해 준다. 무성한 잎과 깊은 뿌리를 가진 나무는 어디서도 볼 수 없는 커다란 생명의 힘을 느끼게 한다.
어릴 때 보았던 커다란 고목의 웅장함은 힘과 숭배해야 할 대상 같은 영험함마저 느끼게 했다. 그것은 생명의 가치를 알게 하는 원초적 느낌이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힘찬 줄기를 이루며 깊게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모습 자체 만으로도 신비한 존재인 것이다. 그것은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자연의 경외심에 대한 시각적인 대상이기도 하다.
이러한 생명의 근원을 느끼게 하는 작품은 고흐와 클림트, 프리다칼로의 나무에서도 찾을 수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아몬드 나무, 1890 》는 조카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그린 작품이다. 새싹과 꽃이 피어난 아몬드 나무 가지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상징하며, 고흐 특유의 강렬한 색채가 생명의 기운을 전한다. 아름답고 튼튼하게 자라 가지마다 풍성한 열매를 맺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귀중한 열매를 주는 나무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귀중한 것이 된다. 아몬드나무는 조카의 상징이다. 그 고귀함으로 세상에 우뚝 서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은 사랑이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생명의 나무, 1905-09》는 화려한 황금빛의 장식적 문양으로 하늘과 땅을 잇는 나무를 표현했다. 이 작품은 게르만 민족에서 전해오는 신화 위그드라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큰 나무를 중심으로 왼쪽에는 한 명의 여인을 오른쪽에는 포옹하는 한쌍의 남녀 모습을 담았다. 그 위에는 수많은 눈 같은 형상도 보이고 가운데 큰 나무에는 검은 새 한 마리도 있다. 생명의 탄생과 죽음, 순환과 재생을 아우르는 생명의 근원을 상징한다 하겠다. 나무를 통해 인간의 삶의 과정을 표현했다. 클림트의 화려한 황금색 작품은 어쩌면 인간이 지닌 욕망과 두려움 덮고 희망을 기다리는 자기표현의 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프리다 칼로의 《뿌리, 1943》는 누워있는 여성의 몸에서 나무줄기가 자라 뻗어 나가고 있는 모습이다. 몸과 대지를 연결하여 고통 속에서도 이어지는 강열한 생명의 힘을 표현했다. 육체적 고통과 동시에 삶을 잉태하는 존재로서의 모습을 나타낸다. 또한 자신이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희망 같은 것일 수도 있다. 그에게 나무는 나를 드러내는 상징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희망의 메시지가 된다.
조선 민화인 화조도는 꽃과 새가 함께 있는 그림이다. 자연의 번식과 풍요를 상징한다. 계절의 변화와 생명의 활력을 함께 보여주며 집안에 좋은 일과 다산을 기원하는 의미도 담겨 있다. 누구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의미가 담겼다 할 것이다. 또 십장생도(十長生圖)는 해, 산, 물, 학, 거북, 사슴 등이 어우러져 불로장생과 조화를 상징한다. 이는 단순히 오래 사는 것을 넘어 영원한 생명과 자연의 조화를 표현한다. 또한 권위적인 상징성도 있어 소수만의 특권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이렇듯 화가의 생명을 주제로 한 작품은 단순한 자연의 묘사가 아니라 생명의 탄생, 성장, 순환과 같은 삶의 본질을 보여준다. 인간은 자연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하나로 생명은 곧 자연과의 조화를 의미한다. 인간이 바라보는 자연은 따듯함과 친근함도 가지고 있지만 경외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그것은 스스로 범접할 수 없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