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리뷰
편견이라는 건 아주 단단하게 뿌리 박힌 생각으로 너무 자연스럽고 그럴싸해 보이지만 동시에 때로는 매우 우스꽝스러운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서울의 고궁은 한복을 입으면 무료입장이 가능한데, 한때 남자가 치마를 입거나 여자가 바지를 입는 것처럼 성별을 바꿔 입으면 무료입장이 불가능했다. 얼핏 보기에는 남자가 바지를 입고 여자가 치마를 입는 건 무척 자연스럽고 그럴싸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남자와 여자라는 구분이 사실은 편견의 소산일 수도 있다는 것. 고궁에 드나드는 관람객을 어떻게 남녀로 구분할 것인가? 외모나 분위기, 차림새, 화장 같은 것으로 대부분은 구분 가능하겠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여자처럼 생긴 남자나 남자처럼 생긴 여자는 그러면 자신의 성별에 맞는 옷을 입고 와도 무료입장이 안 되니까. 타고난 성별 혹은 법적인 성별과 스스로 느끼는 성별이 다른 경우에는?
트랜스젠더 변호사 박한희는 한때 어떻게 해서든 무료입장이 가능했던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이 말도 안 되는 규정에 항의하기 위해 활동가들이 일부러 자신의 성별과 반대되는 옷을 입고 덕수궁에 들어가려다 제지당했다고 한다. 그런데 트랜스젠더 여성인 박한희는 한복 바지를 입고 와서 무료입장이 안 되었는데, 법적인 신분은 남성이기 때문에 신분증을 보여줬더니 무료입장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그전에 치마 입고 왔을 때는 '외형상' 여성으로 보이니 자연스럽게 무료입장을 했고. 이처럼 성별을 여자와 남자로만 나누는 편견이라는 게 그 견고함에 비해 얼마나 허점 많은 것인지 박한희 변호사의 사례만 봐도 알 수 있다. 성별이분법이 우스꽝스러운 장면을 가지고 이야기하니까 우스꽝스러운 거지, 편견은 차별을 받는 당사자들에게는 실존의 문제, 생계의 문제를 위협하는 심각한 것이다.
'트랜스젠더 변호사 박한희의 삶과 생각'이라는 부제가 붙은 바카라 <무지개를 변호하다>는 트랜스젠더가 겪는 차별과 혐오를, 박한희 변호사가 자신의 삶과 자신이 담당했던 소송 위주로 이해하기 쉽게 쓴 바카라이다. 올해 나온 바카라 중에 이보다 더 훌륭한 바카라이 많겠지만, 누구나 꼭 읽어야 할 바카라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바카라을 꼽겠다. 먼저 트랜스젠더를 포함한 성소수자에 대한 이해를 돕는 바카라이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자신의 삶을 바탕으로 썼기 때문에 성소수자들이 겪는 일상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왜 트랜스젠더 어른을 찾아보기가 힘든지, 자신의 삶에 하나의 롤모델이 될 수 있는 트랜스젠더 어른을 만나 보고 싶다(19쪽)"는 어느 청소년 트랜스젠더의 이야기가 지금의 활동의 출발점이 되었다는 이야기로 시작한 바카라은, 30세 이후의 삶을 상상할 수 없었던 박한희가 이제는 "트랜스젠더 중년 노년의 삶을 기록해 나가며 청년 트랜스젠더들이 더 긴 미래를 그릴 수 있도록 조금이나마 힘이 되어 주고 싶다(261쪽)"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그 사이 놓인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의 무지를 여러 차례 반성했다. 나름 인권활동가들의 곁에 오래 머무르면서 눈치코치를 생겼겠지만 트랜스젠더로 한국 슬롯를 살아가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렇다고 이 바카라을 성소수자, 트랜스젠더를 이해하기 위한 용도로만 읽는다면 좀 많이 아쉽다는 생각이다. 박한희가 스스로 말하듯이 대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박한희는 한국슬롯에서 알아주는 전문직 직업인 변호사이자, 보통의 시민들보다 목소리를 드러낼 수단과 자원을 많이 갖고 있는 활동가다. 그렇다고 부당한 차별을 겪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부당한 일을 마주했을 때 싸울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보통의 트랜스젠더나 성소수자들은 그렇지 않다. 박한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만일 내가 이러한 자원도 역량도 없었다면 아무리 억울해도 그대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차별을 받은 피해자가 준비해야만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이 상황이야말로 구조적 차별의 문제를 여실히 보여준다.(252쪽)" 우리가 이 바카라을 읽어야 하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이유는, 이 바카라이 차별을 개인들의 경험 차원뿐만 아니라 슬롯 구조 속에서 바라보며 해법을 모색하기 때문이다. 구조에 내재하고 구조로서 작동하는 차별을 직시하고 이를 해소하는 것은 소수자의 인권 문제에서 시작했더라도 슬롯의 민주주의의 내용을 채우는 일이다. 아니, 소수자의 인권 문제야 말로 민주주의와 정의의 문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무엇이 민주주의이고, 무엇이 정의인지를 고민하려면 이 바카라을 읽어야 한다고 과감하게 말하고 싶다.
암울한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박한희도 그런 사람이다. 나는 바카라을 읽기 전에 박한희를 알고 있었고, 함께 활동을 한 적도 있다. 대체복무 심사와 트랜스젠더 성별정정 심사의 문제점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생각해서 그 문제점을 드러내는 대중행사를 한 적도 있고, 대체복무제 개선을 위한 활동에도 박한희 변호사는 적극적으로 함께 했다. 또한 트랜스젠더의 병역 문제와 관련한 재판을 변호하면서 나에게 전화해 조언을 구하거나 상의를 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대단한 체력과 열정으로 굉장히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긴 했는데, 바카라을 읽어보니 그녀가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
약자, 소수자, 피해자를 옹호하는 활동을 하다 보면 때때로 우리도 모르게 더 불쌍해 보이려 한다든지 수동적인 모습을 무기 삼기도 하는데(물론 이조차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목하지 않고 들어주지 않는 슬롯의 바카라임이 더 크다고 생각하지만) 박한희는 분명 힘든 순간, 힘든 감정이 있겠지만 큰 걸음으로 뚜벅뚜벅 걸어가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스스로 결정한다. 트랜스젠더는 성별이분법 슬롯에서 비가시화되고 차별받지만 피해자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이미 짜인 공정한 판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논의에 새로운 논의를 또 하나 던(188쪽)"지는 이들이 된다.
많은 활동가들이 더디게 변하거나 마치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 지치기 쉬운데, 박한희 변호사는 변화는 이루어진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녀가 10년 동안 인권운동을 해오면서 스스로 법과 제도를 바꾼 적도 있고, 그를 통해 슬롯의 문화나 사람들의 생각이 조금씩 변하는 것을 몸소 경험한 통찰에서 비롯된 말이기 때문에 나는 저 말이 힘이 세다고 생각한다.
이 바카라을 읽는 동안 나는 일부러 표지가 잘 보이게 들고 다녔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바카라을 사람들이 한 명이라도 더 궁금해하고 읽기를 바라는 마음에. 부모님 집에 가서도 바카라을 꺼내놓고 읽었다. 조카들이 트랜스젠더의 존재에 조금이라도 더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갑자기 내 바카라을 집어 들더니 천천히 제목을 읽어 내려가는 게 아닌가. "트랜스..젠더 변호사.. 박한희..." 착하디 착한 우리 엄마 성정상 혐오발언이 나오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엄마가 무슨 말을 할지 나는 알 수 없어 살짝 긴장한 터였다. 정확하지는 않은 기억인데 하리수 씨가 텔레비전에 처음 나왔을 때 엄마는 낯설어하고 어색해했는데 그 느낌이 긍정적이진 않았던 거 같아서 더욱 긴장했다. 이미 아들의 병역거부로 나름의 단련(?)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엄마의 세계에서 병역거부와 트랜스젠더는 또 다른 세상일 테니. 엄마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더니 "너 아는 사람이야?... 고생 많이 하고 살았겠네..." 안쓰러운 감정을 담은 따뜻한 감정이 느껴지는 말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