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좀 못해도 내일은 온다

짧은 리뷰

by이용석

야구가 인기가 좋으니 야구 관련 콘텐츠들도 쏟아진다. 그런데 만족할 만한 작품을 만나는 건 무척 어려운 일이다. 꼭 야구뿐만이 아니라 스포츠물 자체가 빼어난 작품을 창작하기 어려운 영역인 거 같다. 타고난 천재, 혹은 노력형 천재인 주인공이 역경을 딛고 동료들과 함께 승리를 만들어내는, 어찌 보면 너무 뻔한 스토리라서 그럴지도. 그래서인지 재미있게 봤거나 기억에 남는 야구 콘텐츠는 사실 야구 이야기를 가장한 조직과 혁신에 대한 이야기(머니볼), 광주민주화운동 이야기(스카우트), 사랑과 우정에 대한 이야기(H2),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불펜의 시간), 집착과 폭력에 대한 이야기(공포의 외인구단) 같은 것들이었다. 야구는 거들 뿐인 이야기들.


본격적으로 야구를 전면에 내세운 작품들은 잘해도 본전이었는데, 이미 프로야구 자체에 드라마가 있기 때문에 굳이 다른 창작물을 통할 필요가 없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반면 작품이 별로면 오히려 현실 야구보다 재미없는 이야기들도 많았다. 그래서 야구 관련 소설이 나왔다고 하면 관심이 가면서도 이번에도 만족하지 못할까 봐 읽기를 망설이게 된다.


심너울 작가의 소설 <야구 좀 못해도 내일은 온다> 또한 기대 반, 걱정 반을 품은 채 읽었다. 심너울 작가의 작품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SF 작가인 건 알고 있었는데, SF 작가가 쓴 야구 이야기는 무엇이 다를지 궁금하기도 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SF 작가의 야구 소설이라 뭔가 크게 색다른 게 있기를 바랐지만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실망스럽냐면 그것도 아니고,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만큼 아쉬움 반 재미 반을 채울 수 있는 소설이었다.


아쉬움 반 먼저 이야기하자면. 나한테는 그리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들, 클리셰들이었다. 만년 후보인 주인공, 타고난 천재인 동생, 고집스레 구식 야구를 펼치는 노감독, 노감독을 선호하는 극성팬, 노감독과 대립하는 데이터 분석 전문가. 이들이 모여 있는 꼴찌팀. 이런 설정들은 그동안 야구 관련 콘텐츠에서 반복되는 구도였으니까. 다만 이러한 구도는 익숙하지만 디테일에 있어서는 이 작가가 야구를 정말 많이 안다는 느낌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다. 야구를 이제 막 보기 시작한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야구에 대해 배울 수 있는 바카라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재미 반. 일단 이야기가 재미있다. 새롭진 않아도 재미있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새로운 점이 없는 것도 아니다. 큰 틀의 서사는 익숙했지만, 이 소설이 여성을 다루는 방식은 무척 흥미로웠고, 여성 캐릭터들이 만들어 내는 역동성이 익숙한 서사를 다른 이야기처럼 느끼게 만들어줬다. 데이터 분석가인 서나리와 구단 프런트 인턴인 하유미. 색다른 야구 이야기를 읽고 싶다면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 읽어 내려가는 걸 추천한다.


서나리는 메이저리그 휴스턴 애스트로스 구단에서 일했던 바이오매커닉스 전문가다. 선수들의 신체 동작을 과학적이고 의학적으로 분석해서, 선수들이 최대치의 퍼포먼스를 발휘할 수 있도록 솔루션을 제공하는 일을 했다. 과거의 야구 전문가들, 특히 선수 출신 전문가들이 두루뭉술하게 혹은 자신의 느낌적인 언어로 표현했던 것들을 데이터화하는 일을 한다. 예를 들면 예전에는 "공이 구속에 비해 묵직해서 힘이 있다"처럼 말해왔다면 서나리와 같은 사람들은 "rpm이 높아 구속 대비 회전력이 좋기 때문에 타자들의 정타를 만들어 내기 힘들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당연하게도 경험적 언어를 구사하는 현장과 대립하게 되는데, 보통은 숫자만 알고 야구 한 번 안 해본 사람이 무슨 전문가냐는 현장의 의심에 더해 서나리는 여성으로서 사실상 구단주 대리의 역할을 해나가며 마주하는 남성 슬롯의 반발에 직면하게 된다.


보통의 야구 콘텐츠에서 혁신과 변화를 상징하는 데이터 전문가들은 남성 캐릭터인데, 서나리라는 여성을 내세운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그런데 이게 흥미로웠다는 것은 내가 야구 전문가를 무의식 중에 남성으로 상상했기 때문이다. 남성일 줄 알았는데 여성이 전문가로 나오니 흥미로웠던 것. 내 안에 있는 성차별주의를 다시 한번 깨닫고 반성하면서 읽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여성 캐릭터 하유미. 서나라는 작품의 갈등을 이끌어가는 중심 축이고, 여성이기 때문에 좀 색다른 면은 있지만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 움직이는 캐릭터다. 반면 하유미는 어떤 행동을 할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캐릭터, 이 소설의 방향을 휘젓고 다니며 이야기에 생동감을 불러일으킨다. 야구가 좋아서 구단 프런트에 들어왔는데, 하필 그 팀에 회사에서 좌천된 아빠가 단장으로 오고, 만년 꼴찌팀인 하유미네 회사를 상대로 극성팬들이 액션에 나서는데 극성팬덤의 일원이기도 했던 하유미는 액션을 함께 하며 그야말로 대형사고를 쳐버린다. 가장 소설적인 장면이고, 그렇기 때문에 가장 야구 외적인 즐거움을 주는 장면들은 전부 하유미가 이끌어 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칫 뻔하기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서나리와 하유미가 살렸다고 생각한다. 여자야구 이야기가 아니라면 야구판에서 여성은 주로 팬이나 치어리더, 전문직으로는 스포츠 기자 정도로만 그려지기 마련이다. 혹은 프런트의 여성 직원들 또한 데이터 분석이나 이런 역할보다는 선수들을 돌보는, 전형적인 여성의 역할이라고 여기는 일을 주로 한다. 그런데 작품 내 최고 전문가를 여성으로, 그리고 이야기에 긴장과 생동감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캐릭터를 여성 슬롯 초년생으로 설정한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야구라는 생태계에서 여성의 자리를 고민하는 사람들이라면 꼭 읽어야 할 바카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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