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참 오랜만이죠.
뭉게구름이 가득한 새파란 하늘, 이글거리는 햇볕이 내리쬐는 일상에서 시원한 바람이 반가운 오늘, 어떻게 지내고 있어요?
저는 요즘 통 입맛이 없어 통통하게 살이 오른 매끈한 보랏빛 가지를 주문했어요.
가지를 반으로 나누고 토막으로 썰어 삼발이에 가지런히 올려 찌기로 하고, 올려둔 가지가 푹 삶아지는 동안 남은 가지를 얇게 송송 썰어 가지전을 만들었어요.
그동안 푹 익은 가지는 먹기 좋게 잘라 저만의 비법 양념장에 무쳤어요.
수분이 많은 가지는 먼저 무쳐서 먹는 것보다 미리 쪄 놓은 가지를 먹을 때마다 양념장에 무쳐서 먹는 것이 더 맛있어요. 가지 특유의 물컹거리는 식감에 꺼리는 사람도 있으나 여름철에 통통한 가지를 요리해서 먹는 가지전과 가지무침은 여름에만 특별하게 맛볼 수 있는 별미예요.
겨울에만 유독 맛있는 시금치를 먹는 것처럼요.
당신의 오늘 점심은 어땠나요? 맛있게 먹었나요?
매일 끼니를 때우듯 평범한 일상들 속에서, 그날은 좀 특별한 느낌이었어요.
저는 여느 때처럼 출근하기 전, 일할 때만 쓰는 동그란 뱅뱅이 안경을 걸치고 버스를 탔죠.
제 귓가에서만 들리는 노래에 마음을 실어 창문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푸릇한 나무, 무심한 표정의 사람들과 새로 생긴 듯한 가게 점포들이 보이네요.
버스는 정류장마다 사람들을 태우고 내려주는 충직한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때 갑자기 저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고 저는 창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거두고 누군가를 보았어요.
50대 초반에 남자였어요. 나를 아는 듯 빤히 보는 사람과 지그시 눈을 맞추었어요.
그렇게 몇 번의 눈을 깜빡이니 그는 버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어요.
“어머니 저랑 만난 적 있었죠?”
작년 아이들 어린이집 행사 때 체육 선생님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고, 체육 선생님은 제 손을 덥석 잡았어요. 어린이집에 갈 때면 가끔 보는 체육 선생님이었는데, 그때만큼은 저라는 사람을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듯 체육 선생님은 친숙하게 다가왔어요.
그렇게 그녀와 대화를 나누었고, 그녀가 떠올렸던 그 사람이 아니라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아마 버스 안에서 보았던 그 남자도 뱅뱅이 안경을 쓴 저를 보며 추억 속에 누군가를 떠올랐을지도 모르죠.
그렇게 며칠이 지나 저는 또 버스를 타고 자리에 앉아 노래를 들으며 무심코 창밖을 보았어요.
늘 스치듯 지나가는 사람들과 횡단보도를 재빠르게 건너는 사람들, 그러다 핸드폰을 들고 좋아하는 노래를 고르고 있었어요. 버스는 정류장에서 멈추었고, 무심코 창밖을 보았어요.
그런데 며칠 전에 버스 안에서 보았던 그 남자가 창밖에서 보였어요.
그 남자는 길을 가다 무심코 올려본 버스에서 창문 안에 있는 저를 보았던 걸까요?
코의 중간쯤 걸린 뱅뱅이 안경을 다시 추켜세우고 더욱 커진 눈으로 창밖을 보았죠.
버스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고, 그는 제 시야에서 조금씩 멀어졌어요.
그러다 문득 ‘당신’이 생각이 났어요.
솔직히 나는 당신 얼굴이 흐릿하게 남아있어요.
몇 년 전, 중국에서 퍼진 바이러스 하나가 퍼져 전 세계를 아프게 한 적이 있었죠.
그전에 한두 번 당신의 얼굴을 본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아요.
이따금 당신은 저와 마주 볼 때가 있어요. 뚝심 있게 쓴 마스크 위로 보이는 가느다란 은테 안경 속의 별처럼 반짝이는 당신의 눈을 보고 있어요.
지난달, 저에게 안 좋은 일들이 있었어요.
발목을 다쳐 깁스 신세를 져야 했었어요.
그 일이 있고 얼마 후, 저는 어려움에 처한 한 사람을 접하게 되었어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저의 마음과 달리 그 마음은 의도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갔고, 느닷없이 불어오는 강력한 회오리가 제 머릿속에 자리 잡았어요.
깁스를 하고 절뚝이며 휘청거리는 몸과 머리를 부여잡고 하루를 버티며 살아야 했죠.
깁스하고 잠을 잘 때면 깊게 잠에 들지 못해서 힘들었는데, 제가 곁에서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다시는 그 발목을 다치지 말라고 지탱해 주던 그 ‘깁스’였어요.
몇 개 남지 않은 약을 확인하고 당신이 일하는 곳에 전화할 때,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그 전화를 기다리는 동안 아무 생각 없이 TV를 보고 애써 웃기도 했어요.
지친 몸과 멍들어 버린 나의 마음을 챙겨주는 따스한 당신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맴돌 때, 멈출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마른침으로 삼켜야만 했던 나를 배시시 웃게 해 준 당신이었죠.
저는 왜 이렇게 당신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걸까요?
어쩌다 스치듯 생각 넘어 버스에서 보았던 그 사람을 떠올려 보았어요.
어느 날, 길을 가다가 다시 그 사람과 마주치는 순간이 온다면, 수십 년 전 꽃다운 청춘으로 돌아간다면 ‘그는 어쩌면 나의 운명일 거야.’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 같아요.
하지만 어느덧 중년이 된 저는 ‘운명’이라는 것에 새로운 정의를 내리게 되었어요.
불가피하게 어쩔 수 없는 끌림과 불가항력 적으로 이루어지는 만남이 아니라, 서로에게 필연적으로 다가가 서로의 빈자리를 알고 채워주며 안락함을 주는 것이 운명이 아닐까요?
정말 운명이라는 것은 진정 존재할까요?
당신은 운명이라는 것을 믿나요?
당신이 지어준 약을 먹으며 머릿속 소용돌이도 잠잠해지고 있어요.
일을 할 때에는 때로는 어지럼증이 있으나 무탈하게 일을 하고, 저녁에는 저를 괴롭히는 근심 없이 어느샌가 저는 꿈속여행을 떠나곤 한답니다.
따사로운 오후, 잔디밭 정원에서 비눗방울을 부는 꿈을 꾸었어요.
제가 이루고 싶은 그 소원의 비눗방울은 꿈속 하늘 어딘가에 맞닿아 있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점점 뜨거워지는 여름날, 당신은 어떤 하루를 보내고 있나요?
저에게 여름은 사계절 중 썩 반갑지 않은 불청객이지만, 뜨거운 태양 아래서 코끝에 스며드는 따사로운 공기, 가끔 한들거리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꽃들, 저를 미소 짓게 해주는 모든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려고 해요.
앞으로 겪게 될 힘듦과 아픔 뒤에 아름답고 씩씩한 꽃 한 송이가 제 마음속에 피어 날 것이라 믿고 싶어 져요.
당신의 몸과 마음에도 늘 평온이 함께 하길 바랍니다.
며칠 전, 버스에서 듣게 된 노래가 있었어요.
버스 손잡이에 기대어 제가 좋아하는 그 노래를 아무도 듣지 못하게 나지막이 조용한 목소리로 따라 불렀던 그 노래가 마음에 남아요.
보다 많은 실패와 고뇌의 시간이
비켜갈 수 없다는 걸 우린 깨달았네
이제 그 해답이 사랑이라면
나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겠네
-조용필 「바람의 노래」 중에서-