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의 구분은 인류의 시작부터 구분되어 온 가장 근본적인 기준이다. 그것은 살아가는데. 필요한 하나의 계몽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어느 순간 변질되어 그 가치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결국 힘의 논리다. 원시슬롯에서 생존하기 위한 힘에 의해 정신적인 가치는 사라지고 선과 악이라는 기준조차 힘 있는 자가 결정해 버리는 것이다. 바로 폭력과 전쟁이 그 결과의 하나다. 모든 것을 나와 너, 선과 악이라는 틀 속에 가두어 다른 선택을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
역사에서도 왕이 올바르면 나라가 안정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곳곳에서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국민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조그만 권력과 힘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그 힘을 남용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폭력이 앞서는 슬롯가 되는 것이다. 힘을 지닌 자가 올바르게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면 약한 자를 죽이고 그 재물을 탐하는 욕심을 가지게 된다. 그 결과 지구상에는 폭력과 전쟁이 끊이지 못하는 것이다. 선과 악이라는 주제를 통해 도덕적인 경고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화가들은 그것을 형상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악을 주제로 한 그림은 악을 지옥·광기·잔혹성으로 시각화하여 경고한다. 보쉬, 고야, 카라바조, 브뤼헐은 작품 속에서 ‘악’은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들춰내어 직시하게 한다. 인간의 잔혹함, 유혹, 타락이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준다.
히에로니무스 보쉬의 《쾌락의 동산, 1500년경》은 인간의 욕망과 타락을 상징적 이미지로 표현했다. 인간세상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심상의 정원이다. 인간 욕망이 펼쳐지는 세계다. 이상향의 세계이자 타락의 공간인 것이다. 중앙에는 쾌락과 탐욕에 빠진 인간들의 축제가 펼쳐지지만, 아름답게 보이던 공간은 어느 순간 뒤틀리고 변질되어 우측에서는 지옥의 형벌이 기다린다. 인간이 꿈꾸던 이상향이면서도 그 욕망이 만들어낸 또 다른 세계가 된다. 악의 유혹과 그 결과를 보여준다.
프란시스코 고야의 《사투르누스, 1819–23》는 권력의 광기를 악으로 형상화했다. 자신의 아들을 잡아먹는 그리스 신 사투르누스를 그린 그림으로 권력과 광기의 극단적 악을 상징한다. 이는 인간 안에 도사린 광기와 잔혹성이 극단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카라바조의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 1599》 잔혹한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여 폭력과 악의 실체를 드러내었고
피터 브뤼헐의 《죽음의 승리, 1562》 해골 군대가 인간 세계를 휩쓰는 장면 인간의 탐욕과 악이 불러온 파국을 풍자하였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는 전쟁이 바로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 낸 현실의 지옥이 아닐까. 인간의 탐욕이 있는 한 전쟁은 과거에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끊임 없을 것이다.
그런 반면
라파엘로의 《시스티나의 성모, 1512–14》는 아이를 품은 성모 마리아의 모습으로 순수와 자비를 상징한다. 성스러운 푸른 망토와 평온한 표정은 선의 빛을 전한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1669경》는 길 잃은 아들을 품는 아버지의 손길 속에 용서와 자비가 담겨 있다. 선은 인간을 감싸는 따뜻한 이해로 드러난다.
불교의 불화인 지장보살도는 지옥의 중생을 끝까지 구원하겠다는 서원을 상징하며, 고통받는 이를 외면하지 않는 선의 극치를 보여준다. 또한 지옥도는 악을 교화적 도상으로 담았다. 죄인은 지옥에서 끓는 가마에 던져지고, 형벌을 받는다. 이는 단순한 공포의 그림이 아니라, 악행을 멀리하라는 교훈을 전하는 것이다.
이렇듯 예술은 인간의 본성 속에 자리한 선과 악을 함께 비추어왔다. 악은 탐욕과 광기로, 선은 자비와 희망으로 표현되며 서로를 더욱 선명하게 했다. 예술은 이 두 가지를 나란히 보여줌으로써 인간에게 삶의 도덕적 선택을 묻는다. 결국 예술 속에서도 선과 악은 대립되고 있다. 그리고 선택의 갈림길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함을 종용받는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는 어찌 선과 악이라는 가름으로 모든 것을 정리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