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 아래 올리브

짧은 리뷰

by이용석

*중요한 스포일러 있음.


김초엽의 장편 <지구 끝의 온실>과 <파견자들>, 그리고 이번에 출간한 <태양 아래 올리브>를 보면 어떤 흐름이 보인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앞선 작품의 문제의식이 다음 작품으로 이어지는 느낌이랄까.


인류대멸종 이후를 다룬 <지구 끝의 온실>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것은 단연 '모스바나'였는데, '작가의 말'에서 김초엽은 "아주 느리지만 끈질기게 퍼져나가는,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결국 지구를 뒤덮어버릴 생물체"로 식물을 떠올렸다고. 그러면서 박테리아, 바이러스, 곰팡이, 버섯에 대해서도 검토해 봤다고 했는데, <지구 끝의 온실>에서 다루지 못했던 것들이 마치 <파견자들>의 '범람체'가 되어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범람체에 의해 범람화 된 사람들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에 대해 묻는다고 느꼈는데 <태양 아래 올리브>에서는 그 질문을 더 구체화해서 인간은 무엇인지에 대해 영혼을 매개로 이야기가 연결되는 것만 같았다. 전작들의 이야기가 행성적인 스케일이었던 반면 이번 소설은 행성과 비교하자면 작디작은 인간의 뇌 안으로 들어가는 이야기임에도 어쩐지 이런 흐름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파견자>들로부터 이어지는 질문의 흐름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믿는 사람과 의심하는 사람


<태양 아래 올리브>는 확연하게 상반되는 두 친구, 이레와 솔민이 주인공이다. 이레는 푸른아녜스 수녀회 소속 수녀로 미세 기후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푸른아녜스 수녀회는 봉사활동 등 다양한 슬롯활동이 무척 활발한 곳으로 밝고 붙임성 좋은 이레의 성격과도 잘 맞는다. 반면 솔민은 '정바카라연구소'라는 곳에서 에디터로 일하는데 미놋이라는 비공계 과학 유튜브 계정 또한 운영하고 있다. 미놋은 반종교 성향의 냉소적인 성향의 컨탠츠를 생산하는 채널로 알려져 있다.


믿는 게 본령인 종교인(수녀)과 의심하는 게 기본값인 과학 유튜버, 두 사람은 한때 단짝 친구였지만 아주 좋지 않게 헤어졌고 몇 년을 서로 안부도 모르고 살아가다가 모종의 사건으로 다시 인연이 얽히게 된다. 베트남에서 태국 북동부로 이동하는 기차 여정 장면은 두 사람의 상반된 기질이 잘 드러난다. 믿지 않는 이는 모든 것을 계획해야 한다. 사람도 세상도 믿을 수 없으니 자신의 행동만큼은 스스로 컨트롤할 수 있도록 계획이 필요하다. 반면 믿는 이는 늘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이다. 자신이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조차도 힘든 이를 도우며 자신을 곤경으로 더 밀어 넣고 계획을 비틀어버린다.


물과 기름 같은 두 주인공이 함께 하는 로드트립 구도가 특별한 것은 아니다. 이런 류의 구도는 그동안 다른 작품에서도 심심찮게 등장했고, 이런 대비에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상반된 극단에 종교인과 과학자가 위치한다는 것도 특별할 건 없다. 그렇지만 이 익숙한 대비는 소설의 후반부의 핵심적인 질문과 만나면서 색다르게 읽히는데, 그건 좀 이따 이야기하고. 나는 이 여정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는데, 나 안의 이래와 솔민을 발견하면서 읽었기 때문이다.


활동가로서 나는 믿는 사람이자 의심하는 사람을 동시에 해내야 한다. 세상을 바꾸고, 슬롯정의를 실현하는 일은 굉장히 많은 노력을 들이며 오랜 세월이 필요한 일. 그래서 많은 활동가들이 지치기도 한다. 그러니 세상이 좀 더 좋은 방향으로 바뀔 수 있다고 믿지 못한다면, 오래 걸릴지언정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이 일을 지속할 수 없다. 종종 나는 슬롯운동과 종교가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그중에서도 보이지 않는 가치들-신앙, 민주주의, 정의 같은 것들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운동권들이 슬롯운동은 종교와 다르고 과학이라고 이야기하겠지만, 슬롯운동의 공리는 수학보다는 종교적 믿음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나는 좋은 활동가가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의심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먼저 권력이 하는 일을 의심하고 감시해야 한다. 모든 정치권력은 태생적으로 거짓말쟁이다. 도덕적 윤리적 차원의 비판이 아니라, 속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선의의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정치세력이란 무능한 집단일 뿐이다. 다만 그 정치 집단이 권력을 쥐게 되면 거짓말은 억압의 도구가 되기 때문에 활동가에게 의심은 과학자에게 의심만큼이나 중요한 시작점이다. 또한 더 좋은 활동가가 되기 위해서도 스스로를 의심해야 한다. 내가 하는 주장이 옳은지, 허점은 없는지, 내가 생각하는 것이 올바른지 의심하지 않는다면 세상을 좋게 만들겠다며 오히려 망치는 쪽으로 몰아갈 수도 있으니.


그런데 나는 솔직하게 말하자면 솔민보다는 이레에 가까운 사람이다. 믿고 의심하고 그런 것보다도, 나는 솔민처럼 생각하기보다는 이레처럼 행동한다. 문제를 잘게 쪼개고, 계획을 촘촘하게 짜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좀처럼 내 몸에 맞지는 않는 방식이라고 느낀다. 움직이고, 행동하고 그 뒤에 상황을 살펴가며 계획을 짜는 편이다. 하지만 그렇게만은 살 수 없는 법. 특히 다른 이들과 함께 일하려면 결국 어느 정도는 솔민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것도 안다. 그렇게 한참을 솔민처럼 해보려고 노력했는데, 이제는 조금 그냥 편안하게 본래의 내 모습-이레처럼 살고 싶기도 하다. 일단 하고, 될 대로 되라지, 뭐든 되겠지 하는 마음이 조금은 그립다.


인간의 조건

*여기서부터는 바카라을 먼저 읽기를 추천합니다.


<파견자들>에서 '범람화'된 인간을 통해 인간의 경계와 인간됨의 의미를 질문했다면, 이번 소설에서는 준과 이레를 통해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묻고 있다. 준은 이레가 가장 사랑하는 이모, 그런데 엄마의 친자매는 아니고 이레가 어렸을 적 이레 집에 같이 살면서 이레를 홈스쿨링 해준 가정교사다. 휠체어를 타고 해왕성색 머리를 한 준은 신비한 사람이었고, 그가 들려주는 매력적인 이야기들이 어디부터 진실이고 어디까지 거짓인지 알 수 없지만 이레는 준에게 마음을 열고 푹 빠져든다. 그런 준이었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레 곁을 떠나고 좀처럼 연락이 닿지 않는다.


사실 준은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뇌의 구조를 모방한 뉴로모픽 컴퓨터였고, 준의 돌봄은 물리적 세계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시뮬레이션 공간이었다. 이레는 어렸을 적 큰 사고로 뇌의 손상을 입었는데 실험적인 치료 덕분에 합성뉴런이라는 인공물질이 뇌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준이 하는 일은 합성뉴런이 뇌의 일부(혹은 대부분)를 차지하게 된 아이들이 다시금 슬롯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혹은 일종의 프로그래밍) 하는 역할이었다. 인공 합성 물질과 뇌를 결합하는 연구는 꽤 오래전에 법적으로 금지되었는데, 그걸 다시 부활시키고 싶은 의문의 집단인 그라프트가 이레를 통해 준에게 접근하려고 하고, 이레는 자신의 뇌가 합성 물질로 구성된 것을 모른 채 살다가 그라프트가 꾸민 사건에 휘말리며 자신의 비밀(그리고 엄마와 준 이모의 비밀)을 알기 위해 준을 찾아 솔민과 함께 여행을 떠나게 된다.


별별 일을 다 겪으며 이레가 마주한 준은 수조 안에 들어있는 일종의 인공 뇌, 실리콘 AI들과는 다른 물질에 속박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의식을 가진 존재였다. AI가 보통 사람들의 일상과도 아주 가까워진 지도 제법 되었다. 사람처럼 말하고, 작곡하고, 글을 읽고, 글을 쓰는 AI의 등장 속에서 사람들은 늘 인간과 AI의 차이점을 발견하려고 한다. 나 또한 그런데, 어떤 안도감을 얻고 싶어서 그러는 거 같다. 내가 인간이라는, 인간에게만 허락된 고유한 것이 있다는 안도감. 소설을 처음에 인공적인 것들과 구분되는 인간 만의 고유한 속성을 '영혼'을 중심에 두고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소설의 전반부에서는 이레의 곤경을 빌어 합성 뇌를 가진 수녀에게 영혼이 있는지를 물었다면 후반부로 가서는 질문이 바뀐다. 이레는 자기 뇌의 비밀을 다 알게 되고 나서 오히려 자신이 인간인지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고 대신 준에게도 영혼이 있는지, 준에게도 마음이 있는지를 질문한다.


김초엽 작가는 마치 인간의 고유한 속성을 부여잡기보다는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필요한 속성이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처럼 소설을 이끌어간다. 영혼이 인간과 AI를 구분하는 결정적 증거라면 우리는 AI의 창작물과 인간의 창작물이 같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다르다고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차피 영혼은 끝내 증명할 수 없는 것이니까.


"오직 시간만이 맥락 있는 순차적 경험을 만들어낸다.(273쪽)"


나는 AI와 인간이 창작의 영역에서 다른 것은 무엇보다도 시간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간과 AI의 시간은 다르니까. AI와 인간의 시간이 다른 까닭은 세월의 흐름으로서 시간의 절댓값이 다른 것도 있지만 시간과 겹쳐지는 공간 혹은 그 시공간 안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사건들의 밀도 같은 것들이 아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생각하고 계산하는 방식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업무들을 우리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 나간다. 반면 우리의 시간은 공간과 육체의 제약에 묶여 있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자기가 살아가는 공간(그것이 동네든, 나라든, 행성이든) 바깥에서 사고할 수는 없으니. AI에게는 제약 없음(혹은 미비함)이 축복이겠지만, < 태양 아래 올리브>를 보다 보면 우리에게도 그 제약은 축복이다. 준이 의식과 의지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물리적 제약 때문이었던 것처럼. 물리적 제약은 우리에게 시간을 낭비하게 하고, 그 낭비 속에서 우리는 맥락을 만들고, 우리는 우리가 겪은 사건의 단순한 시간적 나열이 아니라 그 맥락을 경험으로 인지하는 것일 테니까.


과학의 의심도, 종교의 믿음도 결국 세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인간 욕망의 발현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세계를 이해하고 설명하려는 언어가 과학이라면, 우리가 도달할 수 없고 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에 대한 가설이 종교라고 생각한다. 결국 인간됨, 혹은 AI와 구분되는 인간의 속성이란 세상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마음, 세상을 설명하는 언어를 찾기 위한 노력 같은 게 아닐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김초엽 작가가 이 소설에서 가장 인간답게 그리는 캐릭터는 내 생각에는 준이다. "인간보다도 더 절박하게 세상을 이해하고 싶어 하는 마음(320쪽)"을 가진 존재이니까. 그리고 별을 쫒는 사람이니까.



최악의 폭염, 지난 일주일 <태양 아래 올리브> 덕에 살아냈다. 김초엽 작가 다음 소설 나올 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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